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시절의 서랍을 열면 무엇이 쏟아져 나올지 알 수 없다
고3으로 올라가던 겨울이 생각난다. 그때도 이렇게 추웠고 우리 가족은 여전히 단칸방에 살았다. 구월동 모래내 시장 근처 빌라촌에 있는 모퉁이집이었는데 현관문을 열면 작은 거실 겸 부엌이 있고 화장실과 방 한 칸이 딸려 있는 집이었다. 길모퉁이로 튀어나온 현관문은 울타리나 담벼락, 대문 같은 이중 보호장치 없이 드러나 있어 문을 열 때마다 집안이 다 들여다 보일까 위축되고 부끄러웠다. 다 큰 고등학생 딸들을 그런 집에서 키우는 엄마의 걱정도 컸을 것이다.
1996년 말에는 HOT의 캔디가 대유행을 했고 시장통에서는 알록달록한 벙어리장갑과 모자, 목도리를 팔았다. 문방구에서 팔던 사진과 엽서들도 생각난다. 강타의 팬이었던 동생은 비디오테이프로 녹화해 둔 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을 주말 내내 틀어놓고 지냈다. 물론 그 끔찍한 원색의 털장갑과 목도리도 사서 열심히 하고 다녔다.
엄마는 시장에서 팥도나쓰, 찹쌀도나쓰, 꽈배기 같은 걸 만들어 팔았다. 나는 학교가 일찍 끝나는 토요일엔 시장으로 가서 엄마 옆에 앉아 있곤 했다. 너무 추운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시장통에서 캔디가 흘러나오면 추위에 발을 종종대면서도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보통은 여기까지만 기억하고는 나를 꽤 괜찮은 딸이었다고 생각하고 지낸다. 그러나 한 번쯤 작정하고 기억을 더듬어 들어가다 보면 진실이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우리가 한창 자라던 시기에 엄마는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하고 하루에 10시간씩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한파에 시장 노점에서 떨었지만 늘 돈이 부족했다. 고등학생 두 딸은 돈 먹는 하마 같았다. 우린 매일 용돈을 받았지만 그것으로 사춘기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갖고 싶은 것을 사기엔 한참 모자랐다. 남들 하는 건 다 하고 싶었던 나는 사치스럽게도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었고, 주중에 용돈을 모아 주말에 데이트를 했다. 영화 보고 밥 먹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정도에 불과해도 연애에는 돈이 많이 들었다. 동생은 주말마다 친구들과 노느라 바쁜 데다 캔디 목도리와 벙어리장갑도 사야 했다. 문제집 값이며 보충수업비를 원래보다 불려서 말하고 2천 원 혹은 3천 원, 때로는 배포 크게도 만 원씩을 ‘삥땅’ 쳤다. 엄마가 고생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착하게 살려면 거지처럼 살아야 하니까.
미안함을 떨치기 위해 겨울 방학이나 토요일 오후에 엄마가 장사하는 자리 옆에 잠시라도 앉아 말동무가 되어 주거나 잔일을 도왔다. 누가 볼까 부끄러웠지만 엄마에게 다정한 딸 노릇하는 것도 중요했다. 월세방에 살며 이사를 하도 많이 다니다 보니 동네가 낯설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게 다행이었고, 학교도 꽤 먼 곳에 떨어져 있었다.
엄마는 도나쓰와 꽈배기를 만들어 판 돈의 일부를 떼어 시장 상인들이 모인 계에 들어갔다. 2년 동안 부은 곗돈 200만 원, 당시 월세 보증금이랑 비슷했던 그 큰돈을 내 첫 대학등록금과 입학금으로 썼다. 내가 지금까지 엄마에게 받아본 유일한 거금이고, 엄마 인생에서도 한목에 써 본 최초의 거금이었을 것이다.
