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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Nov 29. 2019

믿지 못할 386은 쉽게 떠난다

꼰대의 시대

꼰대의 시대


요즘 ‘꼰대’란 말은 세대 간 갈등의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꼰대라 불리는 순간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챈다. 386이라 불리던 세대를 ‘꼰대’로 싸잡아 부르는 시대, 386세대들은 과연 이런 사회 무드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꼰대란 말은 사실 나이에 대한 구분은 아닌 것 같다. 우린 심심치 않게 ‘젊은 꼰대’, 혹은 ‘밀레니얼 꼰대’라는 말도 쓰곤 한다. 나이를 불문하고, 꼰대라 불리는 사람들에겐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건 불통과 시대변화에 대한 무지(無知) 같은 것들이다.


구세대를 꼰대라 부르게 된 건, 아마 어느 시대에서나 나이 든 사람들이 시대 변화에 둔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시대에서건 구세대들은 답답한 일면이 있었지만, 과거에는 젊은 세대들이 이를 잘 참았던데 비해, 지금은 젊은 세대들이 이를 참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특별히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도 잘 모르겠다.

 요즘은 누군가 식당에서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바로 이런 일이 있었다며 SNS에 고발하는 시대다. 시대가 실시간 소통으로 투명해지면서 나이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작은 오류들을 굳이 참아 넘길 이유가 없게 됐다.


생각해보면 믿기지 않는 시절들이 있었다. 과거 정치인들은 구차한 변명과 언론플레이만으로도 자신들의 비리들을 무마할 수 있었다. 그땐 평범한 사람들에겐 ’ 공론화’의 창구가 없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웹과 SNS라는 자발적인 창구를 가지고 있다. 비판정서는 바로 바로 드러나고,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불통과 무지는 사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오래도록 만연했던 ‘생활 비리’ 중 하나였다. 누구나 저지르고 누구나 당하고 누구나 어이없지만 손대지 않았던 문제 말이다.  


25년 전 내가 처음 사회에 발을 들였을 때에도 사실 상황은 지금과 다를 것이 없었다. 신입이었던 나의 눈에 비친 기업 내 상사 중 대다수가 불통과 무지의 화신들이었다. 당시 사회에 첫발을 들이고  느꼈던 것은 어떻게 이런 허술한 시스템으로 운영되면서 회사가 망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 회사는 IMF가 터지고 바로 망했다.


그때의 나는 그런 것들을 표현할 수 없었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은 바로바로 표현한다. 사회가 무심하게 바뀐 것처럼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럴 뿐이다.


집단주의라는 기이한 병


불통과 무지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뭉치게 된다. 서로 그런 사람이 귀하기 때문에 집단은 매우 소중한 곳이어서 집단주의가 쉽게 형성된다.


그런데 집단의 색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뒤틀린 집단주의가 성장하게 된다. 불통과 무지의 시대에는 집단간이나 집단 내부에서도 충분한 소통없이 성장하는 게 당연시 되기 때문이다.  


이런 집단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는 집단 내 누군가의 부적절한 행동이 보고될 때 드러난다. 이들이 보기에 부적절한 행동을 한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건 바로 이 일을 고발한 사람과, 일의 처리에 대해 ‘말이 안통하게 구는’ 사람들이다.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모인 우리 집단에서 말이 안통하게 굴다니, 자칫 집단의 존재이유를 흔들게 될지 모르는 암적 존재들이 아닌가. 이런 두려움은 아이러니하게도 부적적한 행동을 한 사람을 되려 적극적으로 변호하게 만드는데, 이런 순간이 바로 진영논리의 메커니즘이 발동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러한 집단주의는 사실 필요가 없다. 굳이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뭉치지 않아도, 세상 자체가 말이 통하는 세상으로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지나치게 결속력이 강한 집단은 시대착오적이며 병적으로 보인다.


주일마다 광화문을 점령하는 노인 시위대의 엄청난 결속력은 놀랍다. 그분들이 흔드는 국기의 조합이나 목청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는 결연함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어떨 땐 너무나 신기해서 묻고 싶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 결연함으로 과거 독재정권하의 우국(憂國)의 순간들은 어떻게 견디셨나요?"


그뿐이 아니다. 얼마 전 김학의라는 천인 공로할 범죄자가 무죄로 석방됐다. 그 오랜 기간 그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 다같이 묵인 하에 공소시한 만료란 합작품을 이뤄낸 이들이 있다. 범죄자를 위한 이런 결속력은 병이 아니면 무엇일까?


얼마 전 국군 간호사관학교에서 성희롱 사건이 일어났건만 학교는 깜짝 놀라 분노하지 않았다. 안희정 도지사의 성폭행 사건이 공론화되었을 때에도 누군가는 무조건 그를 감싸기 위해 열심히 변명했다. 우리 시대에 평범한 사람들 눈에 진실로 기이하게 비치는 것은 그런 사건이 제기되었을 때 보게 되는 집단의 천연덕스러움과 태연함이다.


그들은 왜 그러한 일이 불거졌는데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보고되었다’며 스스로 엄중한 진상조사에 나서지 않는 것일까? 대체 얼마나 자주 그런 일이 있었고, 그간 얼마나 자주 뻔뻔하게 덮어온 것일까?  


