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숫자의 독재를 끝내라 : KPI를 넘어

AI는 '빠른 길'을 찾지만, 인간은 '바른 길'을 정한다

by 망구르빕

12월 둘째 주 월요일 아침.

김 부장이 회의실에 엑셀 파일 하나를 던졌습니다.


내년 목표다. 매출 30% 성장.
KPI는 ①신규 회원 1만 명 유치 ②재구매율 15% 달성 ③원가 5% 절감


전략은 없고 숫자만 있었습니다.


팀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다가,

하나둘 '방법'을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달 매출을 이번 달로 당겨서 찍으면..."

"재고 떨이 세일을 대규모로 하면..."

"마진 낮춰서 물량 공세를 하면..."


김 과장은 그 광경을 보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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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난 후, 김 과장은 박 팀장을 찾아갔습니다.


"팀장님, 김 부장님이 제시한 KPI들...

신규 회원 1만 명, 재구매율 15%, 원가 5% 절감.

이 숫자들을 어떻게 정한 건가요? 시장 분석 결과인가요?"


박 팀장이 잠시 침묵했습니다.

"솔직히... 김 부장이 승진 심사를 앞두고 있어.

화려한 숫자가 필요했던 거지."


"작년 말 원가관리실 C부장도 그랬죠.

'원가 7% 절감' KPI를 만들어서 임원 승진했지만,

싸구려 자재 쓴 건 3년 뒤 하자 보수 폭탄으로 돌아올 겁니다.

그때 C부장은 이미 다른 부서겠지만요."


김 과장은 살짝 흥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KPI들에 '왜'가 없다는 겁니다.

왜 신규 회원이 1만 명이어야 하죠?

왜 재구매율이 15%여야 하죠?

그냥 달성 가능해 보이는 숫자를 던진 거잖아요."


박 팀장이 탄식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숫자는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가 먼저 정해야 할 것은 '목적지'예요."


김 과장은 화이트보드에 두 개의 칼럼을 그렸습니다.


[KPI 방식]

- 목표: 매출 30% 성장 KPI: 신규 회원 1만 명 유치 → Why가 없음. 그냥 숫자.

[OKR 방식]

- Objective: "고객이 우리 서비스를 사랑하게 만들자."

- Key Results:

재구매율 20% 증가

NPS 9점 달성

브랜드 인지도 업계 3위


"차이가 보이십니까? KPI는 '무엇을' 달성하라고만 합니다.

OKR은 '왜' 하는지를 먼저 물어요."


박 팀장이 말했습니다.


"좋아. 그런데 김 부장님은 이걸 받아들일까?"

"아마도... 안 받아들일 겁니다."


"그럼?"

"위로는 KPI 언어로 보고하고, 아래로는 OKR 방식으로 일하는 겁니다."


6개월 후, 김 과장은 임원 보고를 했습니다.

"신규 회원은 목표 대비 73%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재구매율 23% 증가, NPS 9.2점,

자발적 고객 후기로 신규 유입 28명이 발생했습니다.

매출은 전년 대비 18% 증가했습니다."


김 부장이 차갑게 말했습니다.

"목표 미달이잖아. 다음 분기엔 꼭 30% 달성해."


하지만 CFO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만든 재구매 시스템, 고객 데이터베이스. 이건 3년 뒤에도 회사에 남을 자산이야."


CEO가 덧붙였습니다.

"다음 분기는 숫자도 신경 쓰세요. 하지만 당신들이 걷고 있는 길, 그 방향은 틀리지 않았어요."


회의실을 나오며 김 과장은 생각했습니다.


'인정받았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1. KPI의 3가지 치명적 결함


○ 목표 제작자의 이해관계

KPI는 누가 만드나요?

대부분 1~2년 단위로 갱신되는 관리자가 만듭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회사의 장기 성장이 아니라 '자신의 다음 승진 심사' 입니다.


누가 만드는가? 자신의 승진/보너스가 걸린 사람

왜 만드는가? 회사 성장(X) / 실적 과시(O)

어떻게 만드는가? 데이터 기반(X) / 그럴듯한 숫자(O)


○ 측정 지표의 왜곡

"측정 지표가 목표가 되는 순간, 그 지표는 왜곡된다."


옛날 소련이 공장에 '생산량(톤)' 목표를 주자,

공장들은 쓸데없이 무겁기만 한 조잡한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숫자는 달성했지만 아무도 쓸모없는 물건만 쌓였죠.


콜센터에 '통화 건수'를 목표로 주면?