다음 해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동생이 고3이었을 때는 송림동에 살았다. 지금은 커다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는 송림동은 그때 막 재개발에 들어가려 하고 있는 낡은 동네였다. 엄마는 호두과자와 땅콩과자로 종목을 바꿔 대형학원 앞에서 노점상을 했다. 엄마는 집에서 커다란 다라이에 이스트와 마가린을 녹여 직접 반죽을 했고, 공장 반죽과는 비교가 안 되는 맛과 식감을 가진 인천식 명물호두과자를 만들어 팔았다. 날씨가 추우면 호두과자가 더 잘 팔리지만 그런다고 지나치게 추우면 사람들은 앞만 보고 종종 걸어가 버린다. 엄마는 발난로 하나에 의지하고 호두과자 기계의 열기에 손을 데우며 손님이 오길 기다렸다.
엄마는 아무리 호두과자를 많이 팔아도 동생의 등록금을 도저히 마련할 수 없었는데, 딸 하나의 1회분 등록금을 위해 2년을 쥐어짜야 하지만 나와 연년생인 동생은 내가 대학에 가고 불과 1년 만에 대학 합격증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학원 보내달란 말을 하지 않고 학교에서 12시까지 야자하고 보충수업 듣는 것으로 적당히 대학을 간 나와 달리 공부를 꽤 잘했던 동생은 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기 때문에 엄마가 모을 수 있는 돈은 더 줄었다.
동생은 대학 합격증을 받고도 돈이 없어 등록을 못 했다. 돈이 없어 대학 못 간 사람이 드라마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등록 마감일 오전까지도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에만 매달리던 부모를 나는 혐오했다. 엄마 아빠는 가난해서 이미 형제들에게 버림받고 신용도 바닥이었기에 어디서 돈을 빌릴 데도 없었다. 나는 동생이 등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공기, 분위기, 그 참담했던 마지막 순간을 일분일초 기억한다. 등록 마감 시간인 오후 5시에 우리는 며칠 동안 발로 뛰고도 눈앞에서 최종 부도를 맞은 중소기업 사장님처럼 망연자실했다.
기도 끝에 대학을 못 간 건 동생인데 종교는 내가 등졌다. 동생은 아직도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그때 대학을 못 가서 재수를 한 것도 다 하나님 뜻이었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화법을 아직도 증오한다. 나만 빼고 우리 가족은 기억조작에 성공했다. 나만 빼고 우리 가족은 아직도 하나님을 믿으며 매주 교회에 간다.
어디 이 일뿐이겠나. 우리 가족은 언제나 기도를 했고 그 기도는 제대로 들어맞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집에 쌀이 똑 떨어졌을 때도 기도를 했고 아빠가 급히 수술했는데 병원비가 없을 때도 기도를 했고 동생의 신장에 작은 돌이 굴러다닌다는 사실을 알고도 병원에 가는 게 아니라 기도를 했다. 모든 일은 어떻게든 지나가게 마련이기에 우린 굶어 죽지도 아파 죽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의 가호로 살아났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동생은 병원을 안 가고 신장 결석을 소변과 함께 배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을 텐데도 그게 하나님이 도우신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결석이 계속 자라서 고통을 줄 수 있는데도 그러지 않았으니까, 무서운 수술을 하지 않고도 결석을 빼냈으니까, 돈이 들지 않았으니까... 하나님의 뜻이고 사랑이었다.
내가 보기에 신은 무능했고 기도는 시간낭비였다. 그 시간에 놀이터나 운동장 주변을 맴돌며 떨어진 동전이 없나 찾는 게 훨씬 빨랐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가족은 매번 지치지도 않고 모두가 기억조작과 정신승리를 통해 신앙을 지켜냈다. 교회에서는 그걸 믿음이라고 부른다. 나는 사춘기 이후에 몇 번의 과장된 연극에 참여한 이후로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았고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아랍 출신의 무능한 남신을 영원히 떠나보냈다.
