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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신만나드립니다 Sep 28. 2021

원광대학교 경혈학교실 김재효 교수님 -1탄

교육자이자 연구자로서 경혈학의 미래를 말하다

날씨가 서늘해진 9월의 어느 토요일, 코알라와 코커스패니얼이 익산 원광대학교로 달려갔습니다. 바로 경혈학교실에 계신 김재효 교수님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코알라는 교수님을 직접 찾아뵙는 것이 본과 2학년 때 경혈학실습 이후로 처음이었는데요~ 열정으로 학생들을 교육하시며 경혈 경락 연구를 선도하고 계신 김재효 교수님의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김재효 교수님 약력]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학사)

원광대학교 대학원 졸업(한의학 박사)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부학장(2021~현재)

M&L심리치료학회 부회장(2021~현재)

원광대학교 생명윤리위원회(IRB) 위원(2015~)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운영위원(2011~ 현재) 

(현)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Q.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부학장과 함께 경혈학교실 주임교수를 맡은 김재효입니다.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에 1989년 입학하여 1995년에 졸업하였습니다. 그 후 대학원 과정을 같은 학교에서 이수하고 2003년 경혈학 전공으로 박사학위 취득하였습니다. 2006년 원광대학교에서 교수로 임용된 이후 현재 16년째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경혈학 이론과 실습, 그리고 의료윤리 과목을 담당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Q. 교수님의 하루/ 일주일 일정을 알려주세요.

A. 한의대 내에서의 일과라고 하면, 코로나19가 큰 영향을 주었지요. 이젠 건물 밖에도 잘 안 나가고 주로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요(웃음). 연구실에서 교육 및 연구에 관련된 자료 정리 등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있으며 평일에는 담당 과목에 따라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의예과 학생들에게는 의학윤리, 한의학과 학생들에게는 경혈학과 경혈학실습 가르칩니다. 대학원에서도 종종 경혈학 관련 과목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 부학장이라서 학교 행정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이 부분은 크게 일과에 영향을 주지는 않아요.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금방 일주일이 지나가요. 어떻게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이 살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해요.(웃음)
 
학교 일과가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가능한 가정 내 시간에만 몰입하려고 학교와 외부 일을 끌어들이지 않고 공과 사를 구별하는 것에 원칙을 두는 편이죠. 그래서 학교 일과 후에는 개인적으로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에 취미를 즐깁니다. 저에게 취미생활은 어떤 한가지보다는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그냥 해요. 한가지 에피소드를 들면 지난해 COVID-19로 마스크가 일상이 될 때 마스크 스트랩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서, 재료를 구입해 한 달 정도 기간에 100여 개 만들어 주변 가족과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어요. 이처럼 뜬금없는 떠오르는 호기심이나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일단 해봅니다. 그게 일과 후에 제 취미이자 사생활입니다.



Q. 한의대에 진학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A. 당시 뚜렷하게 한의사에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능동적인 선택보다는 당시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의 권유로 의료인이란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어요. 그때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을 통해 한의사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추억 하나가 떠오르는데, 고등학교 운동장 옆에 한의원이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공놀이하다가 한의원 건물 옥상에 공이 넘어간 것을 찾으러 무단으로 들어갔다가 한의원 원장님께 크게 꾸중을 들었던 일이 있어요. 나중에 한의대 졸업하고 대학원 다닐 때 저를 꾸짖던 그 한의원 원장님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건을 웃으면서 이야기 나누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만큼 한의대 진학은 청소년 시절 저에게 뜬금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제가 고등학생으로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수학과 물리학에 관련된 연구자였습니다그렇게 보면 사실 초, 중, 고등학생 동안 가져온 저의 꿈과 진로 선택은 그렇게 잘 일치하지는 않았네요. 그런데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저는 한의학을 선택할 것 같아요. 지금 삶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죠. 어떻게 보면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이지요.(웃음)



Q. 학부 시절 교수님은 어떤 학생이셨나요?

A. 대학 입학 초기에는 한의학 공부에 적응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어요.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제가 수동적 선택으로 한의대에 진학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동안의 학창 시절에는 한문, 동양철학, 역사, 인문학 등에 대해서는 전혀 공부하지 않는다는 점도 영향을 줬죠. 물론 의학적인 측면에서는 생명과학과 유사한 부분도 있어서 그나마 덜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동안 공부해왔던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이 다른 데서 오는 괴리감이 있었습니다. 입학 후 좋은 선배들 덕분에 한의학 공부에 필요한 한문을 포함한 동양철학, 그리고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한의대 합격하자마자 한의대 선배에게 연락이 와서 입학 전부터 한문 공부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한의학 공부가 정말 힘들어 심지어 학교를 그만 다닐까 고민도 있었기에, 지금의 한의대 학생들이 처음 학교 생활과 한의학 공부에 적응하는 모습과 마음도 이해가 돼요.
 
