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적인 권력 투쟁을 세련된 시스템 공학으로 제압하는 법
감사팀이 떴다.
오후 2시, 사무실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습니다.
파란색 랜야드를 멘 감사팀 직원 3명이
박 팀장의 부서로 걸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등장은 예고된 재앙이었습니다.
'가짜노동 폐기 프로젝트'로 김 대리의 팀이 승승장구하자,
위기감을 느낀 김 부장이 '표적 감사'라는 덫을 놓은 것입니다.
"박 팀장, 김 대리. 잠깐 회의실로 오시죠."
회의실 문이 닫히자마자 감사팀장은
두꺼운 서류 뭉치를 테이블 위에 던졌습니다.
퍽- 하는 소리가 정적을 깼습니다.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귀 부서가 최근 업무 효율화를 핑계로
내부 통제 규정을 무시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특히 AI 툴 구독료 지출과 외주 용역 계약 건,
이거 규정 위반 소지가 다분합니다."
유리창 너머로 김 부장이 팔짱을 낀 채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는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김 대리가 당황해서 변명하거나(복종),
억울하다며 화를 내는(투쟁)
'사바나의 원시인' 같은 반응을 보이기를.
그래야 자신의 서열을 증명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김 대리의 반응은 그의 예상 시나리오에 없던 것이었습니다.
김 대리는 당황한 기색 없이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그의 손끝은 떨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순간을 위해 '방어 논리'를 미리 준비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팀장님, 우려하시는 포인트가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제보자는 아마 'AI 구독료'가 일반 소프트웨어 구매 규정에 없다는 점을 지적했을 겁니다."
김 대리는 화면에 엑셀 표 하나를 띄웠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출 내역이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프로젝트 시작 전, 'AI 컴플라이언스 봇'을 통해
사규 12조 3항과 전결 규정을 교차 검증했습니다.
여기 보시면, 해당 지출이 'SW 구매'가 아닌 '교육 훈련비' 항목으로
처리되어야 합법적이라는 법무팀의 유권 해석 데이터 가 매핑되어 있습니다."
감사팀장은 엑셀 표와 증빙 자료가 오차 없이 연결된 구조를 보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먼지를 털러 왔는데, 먼지 하나 없는 상태를 마주한 꼴이었습니다.
김 대리가 보여준 것은 '청렴함'이라는 도덕성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시스템적으로 방어 논리가 작동하도록 설계된 구조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규정을 혁신의 방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격받을 때는 규정만큼 강력한 방패가 없습니다.
김 대리는 규정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규정을 완벽하게 장악해서, 나를 공격하는 칼을 상대방이 쥐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스마트 컴플라이언스'입니다.
감사팀이 별 소득 없이 물러가자, 김 부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2차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번에는 '권위'를 이용한 찍어 누르기였습니다.
"김 대리, 감사 별거 아니지?
그럼 바로 B 프로젝트 시작해. 예산이 좀 모자라긴 하는데,
일단 진행하고 나중에 메꿔. 까라면 까는 거지."
이것은 함정이었습니다.
거절하면 항명이고, 수락하면 규정 위반으로 나중에 독박을 쓰게 됩니다.
사바나의 법칙에서는 '힘센 수컷'에게 복종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김 대리는 여기서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내 힘으로 막을 수 없다면, 외부의 힘을 연결하여 힘의 균형을 맞춘다."
그는 평소 재무팀, 법무팀 실무자들과 구축해 둔
'느슨한 연대'라는 파이프라인을 가동했습니다.
지난달 재무팀 박 과장이 예산 시스템 오류로 곤란해할 때,
김 대리가 엑셀 매크로를 만들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30분이 오늘 그의 목을 구했습니다.
"부장님, 지시하신 대로 진행하려 했습니다만,
재무팀 예산 시스템(ERP) 상 '선집행 후 결재'가 기술적으로 막혀 있다고 합니다.
억지로 뚫으려면 CFO님의 특별 승인 이 필요한데,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재무팀 박 과장이 대안으로 '예비비 신청 프로세스'를 알려줬는데,
이쪽으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김 대리는 '감정(싫어요)'으로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재무팀'과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권력을 끌어와
김 부장의 앞에 툭 던져놓은 것입니다.
김 부장은 김 대리는 무시해도, CFO와 시스템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아... 그래? 시스템이 막혀 있어? 그럼 어쩔 수 없지."
사회학자 그라노베터는
"친한 친구보다 건너 아는 사람이 더 큰 힘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약한 연결의 힘'이라고 합니다.
김 대리가 타 부서 사람들과 밥을 먹고 엑셀을 도와준 건 '정치질'이 아니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줄 연결고리를 만들어 둔 것입니다.
이것은 인맥 관리가 아니라 '네트워크 설계'입니다.
김 대리가 구축한 방어 시스템은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1층: 규정 완벽 준수 (감사팀도 뚫을 수 없는 컴플라이언스)
2층: 타 부서 네트워크 (재무팀, 법무팀의 권위 차용)
3층: 데이터 기반 커뮤니케이션 (감정이 아닌 숫자로 대화)
이 3중 방어선 덕분에, 김 부장의 모든 공격은 허공을 갈랐습니다.
한 달 후, 김 대리는 과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승진 사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업무 혁신 및 리스크 관리 역량 우수"
이 모든 과정에서 김 대리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김 부장이 만든 '사바나의 링' 위에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링 밖에서 '시스템'을 작동시켰습니다.
1. 규정을 방패로: 규정을 완벽하게 지켜 외부 공격을 원천 차단
2. 타 부서를 지렛대로: 다른 부서의 권력을 빌려와 상사를 견제
사람들은 이것을 '사내 정치'라고 부를지 모릅니다.
하지만 김 대리에게 이것은 비겁한 정치질이 아닙니다.
비합리적인 인간의 본능(김 부장)을,
합리적인 '시스템의 힘'으로 제어하는 냉정한 전략입니다.
상사와 맨몸으로 싸우지 마십시오.
대신 당신을 지켜줄 시스템을 설계하십시오.
잘 짜인 설계도 앞에서는, 그 어떤 포식자도 이빨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과장이 된 김 대리에게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외부의 공격을 막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는 내부를 안정시킬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