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답니다” - 이 말의 서늘한 실체.
영화 <바베트의 만찬>은 동화처럼 행복하고 따뜻합니다. 바베트가 전재산을 털어 보은의 만찬을 준비했고, 와인이 뭔지 모를 정도로 종교적 엄숙주의에 갇혀 살던 사람들이 그녀의 음식을 통해 세속의 맛을 누리며 즐거워합니다. 이어 반목하던 사람들이 화합하게 되죠. 그들이 서로 손을 잡고 서있던 마법 같은 순간이 관객들의 마음을 절로 훈훈해지게 만드는 겁니다.
바베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자매와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과 마을에 열심히 봉사하며 살았고, 1만 프랑이나 되는 복권 당첨금을 모두 태워 만찬을 준비했지요. 초대된 손님들은 행복에 들떴고, 관객들은 그들에게 동화됩니다. <바베트의 만찬>이 은혜 갚음이나 음식을 통한 화합에 관한 영화로 자리매김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요. 그렇지만 영화에서 바베트는 뜬금없는 말을 합니다. 맥락 없고, 의중을 헤아리기 쉽지 않은 대사를요.
걱정하는 자매에게 그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빈털터리가 됐는데, 자신은 진정한 예술가라 가난하지 않다고 한 겁니다. 파리 최고 레스토랑의 셰프였던 그녀의 예술(요리)은 귀한 식자재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었으니, 그녀의 커리어는 이제 끝났는데 말이에요. 내일부터 맹물 같은 죽을 끓이는 일상으로 돌아갈 텐데, 가난하지 않은 예술가를 운운합니다. 심지어 그녀는 만찬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고도 말합니다. 오트 쿠진(최고급 프랑스 요리)을 화려하게 차려내느라, 본인은 정작 일더미 쌓인 부엌에서 와인 한잔으로 피로를 달래 놓고 말입니다.
소설에서는 바베트의 과거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그녀는 고급 레스토랑의 스타 셰프이자, 파리 코뮌의 일원이었습니다. 노동자 계급이 세운 정부였던 파리 코뮌은 정부군에게 탄압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바베트는 가족을 잃게 됩니다. “쥐처럼 죽었다.”라고 표현한 걸 보건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녀 또한 이런 죽음을 맞을 위기였죠. 그렇지만 다행히 북유럽(영화에선 확실한 지명이 안 나오지만, 책에서는 노르웨이) 어촌 마을로 몸을 피하게 됩니다. 바베트는 화려한 삶을 뒤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게 되죠. 그러다 복권에 당첨되어 거금을 손에 쥐게 되는데, 그녀의 선택이 황당합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한 한 끼 식사에 그 돈을 모두 써버리기로 한 겁니다.
바베트는 파리 최고급 레스토랑 <앙글레>에서 이름을 날리던 셰프였습니다. 그녀의 만찬에 복권 당첨금이 전부 필요했던 건, <앙글레>의 사치스러운 메뉴를 재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파리 코뮌 소속의 혁명 전사였던 그녀의 재능이 지배 계급의 전유물이었다니….. 참 아이러니컬하네요.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신념과 예술(요리) 사이에서 자아분열을 겪었는 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의 음식을 먹던 귀족들에게 몰살됐으니, 그녀에게 있어서 조국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지옥의 땅이 돼버렸을 겁니다. 반면, 도망쳐 온 북유럽은 어땠을까요? 척박하긴 해도 죽음이 없는 평온한 곳이 아니었을까요?
그녀는 결심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술혼을 불태워 보기로! 그래서 만찬을 통해 자신을 증명해 보이죠. 만찬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은 바베트의 솔직한 대답이었고, 그 자리는 바베트의 은퇴 공연장이었던 겁니다. 책에서(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녀는 “저는 위대한 예술가예요!”라는 말을 합니다. 그것도 강조해서 두 번이나 합니다. 그리고 이어, 이런 말도 하죠.
사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은인들과 돈을 나누거나, 그들에게 필요한 뭔가를 줬을 겁니다. 그러나 바베트는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선물을 주었고, 자신의 언어인 요리로 마음을 알렸습니다. 그렇지만 손님들의 식성을 고려하지 않았고, 맛있었냐는 말도 묻지 않았죠. 그녀의 작품인 음식에만 집중했던 겁니다.
영화 <누드모델>에서는 거장 화가가 10년째 미완의 작품을 붙들고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다 자신의 뮤즈를 만나 작품을 완성하고, 그는 작품을 벽 속에 넣고 봉인해 버립니다. 화가는 고생스럽게 완성한 자신의 마스터피스가 사람들의 입방에 오르내리는 게 싫었거든요. 여인의 벗은 몸을 그린 것이니 사람들의 저급한 시선을 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거죠. 그래서 대중의 평가를 거부하고자 벽에 가둬버립니다. 바베트가 크나큰 거금을 식탁에서 날려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 바베트의 경우가 더 지독하다고 봐야겠네요. 그녀에겐 남은 게 없잖아요. 작품이 사람들의 위장 속에서 사라질 걸 알면서도, 그녀는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자신을 태워버렸네요. 마지막 작업은 기억 속에서만 남겨두고요. 바베트의 말대로, 예술가들에겐 우리들이 알 수 없는 것이 있는 게 분명한가 봅니다.
바베트는 풍요롭고 행복한 모습으로 만찬의 뒷정리를 합니다. 전 재산과 노후를 가차 없이 제물로 바쳐 무대를 완성했고 충만한 상태가 됐으니까요. 내일 다시 하녀로 돌아가 가난한 일상을 살게 됐음에도, 그녀는 말하잖아요. 자신은 가난하지 않다고요. 스스로를 다 태워버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를 경험했기에 일말의 후회도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자신만을 위한 만찬을 차렸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바베트는 무려 14년을 한결 같이 헌신했거든요. 그녀는 하녀로서 최선을 다해 일했고, 죽을 끓여 마을의 병자들 또한 돌봤습니다. 그래서 바베트가 차려낸 만찬은 은인들을 위한 감사와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려는 자아가 한꺼번에 녹아든 자리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를 단지 ‘친절한 하녀’라는 작은 틀에 가두기엔 그 재능이 너무 크고, 예술을 향한 선택이 비장하잖아요. 그렇지만, 영화에서 그려낸 바베트의 모습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더군요. ‘진정한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다’ 거나, ‘만찬이 본인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들이 나오긴 했지만, 예쁜 동화 같은 영화와 어울리지 않고 따로 겉도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저는 이제 바베트를 “은혜 갚은 여인”에서 광기 어린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으려 합니다. 그녀에겐 평범한 사람들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으니까요. 그녀의 만찬은, 예술가로서 마지막 무대에 서고 싶었던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촌 마을의 사람들에게 <앙글레>의 메뉴를 차려 줌으로써, ‘귀족을 위해 요리한 혁명가’라는 자신의 모순을 봉합한 것입니다. 안락한 노후를 보낼 돈을 희생해서라도 완성된 자신의 모습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죠.
바베트의 선의는 진짜였습니다. 그러나 그 선의가 예술가의 손을 통과하는 순간, 평범한 도덕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됩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다”는 말의 서늘한 실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