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엔, '결국엔 잘 될 거야' 하고 위로하는 말들이 싫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면 우리는 왜 내일의 걱정으로 오늘 밤을 뒤척일까.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우리는 왜 내리막길 앞에서 머뭇거리게 될까. 지고 있는 배낭을 곧 내려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가방을 가볍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닐 텐데. 100m만 더 가면 된다고 해서 지금 당장 숨이 차지 않은 것은 아닌데.
'다 잘 될 거야'라는 말은 때론 대책이 없다.
'하다 하다 해도 안 되면 어떡해? 결국 가던 이 길을 그만두고 뒤돌아서면 어떡해?'라는 질문에 그럴듯한 대답이 되지 못 한다.
'다 잘 될 거야'는 때론 의문이 들게 한다. 결국에 다 잘 될 거라면, 나 지금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거야? 결국에 가서는 모든 것이 잘 된다면, 어떻게든 잘 해보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는 지금 내 모습, 이거 필요 없는 거야?
결국엔 잘 될 거라는 말을 업은 채 꾸역꾸역 끝으로 밀어갔을 때 옆에서 수없이 속삭여왔던 '결국'이 내 머릿속에 있던 '결국'과 다름을 목격하는 기분은, 말할 수 없다. '결국'과 '결국'의 간극이 멀어질수록, 마음도 그만큼 가라앉는다.
상처가 났을 때 밴드로 덮어버리는 것보다, 잘 씻고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고 통풍을 시켜주는 게 더 잘 나을 때가 있는 것처럼. 때때로 우리에게는 다 잘 되리란 말로 상처를 덮어버리는 것 대신, 있는 상처를 그대로 보듬어주는 위로가 필요하다.
가장 아끼던 접시를 깼을 때, 여행을 갔는데 소매치기를 당했을 때, 면접에 연달아 5번을 떨어졌을 때, 나만 모르는 이유로 미움 사고 있을 때, 잘 달리다가 문득 멈춰 서고 싶어 졌을 때, 누군가 먼저 다가와 내게 '괜찮아' 해주었으면.
또 다른 예쁜 접시를 살 수 있을 거야. 소매치기는 당했지만 네가 본 풍경은 여전히 네 안에 남아있잖아. 다른 좋은 곳에서 또 너를 알아보겠지. 곧 오해가 풀릴 거야. 그래 좀 쉬고 다시 달리면 되지.
하는 말들 말고,
접시가 깨져서, 소매치기를 당해서, 면접에 떨어져서, 미움받아서, 달리기가 지쳐서 아픈 마음 그대로를 위로받았으면. 벌써 다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깨지고 지친 마음을 온전히 바라봐주는 공감이 있었으면.
아팠겠구나, 그렇다면 기꺼이 아파해. 솔직히 말하자면 나중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라. 그러니 지금 이 마음 그대로 안아줄게. 사실 이 아픈 마음이 빨리 나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몰라. 그렇지만 지금은 이 마음 그대로를 보아줄게.
하는 위로. 그런 위로들이 어느 날 너에게는 꼭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