그러다가 제가 스스로 적응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진급을 하면서였어요정말 적응을 못 했다면 진급을 못했을 텐데, 어떻게 잘 적응해 가고 있음을 깨닫고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죠. 제가 힘들어했던 인문학적, 어학적인 부분들을 선배와의 공부, 동아리 및 독서클럽 활동 등을 통해서 메꾸어 나갔어요. 또한 당시 개인용 컴퓨터가 등장하던 시기였는데, 이를 활용해 한의학 자료 정리와 공부를 하는데 효율성이 높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회에는 `신과학운동`과 같은 바람이 불었는데, 이에 호기심을 가지면서 저는 한의학 내부의 관점보다는, 남들이 관심 갖지 않는 부분인 한의대 밖에서 한의학을 보는 시각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한의대 동기 학생들은 저를 볼 때 ‘생각/관점이 다르다.’라거나 ‘너는 임상가보다는 연구자가 되면 더 좋겠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죠.(웃음)

다음 학년에 진급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한의대에 적응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Q. 주변 분들이 교수님에게 연구자가 어울린다고 말씀하신 이유나 관련된 일화가 있을까요?

A. 동기들과 대화하면 한의대 내의 주제나 학과 공부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한의학과 관련된 한의대 밖의 세상 이야기를 많이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도올 김용옥 선생님’ 아시지요? 그분이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에 편입하셨는데, 마침 제가 다니던 학년으로 들어오셨어요. 당시 대학 사회 내에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책과 `기` 철학이라는 개념이 큰 파장을 일으키던 때였죠. 저에게는 도올 김용옥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신과학운동(new age science)과 같은 새로운 사고방식에 오히려 한의학보다 더 관심이 갔어요. 한의학을 전공하지만, 한의학적인 주제보다는 한의학과 연관된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동료들이 저를 보고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네요.(웃음)

 또 대학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저에게 약리학을 담당하셨던 한종현 교수님께서 저에게 글 쓰는 습관을 지니라고 당부해 주셨어요. 저는 그게 되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료를 정리하고 글 쓰는 것에 많이 집중했던 것 같아요. 최소한 일 년에 한 편 이상의 글을 쓰자. 학과 수업 과제물로서 레포트를 쓰라는 것이 아니라 방과 후에 할 수 있는 글쓰기. 꼭 인문학적인 대단한 글이 아니더라도 탐구생활, 동아리 활동을 통한 논문, 자료집 등 내 이름으로 된 하나의 글을 완성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어요. 이런 것들이 모이다 보니까 제 캐릭터가 형성되었어요. 그것을 다른 분들이 보고 연구자가 적합하다고 평가해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제 길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것 같아요.



<교육자로서>


Q. 임상가가 아니라 교육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길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A. 본과 3학년이었던 1993년에 한의사와 약사 단체 간의 한약 분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국민 서명운동을 위해 수업 거부를 하고 길거리 서명을 받으러 다니면서, 밥그릇 싸움이라며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시는 시민들을 설득하기도 했죠. 그러던 중 어느 남자분과 30분간 이야기를 하고 서명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알고 보니 약대생이더군요. 그런데 서명을 받은 후, 스스로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상황을 과장하지는 않았는지, 모든 것들을 솔직하게 설명했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본3 이후로 이런 회의감은 더욱 커졌으며, 더 나아가 이 마음가짐으로 ‘정말 떳떳하고 정직하게 진료를 할 수 있을까?’, ‘내 실력을 과장, 포장하면서 진료를 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죠. 자연과학을 좋아했던 저로서는, 한의학은 증명된 정보들이나 근거가 많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이에 ‘학문적 틀을 더 단단히 하고, 한의학 지식과 기술에 대한 객관성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라는 결심을 하고 기초학교실(경혈학교실)에 노크를 했고,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한의과대학 조교이자 대학원생이 되었습니다. 자신감 있는 임상 한의사가 되기 위한 전제로써 선택한 길이었는데, 결론적으로는 제 모든 것을 바치게 되었고 학자이자 교육자가 되었습니다.



