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6년 전, 오랜 친구가 이탈리아에 왔습니다.
지난 몇 년 힘들어하던 친구를 몇 번이나 이탈리아로 초대했습니다.
그리 말해 주어 고맙다고만 말하며 떠나 올 줄은 모르던 친구가 마음을 먹어주었습니다.
한 달 이란 시간, 이탈리아의 3월……봄이 다가오는 계절을 담고 갔습니다.
오기만 하라고 편하게 쉬다 가라 했지만……
친구가 잠이 들기 전,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물었습니다.
“내일의 계획은 뭐야?”
“오늘은 뭐할 거야?”
하루는 친구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그냥 뭘 할지……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면 안 되는 거야?
직업이 가이드다 보니 이탈리아에 볼 것도 느낄 것도 많다며 나도 모르게 친구를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배우고 경험하는 것도 여행의 한 모습이지만…
온전히 그 하루를 느껴보는 것도 여행의 방법임을 잊고 있었습니다.
오랜 친구와 길을 떠납니다. 그저 바라보고 걸어보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 보려 합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피사에서 태어난 안드레아 보첼리의 [time to say goodbye]
그는 노래합니다.
Time to say goodbye
안녕이라 말해야 할 시간
Paesi che non ho mai
내가 한번 보았고
Veduto e vissuto con te
당신과 함께 살았던 나라
Adesso si li vivro
지금부터 나는 거기서 살렵니다
Con te partiro “
당신과 함께 떠나렵니다
오늘의 이 여정이 친구의 고민, 힘듦, 불안에 안녕이라 말하는 시간이 되기를…
이른 아침 차에 올라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아직 토스카나의 평야는 펼쳐지지도 않았는데
친구는 고속도로 창 밖의 풍경만으로도 카메라에서 손을 떼지 못합니다.
잠시 휴게소에 들러 마시는 에스프레소 한잔,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는 어딜 가나 맛있다지만……
아침 일찍 떠난 여행길에 휴게소에서 마시는 에스프레소 맛은 언제나 최고입니다.
동료 가이드가 이탈리아에서 처음 맛보는 에스프레소의 쓰디쓴 맛에 깜짝 놀라자 곁에 있던 한 신사분이 그랬답니다.
인생은 쓴 거야..
에스프레소를 마신다는 건 인생을 마신다는 거야.
이 말이 멋져 항상 쓰디쓰게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나에게 이탈리아 친구가 설탕을 넣어주며 말합니다.
la dolce vita.
(인생은 달콤한 거야)
이후부터는 언제나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듬뿍 넣습니다.
달콤한 하루가 펼쳐지기를 기도하는 주문입니다.
조금 더 달리자 차는 고속도로를 지나 국도로 접어듭니다.
바퀴 아래로 타닥타닥 자갈이 밟히는 소리가 들리고…
도로 양 옆의 평야는 더욱 짙어지고…
그와 함께 하늘은 더욱 푸른빛을 띱니다.
봄의 이탈리아를 사랑합니다.
봄의 이탈리아 하늘에는 사람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구름이 펼쳐지고
머리 칼 사이로 내가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만드는 바람이 불어옵니다.
차가 멈춘 곳은 토스카나 주의 시에나(Siena) 시에 속해있는 발 도르챠(Val d'Orcia) 지역의 전망대입니다.
멀리 굽이치는 길 옆으로 사이프러스 나무가 펼쳐집니다.
토스카나의 풍경은 신기합니다.
토스카나의 자연은 어찌 신이 이런 자연을 만들어 놓았나 감탄하게 되는 자극적인 풍경도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원시의 풍경도 아닙니다.
그저 끝도 없이 굽이 치는 평야…
드믄드믄 펼쳐지는 올리브 나무와 포도밭,
그리고 줄지어 서있는 사이프러스 나무
어쩌다 하나씩 보이는 농가… 이것이 다입니다.