직원들은 친절한 상담 대신 빨리 끊기에 집중합니다.


영업팀에 '신규 고객 수'를 목표로 주면?

일회성 고객만 잔뜩 끌어모으고 재구매율은 바닥을 칩니다.


○ Why 없는 What의 한계

KPI는 "무엇을 달성하라"고만 말합니다.

"왜 이걸 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죠.


당근(보너스)으로 사람을 움직이면,

당근이 사라지면 동기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만들고 싶은 세상'이 명확하면,

그게 진짜 힘이 됩니다.



2. 현실에서 써먹는 '이중 언어 전략'


"그래서 OKR로 바꾸라고요?"

아닙니다. 보수적인 조직을 정면 돌파하려 들면 깨집니다.


제가 제안하는 건 이중 언어 전략입니다.

겉은 KPI, 속은 OKR.


① Step 1: 번역 능력을 키워라

위로 보고할 때와 팀 내부에서 일할 때의 언어를 분리하세요.


[우리가 하고 싶은 일]

"고객 경험을 혁신해서, 우리 서비스를 쓰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

↓ 번역 ↓

[임원에게 보고할 때]

"고객 재구매율 20% 증가, NPS 9점 달성을 통해 매출 기여도를 높이겠습니다."


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언어가 다릅니다.


임원은 듣고 싶은 숫자를 듣고,

당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겁니다.


② Step 2: 조용히 실험하라

김 부장에게 "우리 팀 OKR로 바꿉시다"라고 말하지 마세요.

거절당합니다.

대신:

팀 내부적으로만 OKR 방식으로 일합니다

분기 보고에는 KPI 숫자를 채워 넣습니다

단, 슬쩍 "부가적으로 고객 만족도도 올랐습니다" 한 줄 추가

성과가 나오면 그때 방법론을 공개합니다


조직은 말로 바뀌지 않습니다. 성과로 바뀝니다.


③ Step 3: 작은 자산을 쌓아라

김 과장이 만든 재구매 시스템, 고객 데이터베이스, 품질 관리 프로세스.

김 부장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것들은 3년 뒤에도 회사에 남을 자산입니다.

그리고 CFO와 CEO는 조용히 보고 있었죠.


당신이 쌓은 작은 자산들은:

당신의 커리어 포트폴리오가 되고

조직에 남아 다른 사람을 돕고

언젠가 당신이 리더가 됐을 때 밑거름이 됩니다



3. AI 시대, 당신이 쥐어야 할 핸들

AI는 점점 더 똑똑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관리자들이 AI를 '감시자'로 쓸 겁니다.


"너 왜 목표 달성 못 했어?"

"데이터상으로는 가능한데 왜 안 돼?"


하지만 당신은 AI를 다르게 쓸 수 있습니다. 옵션 생성기로.


"AI야, 우리 목표는 '고객 만족도 1위'야. 가능한 방법들 몇 가지 정리해줘."

→ Option 1: 대규모 할인 (빠름, 2개월 지속)

→ Option 2: 품질 개선 (느림, 3년 지속)

→ Option 3: 응대 개선 (중간)


AI는 "Option 1이 빠릅니다"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Option 2가 옳습니다"라고 답하는 건 당신의 몫입니다.


AI는 '가능한 길'을 보여줍니다.

'가야 할 길'을 선택하는 건 인간의 역할입니다.


빠른 길과 옳은 길이 다를 때, 설계자는 옳은 길을 선택합니다.



4.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운다


보수적인 조직에서는 혁명이 아니라 조용한 저항이 필요합니다.


겉으로는 순응하되, 속으로는 다르게 일하는 것.

작은 성과를 쌓고, 작은 자산을 만드는 것.


조직이 바뀌지 않는다면? 나라도 바뀌면 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쌓은 작은 자산들은:

3년 뒤 회사에 남아 누군가를 돕고

당신의 커리어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언젠가 당신이 리더가 됐을 때, 다르게 일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당신에게 묻습니다.


KPI는 묻습니다. "목표 달성했냐?"

OKR은 묻습니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무엇이냐?"

AI가 "이쪽이 빠릅니다"라고 말할 때, "하지만 이쪽이 옳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바로 AI 시대, 인간이 가져야 할 힘입니다.


당신은 지금 숫자를 채우고 있나요?
아니면 가치를 만들고 있나요?

때로는 조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조직 안에서 살아남으며 씨앗을 심는 게 전부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씨앗은 반드시 싹을 틔웁니다.

당신 안에서, 혹은 당신이 떠난 후 다른 누군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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