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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만다 Sep 21. 2023

퇴사하는 날

뜻밖의 경주 여행

"훠이훠이!" "저리 안 가?!" "가! 가! 저리로 가!"


곤히 자고 있는데 누군가 문 밖에서 외치는 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다. 후끈후끈한 장판 덕분에 그 위에 깔린 요까지 뜨거워, 따뜻하다 못해 더운 밤을 보낸 후였다.


"아후, 저놈의 고양이 새끼들"


어제 한 방에서 같이 잔 친구가 창호지문을 거칠게 닫으며 말했다. 자다 일어난 친구의 머리는 산발이었는데, 어째 그 모습이 조선시대 망나니 같기도 하고, 옥중 죄수같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가 예약한 이 감성 숙소라는 곳이 전통 한옥인데다가, 인테리어와 소품들 모두 과거를 연상케 해 마치 사극 세트장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가상의 세트장 속에서 고함을 쳐대는 친구의 헝크러진 머리가 그리 보이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친구는 낮은 천장과 바깥에서 들어온 차가운 공기 탓에 고개와 허리를 수그리고 몸은 잔뜩 움추린 채로 걸어와 이불 속 내 옆으로 쏙하고 들어왔다.


"새벽부터 고양이들이 울어대는 바람에 잠 다 깼어. 발정난 녀석들인가봐." 친구는 아침부터 고함을 질러댄 이유를 짧게 설명했다. 친구의 우렁찬 외침을 듣기 전 어렴풋이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었던 터라 친구의 설명 없이도 이유는 알고 있었다. 개와 고양이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동물을 무서워하는 친구가 고양이에 맞서 소리를 질러댔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고양이가 다시 울면 금방 튀어나갈 태세로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친구에게 나는 고생했다며 한숨 자라고 말하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어제 신혼집을 떠나 친구와 함께 경주에서 밤을 보냈다. 남편과 싸워 집을 나와 친구를 찾았다는 그런 뻔한 사연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에 오기 전 남편과 상의했고 남편은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친구와 좋은 시간을 보내라고 말해줬다. 그렇다. 나는 어제 퇴사를 했고 경주에 와있다.


어제 약 6년 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었다. 그 전 직장에서의 경력까지 합하면 8년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직장생활이었다. 회사에는 퇴사 사유로 건강 핑계를 대었지만 사실 재작년부터 나빠졌던 몸 상태는 작년 들어 나아지고 있었다. 건강 문제는 핑계일 뿐, 사실 나는 이 회사에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극도로 경쟁적인 분위기를 조장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 상사들과 비효율적인 조직 시스템에 질려버린 동료들은 이미 회사를 떠나버린 후였다. 제일 먼저 회사를 떠날 줄 알았던 나는 퇴사 선언도 제일 먼저 했지만, 어쩌다 보니 제일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배웅해주는 이도 없이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시원한 마음만 들 줄 알았던 퇴삿날, 이유 모를 헛헛한 감정이 들던 차에 친구가 한 갑작스런 여행 제안으로 경주를 오게 되었다. 집에 있었다면 남편과 와인을 한 잔 하면서 그동안 고생 많았다는 위로의 말과,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말을 전하며 뜻깊은 밤을 보냈겠지만, 이렇게 훌쩍 서울을 떠나 생각지도 않은 경주에 와 낯선 숙소에서 친구와 밤을 보내는 것도 꽤 괜찮은 것 같았다.


그렇게 떠나고 싶은 회사였으면서 헛헛한 마음은 도대체 왜 들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어제,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을 때, 힘든 시절 함께 보낸 동료들은 모두 떠나고 그곳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다른 회사로 이직한 동료, 오랜 꿈을 위해 공부를 시작한 동료, 몸이 아파 좀 쉬어야겠다는 동료까지, 각기 다른 사정이었지만 그렇게 하나 둘 회사를 떠났다. 배웅해주는 이 없이 사무실을 떠나는 것도, 퇴사하기 전 회사 로고 앞에서 다같이 사진을 찍는 우리만의 작은 전통을 이제는 할 수 없는 것도, 회사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혼자 먹는 것도 아무렇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사실을 속상했다. 6년간의 회사 생활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지난 한 달 내내 친했던 다른 팀 동료들과 식사와 커피를 하며 아쉬운 인사를 나누기도 했고, 어제 사무실이 텅 비어 있던 이유가 많은 사람들이 재택 근무 중이기 때문인 것을 알았지만, 나는 못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내게 특별 대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직원 모두가 나와 배웅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적어도 이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퇴사하는 날 먹은 회사에서의 마지막 점심


어쨌든 나는 지금 경주에 와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혼자 여행은 질색하는 녀석이 나홀로 여행을 계획하고 족히 8명은 잘 수 있을 것 같은 한옥 숙소를 예약하다니. 그 덕에 나도 경주에 오게 되었지만 말이다. 고양이 울음 소리와 친구의 고함 소리로 이른 아침을 맞이했지만 친구가 가고 싶다는 국립 경주 박물관에 가려면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나도 친구도 3시에는 각자 서울로, 전주로 돌아가야 해서 시간이 많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짐을 싸 후다닥 숙소를 나섰다.