Q. 다양한 학문들과 기초학교실 중에서 경혈학을 가르치시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A. 순수한 학문적인 요인보다는, 제 성향과 주변의 다양한 요인들이 합쳐져 경혈학교실을 선택하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 한의과대학 입학하였을 때, 한의약 임상의 두 축인 약과 침 중, 약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지만 침은 너무 무서웠어요. ‘침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방법이 없을까?’ 라는 고민을 하다가 ‘경혈침구반’이라는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경혈침구반에서 1년에 한 번씩 글쓰기도 하고, 동기들과 함께 방과 후 학습 속에서 자료 정리와 자침 연습을 함께 하면서 침에 대한 두려움도 점차 극복해 나갔습니다. 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동기부여를 하고 훈련했던 것이 지금의 제 강점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 동아리 지도교수님이자 제 롤모델이셨던 경혈학교실 손인철 교수님 밑에서 배우며 임상 한의사로서의 자기 확신을 기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손인철 교수님과 함께하면, 앞서 말했듯이 본 3 때 약대생을 만나면서 들었던 회의감을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죠. 이러한 여러 상황으로 인해 지금 경혈학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혈학을 전공하면서 당시에 신경생리학 및 전기생리학이 경락과 경혈의 실체를 밝혀줄 것이란 꿈을 품게 되었고, 지도교수님의 적극적인 지지와 배려로 원광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 교실에서 대학원 연구와 교육 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지요. 그 덕분에 제가 경혈학뿐만 아니라 신경생리학에 기반을 둔 기초연구와 교육 역량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답니다.


(코알라) 저는 본과 3학년인데도 아직 침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A. 본과 3학년이면 극복해야 했는데(웃음)!! 지금부터라도 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동기부여를 하고 훈련을 하면 됩니다. 오히려 과한 자신감으로 의료사고가 나는 것보다는 낫지요. 실력과 자신감을 가지되, 자만하면 안 됩니다.

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훈련했던 교수님처럼 저희도 앞으로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Q.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경혈학 교육목표는 무엇이며, 이를 위해 어떻게 강의를 준비하고 계신가요?

A. 교수의 역할은 크게 연구, 교육, 기타활동이 있는데, 연구와 교육은 교수의 중요한 역할 중 양대 축이에요. 교수를 처음 선택했을 때는 가르치는 교수가 아닌 연구하는 교수를 생각했어요. 연구자로서 삶이 더 중요했고, 내가 잘하는 연구를 토대로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교육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제 욕심으로 학생들에게 산과 같은 막대한 자료를 던지다시피 하면서, 학생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고 제 수업은 강압적이고 위협적인 수업이 되었죠. 나중에 수업 평가를 통해 해당 사실들을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연구를 잘하고 있었기에, 제가 아닌 학생들의 탓을 했어요. 그러나 그 다음 학기에도 이 상황이 반복되면서 교육자로서의 기질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즈음, 한의대 교수이자 전북대에서 교육학 공부를 하시던 임규상 교수님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내 입장이 아닌 저들의 입장에서 가르쳐야 하는구나’ 라고 깨달았죠. 제가 맡은 교육은 동물이 아니라 사람한테 하는 것이잖아요. 그때부터 인문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를 시작했고 ‘교육은 학생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밀어 가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가기 싫은 사람을 목줄로 끌고 가는 것은 학대와 다름없죠. 이때부터 교육목표가 바뀌었어요. 학생들 대부분이 저처럼 연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임상의 혹은 전공의’로 감을 염두하고 목표를 설정했습니다. 바로 “한의학의 실용성” 말이죠. 임상 한의사를 양성하는데 필요한 경혈학을 가르치고, 형이상학적인 느낌에서 벗어나 “실용성, 합리적, 보편적인 한의학”을 가르치기로 목표했습니다.

 또한 우리 한의사 진료의 대부분이 일차진료 역할이기에 “의료인의 기본소양과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도 강조하게 되었어요. 교수가 학생에게 눈높이를 맞추듯, 학생과 한의사가 눈높이를 환자에게 맞추도록 하는 것이죠. ‘의사와 환자의 소통 속에서 환자의 이익, 자율성, 인권을 위해 의료인이 어떻게 노력하느냐’를 수업 시간에 항상 강조합니다.