그럼에도 이 곳의 풍경이 주는 감동은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토스카나 대지의 품 안에서 자연과 인간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이 땅이 내어주는 딱 그만큼, 그 이상에는 욕심을 내지 않고 그 안에 충분히 만족하며…
대지가 쉴 때면 이탈리아 사람들도 함께 멈추고
포도와 올리브가 열리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토스카나의 태양과 땅과 함께 키워나갑니다.
모든 것에 너무 애쓰지 말라고 잠시 멈추어 서면 남은 것은 자연의 몫이라고 말해주는 것같습니다.
길은 이제 국도를 벗어나 하얀 먼지가 앞을 가리는 시골길로 접어듧니다.
그리고 창 밖으로 펼쳐진 집 한 채…
아버지가 셀 수 도 없을 만큼 없을 만큼 돌려 보셨던 그 영화, 글래디에이터,
가족 다 함께 앉아 보았던 주말의 명화 시간이면
시작과 동시에 녹화 버튼을 누르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바싹 다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녹화 한 비디오테이프는 매번 다른 영화 들로 다시 덮여 녹화되었지만
글래디에이터만큼은 아직도 텔레비전 아래 선반에 꽂혀있습니다.
주인공 막시무스의 집을 바라봅니다.
20대의 여행과 30대의 여행의 가장 큰 차이는 체력임을 무시할 수 없으나,
하나 더 더하자면 20대의 여행은 저의 즐거움으로만 가득 찼다면 30대의 여행은 언제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fattoria dei barbi] 바르비 와이너리에 도착했습니다.
피에몬테(Piemonte) 지방의 바롤로(Barolo), 바르바레스코(Barbaresco)와 함께 이탈리아 3대 와인 ,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
100% 몬탈치노(Montalcino) 지역에서 재배된 100% 산죠베제(San Giovese)라는 포도 품종으로 만드는 와인으로
최소 2년 숙성 후 다시 병에서 4개월 숙성시키고 포도 수확 5년 차 1월에 출시하도록 엄격하게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몬탈치노뿐 아니라 토스카나의 대부분의 중세도시들은 산꼭대기에 위치한 완벽한 요새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시대 이전에투르리안의 역사로 인해 도시의 아래엔 그들의 유적들이 잠자고 있습니다.
이 지하에서 잠자고 있던 유적들은 로마 시내 로마인들의 와인 저장고로 다시 깨어납니다.
미로 같은 지하로 내려서면, 한기와 함께 텁텁한 오크 통의 향과 끈적한 포도 내음은 그만으로도 얼큰하게 취할 것만 같습니다.
지하 저장고의 마지막에 연도 별로 와인을 보관하고 있는 방이 있습니다.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와인 병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모습만으로 이 곳의 시간을 말해줍니다.
딸이 태어난 해, 그 딸의 결혼식을 위해 저장해둔 와인 병들을 보고 있자니……
이들의 삶의 가장 큰 목적은 가족이구나 싶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을 자주 잊곤 하는 건 아닌지...
한국에서 와인을 마실 때면 종종
'와인이 가볍다, 묵직하다'라는 용어를 쓰게 되는데요.
이탈리아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도 와인을 마실 때 이렇게 표현하는지..
좋은 와인을 말할 땐 무어라 말하는지..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주 좋을 땐 'vino importante'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importante'는 영어의 'important'와 같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great'의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길..
우리가 와인이 무겁다고 말할 때는
함께 식사하며 마시기엔 너무 진하다 라는 뜻이야.
좋은 와인은 다 함께 이야기하며 함께 마시기 편한 와인 아냐?
와인 저장고에서 나와 와인 시음을 해봅니다.
와인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좋은 사람들 오래된 친구 멋진 풍경과 함께 와인을 마시니 모두가 좋은 와인입니다.
이 순간 와인은 우리의 여행에 가장 중요한 흥을 더해주는 존재가 되어 줍니다.
와이너리에서 몇 걸음밖에 포도밭이 있습니다.
포도밭에 서서 흙을 만져보고 놀랐습니다.
예상과 달리 척박한 땅, 하얗게 말라버린 물기가 하나도 없이 바스러지는 흙. 수많은 자갈들..
