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던 시절 [적, 그리고 사랑 이야기]

내 영화로운 나날들

by 편성준
적, 그리고 사랑 이야기 (1989) Enemies: A Love Story 폴 마주르스키 감독, 안젤리카 휴스턴, 론 실버, 레나 올린, 마가렛 소피 스테인 출연.


대학에 들어가긴 했지만 공부나 연애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나는 아침부터 수업을 제끼고 혼자 극장에 가서 조조영화 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싱어송라이터 조동진은 암울했던 학창 시절의 답답함을 달래느라 한강 다리 위를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는데 그때의 경험으로 '긴긴 다리 위에 저녁 해 걸릴 때면' 같은 아름다운 곡을 만들기도 했다. 조동진처럼 뭔가를 만들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하루 하루를 허송세월하던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혼자 극장에 다니는 것이 일탈의 전부였다. 여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영화를 보는 행위보다 극장에 가는 것 자체가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도 없는 오전 극장 로비의 쓸쓸함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꿈도 없었던 나에게 이상한 위로감을 주었다. 나중에 [그대 안의 블루] 같은 감각적인 영화를 만들었던 동아리 선배 현승이 형을 몇 차례 만난 것도 텅 빈 평일 오전의 극장에서였다. 기수 차이가 꽤 나는 형과 나는 한적한 극장에서 만나면 반가워하면서도 어, 니가 여기 웬일이냐? 영화 보러 왔죠. 형은요? 나도 영화 보러 왔지... 같은 싱거운 대화를 나누고는 각자 영화를 보고 헤어지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왠지 은밀한 공범이 된 것 같은 반가움은 들었다.


군대를 다녀오면 남들은 학점 관리에 신경을 쓰고 취업 준비를 본격적으로 한다지만 정신을 못 차린 나는 여전히 오전의 극장으로 떠돌기 일쑤였다. [적, 그리고 사랑 이야기]를 본 것은 제대를 한 직후 지금은 없어진 신촌극장에서였던 것 같다. 폴 마주르스키가 감독하고 안젤리카 휴스턴, 론 실버, 레나 올린 등이 출연했던 이 영화는 2차 대전 때 뉴욕에 살던 어떤 어벙한 남자의 이야기였는데 비가 오는 날 봐서 그런지 전쟁 직후의 뉴욕이라든지 러닝 셔츠를 입고 나왔단 론 실버의 모습, 다리를 절며 나타났던 안젤리카 휴스턴의 씩씩한 모습 등이 애잔하게 기억된다. 이상하게 레나 올린의 기억은 없다. 아마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강렬함 때문에 다른 영화에서의 기억은 희미해진 모양이다. 노벨상 수상작가 아이작 B. 싱어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다는 것은 오늘 아침 인터넷을 찾아보고서야 알았다. 지금은 뭔가 생각만 나면 곧바로 검색해서 포스터나 동영상도 찾을 수가 있지만 그때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신문 광고를 보고 영화를 고르거나 무작정 극장에 가서야 무슨 영화를 하는지 알수 있던 시절이었다. 오늘 아침에 눈이 떠졌을 때 그 시절 생각이 문득 떠올라 노트 위에 메모를 하다가 아예 연재 형식으로 극장에 대한 개인적 추억을 하나씩 꺼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쓸 글들은 영화 얘기라기보다는 극장에 관한 추억이나 사람들 이야기에 가깝다. 비록 제목은 '내 영화로운 나날들'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