사람들을 비이성적 집단주의로 몰아넣는 데에는 ‘낭만  역할을 하는  같다. 우리끼리의 의리를 지키는 것, 더 큰 적과 싸우기 위해 감수해야 할 것  같은 데에 마취되면 눈이 멀기 마련이다. 그런 낭만은  얼핏 집단의 결속을 다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집단을 와해시키는 지름길이다.


왜냐하면, SNS와 웹이 만들어놓은 열린 시대에선 스스로를 마취시키면,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는지에도 감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민식이 법을 인질삼아 선거법을 딜치고 있는 자유한국당은 그 좋은 예다.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감이 떨어진지 오래되었다.


“늘 깨어 있으라”


나는 종교가 없지만, 가끔 성경의 어떤 구절은 참으로 새겨둘 만하다. 특히 ‘늘 깨어 있으라’라는 말은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가르침이다. 늘 깨어있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밖에 없다.


최근 들어 불거지고 있는 386 퇴진론은 그런 면에서 흥미롭다. 우리는 간혹 일부 386세대가 스스로 386 퇴진론을 주장하는 걸 보기도 한다. 그들은 ‘젊은 세대를 위해 우리 다 같이 물러나자’라고 말한다.  


어딘가 대인배(大人輩)의 낭만이 느껴진다.


이런 낭만은 기업 내의 386 세대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그들은 ‘젊은 친구들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며 젊은 직원들과 일부러 대화의 장을 갖는다. 그리곤 젊은이들의 의견은 실제로 경청하고 업무에 반영해보기도 한다. 심지어 더 너그러운 리더들은 젊은 직원들의 무책임한 성향이 문제시될 때에도 이는 ‘다 구세대의 잘못’이라며 떠안기도 한다.


낭만은 우리를 마취시킨다. 낭만이 없다면 이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겠지만, 낭만은 엉뚱할 때 등장하면 당황스러운 것이 된다.

 

생각해보면, 모든 젊은 친구들이 젊다는 이유로 유의미한 의견을 가졌을 리는 만무하다. 실제로 나는 무책임하고 어이없는 젊은이들을 여러번 본 적 있다. 젊은 친구들의 무책임한 의견을 내보였을 때 기업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마찬가지로 나이 든 사람들이 나이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꼰대 일리 만무하다. 실제로 나는 386세대 중에 사회 각 분야에서 탁월한 혜안을 가진 분들을 여럿 알고 있다. 이들이 다른 386 세대와 묶여 다 같이 퇴진한다는 건 사회적 손실이다.


대체 이렇게나 다른 사람들을 굳이 나이란 잣대로 묶어 집단 대 집단의 행동방식을 정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다같이 물러나자는 말에는 '우리 다같이'라는 집단주의와 '물러나자'는 불통의 망령이 남아있다. 구세대가 정말로 책임이라는 것을 지겠다고 생각한다면, 물러나기 전에 집단을 벗어나 개인으로서 시대와 소통하려 노력해야 한다.


토론이 아닌 소통의 공허함


그러나 타인과 소통한다는 것은 때로 공허하고 힘든 일이다. 소통의 장(場)에 나아가 얘기를 해보아도, 서로 동어반복 끝에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일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일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소통에는 지켜야 할 룰이라는 게 있지만, 대부분 그 룰이 뭔지 잘 모르거나, 혹은 알고도 무시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가 ‘소통’이라 부르는 행동은 정확히 ‘토론’이란 말로 대체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질문하는 지점에 꼭맞는 답변을 하고, 잘못된 부분은 수긍하고, 질문이 무시되었으면 제청하고, 제청된 질문에는 반드시 답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어야 한다.


이런 룰 없이 소통을 하면 ‘함께 모여 각자 말하기’ 외에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누군가와 토론 비슷한 걸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토론을 가장한 이상한 대화였다. 그는 질문할 때마다 대답대신 다른 사례로 옮겨갔다. 기억에 의존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곤 거듭 질문이 반복되자 '저는 여기까지'라며 산뜻하게 물러났다. 나는 실로 피로하고 공허했다.


아래가 그와의 대화 내용이다. 보면서 어떤 부분이 룰을 어기고 있는지 이해가 되었으면 한다.
(아래의 대화가 다시금 조국 사태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없길 바란다. 나는 조국을 지지하지 않으며, 조국을 무조건 옹호했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조국 가족 수사에 잔인할 정도로 지나쳤던 검찰 또한 이해 못하고 있다.)


그가 말한 내용의 4가지 지점에 대해 나는 3가지 지점에는 각각  질문을 던졌고, 1가지 지점엔 동의하였다.

그는 3개의 질문과 무관한 다른 사례를 이야기했고, 나는 그가 말한 내용에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번에도 질문에 대한 답대신, 다른 사례를 들고 나왔다. 나는 결국 대화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다.

'피의사실유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을 때쯤 그는 대화를 끝냈다.

처음에 나는 그의 나이가 어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솔직히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동안 보아오건대, 토론이 무엇인지 이해 못하는 데에는 나이차가 따로 없었다.