경주는 중학교 수학여행을 시작으로 여러 번 방문했지만 박물관은 처음이었다. 평일이라 사람들이 많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많았다. 박물관 입구로 들어오면 넓게 펼쳐진 정원 한쪽에는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보던 선덕 대왕 신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신라의 1000년 수도답게 박물관 내부는 신라 유물이 크게 차지하고 있었지만 구석기 시대 유물부터 철기 시대 전까지의 유물도 많이 있었다. 어쩐지 반갑게 느껴지는 빗살무늬 토기와 신라시대 때 귀중히 여겨졌다는 옥과 유리, 신라인의 금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금관과 금귀걸이들도 볼 수 있었다. '신라의 미소'라 불리는 얼굴 무늬 수막새는 바라만 보는데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퇴사하고 박물관 오는 거 꽤 괜찮은데?' 하고 잠깐 생각도 들었다.


국립 경주 박물관의 선덕 대왕 신종
신라시대 때 귀중히 여겨졌다는 옥과 유리
'신라의 미소'라 불리는 얼굴 무늬 수막


오랜만에 집중한 탓인지 박물관 관람이 거의 끝나갈 때쯤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관람을 마무리하고 친구가 찾아봤다는,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베이글 가게로 향했다. 황리단길에 위치한 많은 카페들이 그러하듯 이 베이글 가게도 창으로 보이는 무덤 뷰가 멋진 곳이었다. 탁 트인 터에 자리한 각기 다른 크기의 무덤들은 얼핏 보면 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곧이어 무덤 너머로 보이는 높고 푸른 산을 발견하게 되면 '과연 산과는 다르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지만 결코 산보다 감흥이 덜하지 않다. 오히려 더하면 더했다고 할까? 오랜 세월 변하지 않고 그 장소를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산과 무덤은 동일하지만, 인간이 만들었다는 그 부분 때문에 더 경이롭게 느껴진다.


카페에서 바라본 무덤 뷰 풍경과 우리가 주문한 음식들


참깨 베이글로 만든 잠봉뵈르와 당근주스를 맛보곤 곧장 자리를 옮겨 역시 친구가 봐두었다는 근처 카페로 갔다. 고등학교 지리 교사인 친구는 동료 교사들과 틈틈이 여러 카페를 다니는 게 취미인데, 그 호기심이 경주에 와서도 발동했던 것 같다. 월정교 근처에 위치한 카페는 좀 전에 갔던 베이글 가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카페 외관과 내관 모두 온통 빨간 벽돌로 되어 있었는데, 빨간색 벽이 지붕의 검은 기와와 잘 어울렸다. 널찍한 실내는 마치 설치 미술로 가득한 미술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카페 구석의 한쪽 벽면은 통창으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이 앞에 앉아 나는 녹차라떼를, 친구는 카페의 시그니처 라떼를 마셨다.


빨간 벽돌과 검정 기와가 인상적이었던 카페


한참을 떠들다 2시쯤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주에 왔는데 <교리김밥>은 먹어야지 않겠는가 싶어 친구 차를 타고 역에서 꽤 먼 지점으로 넘어갔다. 남편이랑 먹으려고 3줄을 포장 주문했는데 주문이 많이 밀린 것인지, 주인 아주머니 손이 느리신건지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우리 김밥은 아직 차례가 오지 않았다. 나보다 시간 개념도 투철하고 걱정도 더 많은 친구는 혹시라도 기차 시간에 늦을까 발을 동동거리다가 완성된 김밥을 받아 들곤 단숨에 나를 기차역까지 바래다 주었다. 나는 그런 친구를 옆에 두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
"고 다독였는데, 친구는 “네가 기차 놓치면 나도 기다려야 하잖아!”라며 툴툴거렸다. 나보다 더 걱정하며 달려준 친구 덕분에 기차역에는 기차 출발 시간 약 10분 전쯤에 도착했다.


혼자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마음이 어쩐지 차분했다. 퇴사하는 날 일상을 떠난 것, 계획하지 않았지만 퍽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나는, 경주를 내려올 때와는 다른 사람이다. 소속된 곳도 없고 돈을 벌지도 않는 정말 백수가 되는 것이다. 기분 좋은 설렘과 함께 이유 모를 은근한 두려움도 함께 몰려왔다.


교리김밥 3줄, 열차 안에서 한 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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