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봄날이 온다

by 지뉴

달력은 삼월의 하순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아직 대기에는 봄이 오지 않은 것 같아요. 집 밖을 나서면 매서운 바람이 여전하고,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옷깃을 여미게 되는 걸 보면요. 하지만 현실의 오감보다 눈치 빠른 육감이, 봄이 바로 내 눈앞에 와 있음을 먼저 다가와 알려줍니다.


오래간만에 경복궁 근처에 볼일이 있어 나선 길이었어요. 요 며칠 흐렸던 하늘이 쨍하게 갠 점심 무렵, 저는 토요일 밤에 있을 방탄의 '컴백 콘서트'가 생각났습니다. 무대 세팅이 한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광화문을 들러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발길을 되돌릴 수가 없었어요.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기어이 광화문 앞 세종대로로 향했습니다.


아직도 저는 광화문 광장이라 하면, 어두웠던 날들의 집회 현장을 떠올리게 됩니다. 거친 파도에 휩쓸리듯 펄럭이던 깃발들, 간절한 표정의 사람들, 목이 쉬도록 외치던 함성.. BTS의 컴백을 앞둔 광화문에 가면 내 머릿속에 크게 새겨진 광화문의 풍경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마주한 광화문 앞 대로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있는 컴백 무대는 마치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번쩍 든, 거대한 로봇처럼 보였어요. 조금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한편으로는 귀중한 무엇인가를 제 안에 숨기고 있는 마술상자 같기도 했어요. 이번 컴백 공연은 근정문에서 흥례문 그리고 월대를 지나, 무대가 세팅된 광화문 광장까지, 조선시대 '왕의 길'로 불렸던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집니다.


1995년까지 광화문을 막아서고 있던, 위압적인 '조선총독부' 건물이 사라졌기에 이러한 풍경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슬픈 역사를 지켜봐야만 했던 조상들이, 그 옛날 육조거리에서 세계인을 아우르는 문화 행사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흐뭇해할까요.


공연까지는 아직 며칠이 남아 있지만, 광화문 거리는 전 세계에서 온 팬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넷*에서 사상 최초로 시도되는 라이브 컴백 방송이, 역사적 의미로 가득한 광화문에서 대한민국의 가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역대 가장 많은 시청자를 끌어들이며 그들에게 크나큰 수익을 안겨줬을 ‘케이팝데몬헌터스’의 영향도 있겠지요. 그래서인지 넷*이 컴백 방송 홍보에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이었어요. 이번 공연을 위해 무료 티켓 2만 2천 장이 발매되었는데, 예상되는 관광객은 이십만을 훌쩍 넘을 거라고 하니, 그 열정 가득한 분위기가 어떠할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김구 선생님이 그토록 간절히 염원했던 '문화의 힘'을 목도할 수 있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저는 무척 감격스러워요. 진정한 봄이 도래할 날이 멀게만 보였는데, 버티고 견뎌 낸 날들이 마침내 우리에게 봄을 데려다주는 것 같습니다.


이십여 년 전 스코틀랜드에서의 날들이 생각납니다.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은 이름 없는 변방의 작은 나라였어요. 지구상에 실제 있지만, 외국인들의 머릿속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나라.. 제가 다니던 대학 부설 어학원 학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스페인 친구들은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관심을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곳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저는 주로 일본인 친구와 같이 다녔는데, 그들은 일본인 친구에게는 궁금한 것이 많아 보였습니다. 한국을 알리고 싶었지만, 저 혼자서 해나가기엔 녹록지 않은 현실이었어요. ‘한국은 일본에 있는 도시 이름이야?' 같은 질문 앞에서 헛웃음을 짓다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 끝에 차오르던 설움이란..


멀쩡히 내 나라가 있음에도, 때때로 나라를 잃은 것 같은 심정이었고, 그런 나의 조국이 가엾고 애틋했습니다. 철없는 스무 살 남짓의 소녀였지만, 일제 강점기의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고난과 핍박의 역사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우리인데, 그 누구보다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국민들이 있는 곳인데, 하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오늘의 광화문 풍경을 보며 저는 살짝 울컥한 마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건만.. 강대국 사이에 끼여 지도에서 찾아내기도 힘든, 애처로우리만치 작은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도 봄날은 오는구나, 하는 생각에 지난날의 설움이 조금 가시는 듯했습니다.


공항에서 일하는 짝꿍은, 방탄소년단 콘서트 때문에 공항 이용 승객이 너무 늘었다며 툴툴대지만, 저는 짝꿍이 한숨 지을 때 속으로 미소 짓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와서 즐거운 시간, 오래도록 남는 추억 많이 새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덤으로 돈도 많이 많이 쓰고 가기를, 그들이 뿌리고 간 돈이 이 나라의 혈관을 타고 부지런히 돌고 돌아, 조국의 건강한 성장에 도움을 주기를..


방탄소년단의 사 년 만의 컴백과 함께, 대한민국에 봄날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봄처녀가 된 듯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현장에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라이브 방송만큼은 사수해야겠어요.


문득 얼마 전 있었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케이팝데몬헌터스’의 ‘메기 강’ 감독이 수상 소감으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중 한 문장이 한동안 제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이 상을 한국과 전 세계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바칩니다.”


그 순간 저는 ‘우리’라는 단어를 떠올렸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단단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를요. 지하상가의 허름한 레코드 가게 앞에서 얼마 되지 않는 팬들과 만남을 가졌던 방탄소년단이, 이제는 전 세계 수백만 팬들을 만나는 국제적 스타가 된 것처럼, 나의 조국도 이 좁은 국토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드넓은 곳으로 훨훨 날아가리라는 벅찬 예감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보랏빛 향기 가득한 봄날이 오고 있어요. 여러분도 이 기운이 느껴지시나요?

지금 이 순간, 광화문 앞으로 달려 나가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흥해라, 대한민국!!!

일직선상에 보이는 광화문과 방탄소년단의 무대, 그리고 그 곁을 지나는 한복 입은 외국인들
불편을 감수하고 협조해 주시는 모든 시민분들, 복 받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