젊은 친구들도 소통에 익숙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그들이 386 세대를 한데 묶어 세대론으로 공격하곤 하는 것도 소통에 미숙해서다. 원래 토론문화가 없는 사회는 집단끼리 뭉쳐 쉬이 진영을 나눈다. 보수와 진보, 젊은이와 꼰대, 남성과 여성..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진영이 생기고 나면 토론은 더더욱 무의미해진다.  


타인과 내가 다를 때, 집단 속에 숨어 멀리서 내 주장을 외쳐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누군가 토론을 걸어온다 싶으면, 적절히 상대하다 ‘무의미하니 이제 그만’이란 대인배 스탠스를 취한 뒤, 다시 집단 속으로 컴백하면 그만이다.


아무렇게나 소통하고 쉽게 물러나는 습성, 이것은 ‘꼰대’란 말이 대변하는 불통과 무지만큼이나 한국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정말이지 뿌리 뽑기 힘든 원시적 ‘생활 비리’다.  누구나 저지르고 누구나 당하고 누구나 어이없지만 손대기 어려운 문제 말이다.   


'책임'의 의미


TV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의 토론은 보고 있자면 룰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학교에서도 토론 없이 성장한 젊은 세대들은 그런 토론을 보고 무엇을 배울까?


합의하는 유연함이 얼마나 가치로운 것인지, 그런 이들에게 어떤 존경과 명망이 돌아가는지를 본 적 없는 젊은이들이다. 그 대신 그들은 자라면서, 영리한 편법들이 대학입시나 취업문제에서 얼마나 불공정한 질서를 만드는지는 똑똑히 보아왔다. 이들은 그런 TV토론을 보며, 자칫 토론이란 사회적 대의나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어떤 경우에도 체면을 잃지 않는 기술이라고 배우고 있는 건 아닐까?


386세대가 정말로 시대적 책임에 통감한다면, 개인 대 개인으로 동세대와 진지하고 치열하게 토론해 구세대의 잘못된 의견들을 스스로 부수어 주었으면 한다. 그 세대 안에서 토론으로 왜곡된 것을 부수고 끝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아랫세대에 대한 세대적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울러 젊은 세대와도, 사실 진지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것만이 그들을 진정한 성인으로 존중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가진 무지와 야만에 대해, 토론의 룰이 지켜지는 곳에서 적절히 깨달을 기회를 주고, 그렇게 토론이란 더 나은 의견을 구하기 위한 최고의 소통임을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취해야 할 행동이다.


낭만적으로 물러나는 일은 쉬운 일이다. TV에서 우리는 걸핏하면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사람들을 본다. 대체 물러난다는 건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진다는 걸까? 그들 중 누구도 사재를 털어 책임을 다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냥 물러나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면 책임을 진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젊은이들만의 사회가 이뤄진들, 사회적 합의에는 서툰 구세대의 악습은 그대로 남고 구세대의 지혜와 경험은 물려받지 못한 사회라면 무슨 소용일까?  그렇게 되는 것이 과연 구세대로서 책임을 지는 것인지 한번 쯤은 낭만을 벗어나 생각해봐야 한다.


꼰대 담론이 커진다는 건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불통과 시대변화의 문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세대론이나 386 퇴진론이 아니라 한국에 제대로 된 토론문화를 심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진실로 소통과 변화에 대한 적응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면, 개인 대 개인으로 토론할 수 있는 문화를 양성해야 한다. 토론장에서 룰을 지키는 문화, 쉽게 물러나거나 논점을 흐리는 행동을 비판하는 문화를 양성해야 한다.


애초에 성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개인’으로 바로 선다는 뜻이다.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개인의 양심과 철학보다 중요하다면, 그건 그가 성인으로선 미숙하다는 뜻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쓰고 나서 이 책이 담고 있는 난징대학살의 고스란한 묘사 때문에 일본에서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사죄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과거 일본의 침략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국이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 라 이야기한다. 이 말은 더 큰 분노를 불러웠지만 그는 이렇게 응수했다.


“내가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이 아니다. 오직 나의 ‘소신’뿐이다”


그의 말은 진정한 의미의 성인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우리 각자는 얼마만큼 성인일까? 어떤 소신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스스로의 소신을 어떤 방식으로 대표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소통의 바른 방식, 토론의 문화만 있었어도 오늘날 세대갈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만천하에 드러난 스스로의 오류를 덮을 수 있다고 믿는 병든 집단주의 또한 토론 문화가 있었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는 더 많은 불통과 무지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공감은 있으되 소통할 방법을 모른다면, 그럴 때 고개를 드는 것이 '혐오론'이다. 서로 도저히 소통할 길 없는, 내치지 않고서는 도무지 감당할 방법이 없어 보이는 불통의 무리들을 앞에 놓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상대를 죽일 수도 불태울 수도 없을 때, 서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죽어라 혐오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혐오와 불통은 어찌보면 같은 맥락이다. 부디 한국 사회가 올바른 성인을 길러내는 사회가 되길, 또 그런 올바른 성인가의 투명한 토론이 왕성한 사회가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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