신을 버린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나락으로 떨어졌고 인생에 기쁨이 없었다. 엄마의 땀과 눈물로 대학에 간 나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면서 불효를 했다. 아빠는 다 큰 딸에게 차마 손대지 못했지만, 엄마에게는 등짝을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나는 술에 취해 수없이 등짝을 맞았고 나중에는 맞기 싫어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아지자 엄마 아빠는 내가 교회 안 가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일요일 아침에 집에 누워있으면 술냄새를 풍기면서라도 교회에 나가야 하지만, 집에 없는 애를 예배당에 앉히는 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딸이 대학에 들어가자 술꾼이 되어버렸다며 울었지만, 사실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신을 버린 대가로 아노미를 맞은 것이었다. 나는 나를 혐오했고, 핏줄을 혐오했다. 인생에서 의미를 찾고 새롭게 삶의 질서가 잡히기 전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10년은 넘게 걸렸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다시 똑같은 환경에 처한다면 내게 다른 방법이 있을까 싶다. 더 잘 버틸 방법이 있을까. 가난해도 올바르게 살고, 심지 강하고, 명랑하며, 자존감이 높은 사람도 있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았기에 그건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가난은 사람을 초라하게 하고 부끄럽게 하고 불성실하게 만든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너무 슬프고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성하고 싶진 않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나쓰와 꽈배기를 튀기던 엄마에게 거짓말하고 문제집 값을 삥땅 쳤던 그 시절, 시장통에서 흘러나오던 HOT의 캔디를 요즘에 NCT드림이 다시 불렀다. 열 살 난 딸과 함께 세련되게 편곡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 시절의 나와 동생, 그리고 우리 가족을 떠올렸다. 지나온 삶이 끔찍하다 여기면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획할 수 없기에 사람은 본능적으로 기억을 조작하고 과거를 미화한다. 아무리 어려웠던 시절이라도 그때 유행하던 음악을 들으면 아름다운 것들만 떠오른다. 나도 깜빡 속을 뻔했다. 그때 내 나이 열여덟 혹은 열아홉. 참 좋았었지… 할 뻔했다.
사실 나는 그때 좋지 않았다. 끔찍했다. 나는 나와 가족을 싫어했고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는 10대 청소년이었다. 거짓말을 태연하게 하고 가끔 자잘한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마음은 죄책감과 반항심으로 얼룩졌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신을 등졌고 저질 대중문화에 열광했고 술을 마셔댔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서 술에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 시기가 지나갔다는 사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 감사하다. 한 번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추억이란 거, 개나 주라지.
“사실은 오늘 너와의 만남을 정리하고 싶어, 널 만날 거야. 이런 날 이해해~“
그 시절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과거를 미화해서가 아니라 오늘에 감사해서라는 것을 안다. 오늘이 어떤 모습이든 나는 감사한다. 가끔은 스스로를 지옥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라고 상상한다. 지상에서는 나빠봤자 그때보다 나쁠 순 없기에 두려울 게 없다. 믿는 건 통장 잔고가 아니라 주어진 삶을 한 땀 한 땀, 모든 순간을 겪으며 성장해 온 나 자신이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는 임종 노인을 돌보는 가정부에서부터 파출부, 식당 직원, 시장 상인, 노점상 일을 가리지 않고 늘 힘들게 돈을 벌었지만 그중에서 엄마 인생에 가장 힘든 때가 저 모래내 시장과 송림동에서의 시절이었다고 한다. 고등학생 두 딸을 키우고 대학에 보낼 걱정으로 엄마는 아무리 추워도 장사를 접을 수 없었다. 이제는 제법 여유롭게 사는 나는 엄마랑 가끔 추억에 잠겨 호두과자나 꽈배기를 사 먹을 때가 있다. 예전에 엄마가 만들었던 맛이 나질 않는다고, 엄마가 만든 게 역시 최고였다고 말하면 엄마는 그 옛날 반죽에 담긴 자기만의 비법에 관해 이야기하며 자랑스러워한다. 정말로 그때처럼 맛있는 찹쌀도나쓰와 호두과자는 지금껏 다시 먹어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