Q. 한의학의 실용성을 강조하고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 관련 일화가 있을까요? 

A. 두 가지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어느 날 대학 동기인 임상 교수에게 ‘무슨 침법과 한의학 원리로 침구 의학을 가르치는가?’라고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그 당시만 해도 경혈학이나 침구의학 분야에서 아시혈을 쓴다고 말하면 나쁜 선택이라는 논리가 만연했고, 저 또한 사암 침법을 포함해 전통적인 경혈학과 침구의학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했어요. 그래서 저는 당연히 그분이 제가 강조해 온 이론을 근거로 침구 의학을 교육할 거라 기대했지요. 그러나 그분은 ‘특정한 침법이나 한의학적 원리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의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를 해야 하기에 아시혈도 중요하다’ 말하는 거예요. 그 당시의 저는 실용성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죠. 또한 저는 경혈학 교육에서 환자가 아니라 한의사의 입장에서 한의학의 장점을 강조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한의사의 모습이 ‘한의사 입장에서 내가 올바른 치료를 환자에게 제공했어’가 아니라, ‘환자 입장에서 받은 치료가 효용성 있고 적절한가’를 고려해서 시술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일화는 전북한의사회에서 학술이사(2008년 ~ 2013년)를 맡을 때입니다. 개원한의사가 주축인 한의사회에서 한의대 교수이자 기초한의학을 하는 연구자가 임원 역할을 한다는 게 생소했던 시기입니다. 실제 임상 현장의 이슈들과 사건·사고를 접하고, 다양한 한의계 정책 등을 토론하면서 임상한의사의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환자의 동의 없이 탈의시키거나, 습부항 시술 시 란셋 재사용 등의 사례를 직접 접하면서 환자의 인권과 자율성, 시술 전 진료 동의서, 의료행위에서의 안전 및 위생관리 등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의학 전문지식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보건의료 인력의 소양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경혈학 실습이 단순히 학생들 간의 ‘침놓기 놀이’ 혹은 ‘침 잘 놓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임상을 위한 실무 중심 교육 시간’이 되도록 실습실을 현대화하고, 임상 현장에서 접할 수 있는 소재와 내용들로 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이죠.

 이런 일련의 과정들로 인해 제가 환자 중심 교육을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죠. 경혈학을 가르칠 때도, 실용성을 강조하면서 경혈학이 `생리학 지식`이 아니라 ‘병태생리 지식’임을 고려하고 가르치도록 목표 의식이 바뀐 것입니다.



Q. 코로나 19로 인해 학교 교육이 비대면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이후 강의방식 및 실습방식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나요? 

A. 코로나19가 처음에는 갑갑하고 불편했죠. 많은 사람이 코로나 이전보다 이후에 교육의 질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죠. 교수 입장에서도 대면 수업을 통해서 하던 모습이 일상이었는데 그걸 못하게 되니까 처음에는 교육이 교수와 학생에게 심하게 덜컹거리며 혼란이었지요.

 우리는 새로운 환경이나 변화에 적응하는 존재입니다. 그 결과 COVID-19 속에서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ZOOM, 구글 클래스룸 및 플랫폼 등)을 활용하기 시작했고, 비대면 수업자료와 영상물을 활발히 제작하면서 문제를 해결했죠. 온라인 플랫폼으로 집중적으로 이론 교육한 후에 대면 교육이 가능할 때 실습 위주로 교육하는 방식도 효율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뿐만 아니라, COVID-19로 인해 실습실 내의 위생관리 및 감염예방을 위한 최적의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에게 더욱 강조하면서 원칙에 따라 실습을 진행하는 습관을 유도할 수 있었죠. 부족한 실습시간을 보충할 방안을 구상하다가, XR기반 시뮬레이션 실습 교육 플랫폼도 산-학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Q. 이런 성향의 학생들에게 교육자의 길을 추천한다’ 라는 점들이 있을까요?

A. 교육과 연구를 구분해서 교수로의 길을 걷기는 쉽지 않아요. 저처럼 교육자의 성향이 없었던 사람이 연구의 길에서 얻어진 성취로 교육자가 되었듯, 연구나 교육 어떤 영역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내가 목표를 세우고 그걸 이루기 위해 꾸준하게 노력한다면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와 관련된 제 경험을 이야기해주자면, 저는 항상 ‘한 번 목표를 정하면 10년 정도는 투자한다’라는 생각으로 노력해요. 실제로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가 되기까지 10년이 걸렸고, 순수하게 연구에 몰두했던 기간이 10년이었어요. 교수가 되어 여러 시행착오를 겪고 슬럼프에 빠졌던 초기 교수의 삶부터, 실용성과 합리성이라는 답을 얻기까지 10년이 걸렸죠. 또 실용성과 합리성에 맞는 근거와 데이터를 만들고자 시작한 초음파 진단 영상 활용 연구와 교육도 10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도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중장기로 10년 정도는 인내심 가지고 버텨보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다만 임상 한의사이든 교육자의 길이든 대상은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소통하는 역량이 교육자의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재효 교수님과 즐거웠던 인터뷰 현장, 2탄도 기대해주세요~~!!
(본 인터뷰는 방역 수칙을 준수하여 진행되었습니다.)

Interviewer. 코알라, 코카스패니얼

Writer & Editor. 코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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