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다는 것

처음 만난 사람과 제법 먼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인연은 시작된다.

by 말글손

앞에서 써 내려가던 이야기이지만, 어디까지 적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그냥 새롭게 쓴다고 생각하고.


고등학교에 올라와 처음으로 미팅을 나갔다. 합천에서 온 친구가 주선한 미팅이었고, 우리는 당시 유명한 마산 창동 코아 양과에서 첫 대면을 했다. 아무리 까불로 나 자신을 바꿀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먹었지만, 촌놈의 기운이 어디 가지는 않았나 보다. 어쨌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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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미팅은 결코 원하지 않았던 당시의 낭만이라는 빵집에서 시작되었다. 나와 같은 나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자 넷, 여자 넷이 만나서 별 시답지 않은 수다 몇 마디가 끝나고, 나는 폼나게 빵을 사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다. 촌놈 주머니에 얼마나 들었다고? 하긴 그 당시에는 공부를 억수로 잘했으니, 형님이 용돈을 조금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빵 몇 개를 들고 앉아 우리는 멍하니 그저 시간을 죽이며 있었다.

친구가 먼저 정적을 들어냈다. 파트너를 정해야 한다면서. 파트너를 정한 방식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기억이란 참 편리하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있으니. 이래서 무슨 글을 쓴다는 말인지. 쩝. 아직 내가 산 빵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여자들 앞에서 뭔가를 먹는다는 것이 참 넘사스러웠나보다. 배가 고팠다. 아까웠다. 촌놈이 그 유명한 코아양과에서 산 맛있는 빵을 먹어 볼 기회를 그렇게 놓치다니. 참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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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가 정해지고 각자의 길을 가자고 했다. 남겨진 빵을 뒤로 하고, 빵집을 나왔다. 집으로 오고 싶었다. 미팅 시간은 1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깔끔했다.

-집이 어디고? 몇 번 타면 집에 가노?

-왜? 벌써 가고 싶나?

-뭐, 애들하고도 헤어지고, 별로 할 것도 없고.

그 흔한 영화보러 가잔 말도, 이런 저런 다른 놀이를 할 것도 없었다. 난 촌놈이기에 그 동네에서 아는 게 없었고, 낯설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나마 내가 아는 반송아파트 인근으로 가고 싶었다.

-너거 집이 오데고?

-너거 집은 어딘데?

-내는 반송아파트서 자취한다.

-내는 반지동이다.

-어? 가깝네. 그라모 같은 거 타고 가모 되것다.

-걸어가자.

-걸어가야지. 버스타는 데 조 위에 있으깨나.

-아니, 집까지.

순간 둔기에 머리를 맞고, 얼음물이 끼얹히는 느낌이었다. 온 몸은 닭살이 돋았다. 거리가 얼만데. 창동에서 반지동, 반림동까지는 거리를 잘 몰랐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30분은 족히 넘는 시간을 달려야 한다. 기겁했다.

그런데 나는 왜 쓸데없는 말을 했을까?

-그래. 걸어가자.

-응.

그리고 코아 양과에서 시작된 우리의 발걸음은 아무 말없이 시작되었고, 아무 말없이 이어졌다.

창동에서 합성동까지 오면서 나눈 말이라곤 서너 마디의 인사말이 전부였던 것 같다. 그냥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내가 조금 심심해졌다.

합성동을 지나, 창원대로 입구의 고가다리를 넘을 때 즈음에 다리가 아파왔다.

-다리 안 아프나?

-괜찮은데.

-생각보다 잘 걷네. 내는 촌에서 살아도 다리가 아푸거마는

-나도 잘 걷는다.

흘끗 웃는 그녀를 보니 나 역시 그냥 기분이 좋았다. 사람이란 참 신기한게 별거 아닌 곳에서 정이 느껴지는 동물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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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대로 입구 고가도를 지나, 창원역을 지나 소답동을 지났다. 별로 할 말도 없었다. 아니 뭐라고 말해야 할 지도 몰랐다. 그냥 길을 걸었다. 빵집에서 4시쯤에 나왔는데, 오월의 하늘은 벌써 어둠에 밀리고 있었다.

도계동으로 오니, 해는 산 너머 가버렸다. 도로는 자동차의 전조등과 붉은 후미등으로 빛났고, 휑하니 지나는 바퀴의 마찰음만을 남겼다.

-다리 안 아푸나?

-괜찮은데.

-거짓말 같은데. 내는 아푼데, 안 아푸다꼬?

-사실은 아까부터 아팠다.

-참 갑갑하네. 그라모 버스타고 가자.

-아이다. 괜찮다. 걸어가자.

-아, 참.

뭐라고 말할 제간이 없었다. 지금 같으면 손을 잡아서라도 버스에 올랐을 것을, 당시에는 뭐,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조금만 쉬었다 가자.

-버스타고 가자니까. 쉴 데도 없다.

소답동에서 도계동을 지나는 길은 망망대로, 가로수만이 행인의 친구가 될 뿐이었다. 갑자기 난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조카 녀석들을 하도 업고 키워서 그런지. 참.

-업어주까?

-니 다리 아푸다면서

-괜찮다. 업어주까?

-그러면 좋지.

-업히라.

나는 쪼그리고 앉아 그녀가 등에 기대길 기다렸다. 한참이나 아무런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아마, 그녀도 조그마한 나를 믿기 어려웠나 보다.

-업히라. 괜찮다

그녀를 업고 도계동에서 반지동까지 걸었다. 손은 빠지고 땀은 흘렀지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명곡로타리를 지나 반지동에 도착하고서야 난 그녀를 조용히 내려주었다.

-잘가라. 내 간다.

-응,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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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며칠 뒤, 아파트 우편함에 꽂힌 편지 한 통과 카세트 테이프 하나. 우표가 없는 편지.

그리고 신승훈의 1집 테이프. 난 편지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