이탈리아의 여름은 완벽한 건기입니다.
물론 겨울 많은 장맛비가 오지만 앞으로 몇 개월 비가 없이 강렬한 태양이 지속될 것입니다.
물기가 없고 자갈이 많은 땅에서 자란 이곳의 포도들은 유난히 더 포도 알이 작습니다.
작지만 이렇게 자란 포도들은 알차고 자갈의 미네랄들로 더욱 맛이 깊어집니다.
이 포도들은 부드러움 속에 풍부하고 깊은 향과 맛을 담은 와인이 됩니다.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자 입안 가득 와인이 퍼지며
네가 강인해지고 깊어지고 그 속에 부드러움까지 갖추기 위해선
자갈밭과 강렬한 태양과 목마름을 견뎌야 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텁텁하게 혀 안에 감기던 와인이
'너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일은 결국 너의 생을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 줄 거야' 속삭이며
목구멍 뒤로 부드럽게 넘어갑니다.
거친 듯 부드러운 감동, 이 맛에 와인을 마시나 봅니다.
평야를 지나 언덕 위로 오르자 중세 도시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해발 500미터 이상의 고지에 그림처럼 솟아있는 몬탈치노,
시에나와 피렌체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작은 도시 몬탈치노는
그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마을 전체가 일종의 요새화 되어 산꼭대기에 지어졌습니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한창 번성했을 때
마을 전체를 둘러쳤던 성벽과 망루들이 지금도 남아있는 이곳에서 5000여 명의 사람들이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당한 취기와 투박하지만 든든해 보이는 벽에 기대어 잠시 쉬어 봅니다.
로마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돌아오는 길, 차창 너머로 노을이 집니다.
[canto della terra] (대지의 찬가)에서 안드레아 보첼리는 노래합니다.
우리는 창 밖 세상을 바라보며
하늘의 소리를 듣습니다.
모든 것이 깨어나고 밤은 저 멀리로 물러났습니다.
이미 저 멀리
이 세상을 보세요
우리와 함께 하는 세상을
어둠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 세상을 보세요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상을
우리에게 희망인, 태양을..”
12세에 사고로 시력을 잃은 안드레아 보첼리,
그가 부르는 이 노래를 듣고 있자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토스카나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아마도 그건 12살 소년의 기억 속 풍경을 노래하기 때문이겠죠.
다시 보지 못할 추억의 풍경처럼 그의 노래에는 어쩐지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노을로 물들어가는 친구의 어깨를 바라보면 다시 함께 서서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6년이 지났습니다.
우리의 30대는 수많은 일들이 펼쳐지고 지나가고 발을 붙잡기도 했습니다.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둘째가 말을 시작할 즈음 친구는 결혼을 했습니다.
나와 같이 타지에서의 결혼 생활을 시작한 친구에게 '마음 굳게 먹어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말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신 소식이 들리고 6월이면 한국에서 출산을 할 거라는 이야기에 나도 그때 한국에 들어가 네 곁을 지키겠다 약속했습니다.
코로나가 터지고 2월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친구는 울음이 터졌습니다.
"내 엄마 됐다."
아이는 조금 이르게 세상에 나왔지만 건강하다고 울면서 친구가 말을 잇습니다.
"근데 내가..... 니 생일에 애를 낳았다. 니랑 생일이 똑같데이. 내가 눈을 떴는데 네 생각이 젤 먼저 나는 거라. 아흑, 니 애 둘을 어째 거서 낳았노."
나처럼 말도 잘 안 통하는 타지의 병실에 누워있을 친구 생각에 눈물이 나고,
우리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울음이 터졌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나와 생일이 똑같은 아이의 손을 잡은 친구와 다시 토스카나의 노을을 바라볼 수 있다고
분명 그럴 거라고 저 멀리 세상을 보자고 삶은 달콤하다고 그랬다고 비록 지금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것은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뿐이지만 분명히 그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연신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만 되풀이합니다.
written by iand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