춤추는 여인의 침묵

수잔 발라동과 오귀스트 르누아르

by 말하는 돌

1883년, 마리 클레멘타인은 르누아르의 화폭 속에서 부르주아 여인의 얼굴로 다시 태어났다. 〈도시의 무도회〉 속 그녀는 현실의 삶과는 닿을 수 없는 세계에서, 타인의 시선에 의해 규정된 사회적 형상으로만 존재한다. 이 작품과 짝을 이루는 〈시골의 무도회〉에는 훗날 르누아르의 아내가 될 알린 샤리고가 등장하는데, 두 여성의 모습은 도시와 시골이라는 서로 다른 무대 위에서 대조적인 얼굴로 병치된다.


〈도시의 무도회〉에서 남녀는 무성한 식물과 대리석 기둥 사이,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단둘이 춤을 춘다. 여인은 순백의 드레스와 긴 장갑으로 단정히 치장했으나, 몸은 긴장으로 묶여 있고 표정은 굳어 있다. 남성은 검은 턱시도의 격식으로 그녀를 이끌지만, 두 사람의 밀착된 몸 사이에 감도는 것은 사랑의 온기가 아니라 규율의 냉기다. 화려함은 감정을 삼키고, 세련됨은 열정을 억압한다. 그녀의 발끝에서 흘러나와야 할 리듬은 예법의 사슬에 갇혀 흩어져 버린다.


그러나 〈시골의 무도회〉는 전혀 다른 숨결을 품는다. 나무와 군중이 만든 자연의 무대 위에서, 남녀는 웃음을 나누며 춤에 몰입한다. 여인은 분홍빛 드레스와 붉은 모자를 쓰고, 얼굴에는 햇살 같은 미소를 띤다. 남성은 밀짚모자와 남색 재킷으로 소박하면서도 친근하다. 두 사람은 역동적인 몸짓 속에서 눈빛을 주고받으며, 춤은 공동체의 호흡과 바람의 리듬에 맞추어 흘러간다. 도시에서 억눌렸던 감정은 시골의 들판 위에서 비로소 제 목소리를 되찾는다.


도시의 춤이 세련됨의 가면 뒤에 숨은 긴장과 형식을 보여준다면, 시골의 춤은 공동체의 자유와 감정의 직접성을 상징한다. 여성의 몸과 시선에 주목하면 그 대비는 더욱 선명하다. 도시 속 여인은 남성의 어깨에 기댔으나 얼굴은 옆으로 돌려져 있고, 시선은 허공에 흩어진다. 그녀는 감정을 주고받는 주체가 아니라 감시의 무대 위에 세워진 장식물일 뿐이다. 반대로 시골의 여인은 남성을 곧장 바라본다. 눈빛은 불빛처럼 번져나가고, 미소는 감정을 적극적으로 건넨다. 그녀는 더 이상 객체가 아니라, 교류의 주체이며 춤의 중심이다. 남성 역시 그 시선을 받아들이며, 두 사람의 관계는 대등한 친밀감으로 변한다.


르누아르의 두 작품은 여성을 이중적으로 재현한다. 도시에서 그녀는 규율에 억눌린 몸, 감시받는 존재로 남지만, 시골에서는 감정을 드러내고 시선을 나누며 주체로 살아난다. 그러나 마리 클레멘타인의 삶은 이 두 얼굴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녀는 화폭 속에서 부르주아의 치장을 두르고 서 있지만, 그것은 그녀의 현실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결국 그녀는 자기 목소리를 지닌 인물이 아니라, 르누아르의 시선이 부여한 사회적 상징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도시의 엄숙한 백색 드레스에서 그녀의 진짜 이야기는 침묵 속에 묻혀 지워지고 만다.


새로운 예술이 태어나는 작업실은 경이와 신비로 가득했지만 동시에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이 가장 잔혹하게 작동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남성 화가들의 욕망에만 자리를 내어주던 그곳에서 마리 클레멘타인은 어린 시절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약자의 자리에 서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편견을 무릅쓰고 모델이라는 일을 받아들였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버릴 것도, 잃을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림을 못 그릴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성역처럼 견고했던 작업실에서 위치의 전복을 꿈꾸었다. 캔버스 너머로 약동하는 화가의 손을 따라가며, 그녀의 마음 또한 흔들렸을 것이다. 어린 시절, 종이만 있으면 그림을 멈추지 않던 소녀처럼, 모델로 서 있던 틈틈이 연필을 들어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화가는 못마땅해했으나, 자의식 강한 그녀는 개의치 않고 쉬는 시간마다 거친 선을 이어갔다. 자신의 몸을 기억하는 손의 움직임으로, 그녀는 스스로의 형상을 다시 새겨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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