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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나이를 넘어서는 마법

by 만숑의 직장생활

오후 두 시. 점심 배가 채 내려가지 않은 탓인지 책상마다 졸음이 내려앉은 듯했고, 창밖 햇살은 바닥에 길게 번져 있었다.

해야 할 일들은 오전에 어느 정도 정리해둔 터라 마음은 한가했고, 여유로운 하품이 터져 나왔다. 마침 옆에 있던 신입과 잠을 깨울 겸 커피를 핑계 삼아 라운지로 나왔다.

“벌써 입사한 지 3개월 됐지? 시간 참 빠르다.”
“그러게요. 정신없이 지나갔네요.”
“이제 팀 분위기 어느 정도는 알겠지? 특히 우리 팀은 직급은 비슷해도 나이는 제각각이잖아. 같이 지내다 보니까, 누가 몇 살쯤일 것 같다는 감이 좀 와?”

신입은 피식 웃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아... 나이 같은 건 여쭤본 적도 없고, 잘 모르겠는데요.”
“뭐 심각하게 말하라는 건 아니고, 그냥 느낌만.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가볍게 얘기해봐.”

짖궂은 질문. 그렇지만 흥미롭다.

신입은 팀원들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는 듯 눈을 굴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제가 느낀 것만 말씀드려볼게요. 정말 주관적인 거예요.”

그는 몸을 고쳐 앉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예를 들어 김 책임님, 이 책임님은요... 어떤 일을 지시받아도 거절은 안 하시는데, 그렇다고 먼저 나서서 움직이시지도 않아요. 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차분히 처리하시고, 한가하면 조급해하지 않고 조용히 계시죠. 보고서는 늘 깔끔하고 안정적인데, ‘더 잘해야겠다’는 열정을 굳이 드러내시진 않아요. 가끔은 ‘다 해봤지, 별거 아니야’라며 경험담을 길게 말씀하시는데, 듣는 후배 입장에서는 든든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운 벽 같은 기운이 느껴지기도 해요. 여유와 경험이 느껴지지만, 그게 때때로 거리를 두는 분위기로 다가와서... 그래서 자연스럽게 연차가 많아 보이더라고요.”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진지한 신입의 답변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반대로 강 책임님, 박 책임님은 금세 티가 나요. 일 얘기만 나오면 눈빛이 반짝이고, 맡은 건 어떻게든 더 잘하려는 기운이 있어요. 회의에서는 자기 의견을 뚜렷하게 내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히 몰입해서 자료를 파고드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죠. 후배들과 대화할 때는 회사에 대한 생각이나 앞으로의 방향을 강하게 이야기하시기도 하는데, 그만큼 작은 피드백에도 표정이 굳고, 결과가 늦어지면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 같아요. 겉으로 표현되든 속으로 묻어나든, 열정과 불안이 동시에 느껴져서 ‘아, 아직 젊구나’ 싶은 기운이 확 드러나요.”

나는 신입의 분류법을 머릿속으로 대입해봤다. 대부분은 무리 없이 맞아떨어졌지만, 유독 애매하게 걸리는 몇 명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그럼 유 책임님이나 안 책임님은 어디에 들어가?”

신입은 잠시 생각하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말했다.

“처음엔 두 분도 연차가 많으실 줄 알았거든요. 차분하고 노련하시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경험은 많은데, 묘하게 젊은 기운이 있어요.”

그는 말을 이어갔다.

“보통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새로운 얘기가 나오면 ‘그게 뭐 대단하냐’, ‘우리 때는 말이야’ 하면서 넘기시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은 꼭 물으세요. ‘그건 왜 그래?’ ‘어떻게 하는 건데?’ 하고요. 제가 설명을 제대로 못 해도 끝까지 들어주시고, 고개까지 끄덕여 주세요. 심지어 새로 나온 앱도 직접 깔아보시고, 제가 추천드린 유튜브 채널도 실제로 구독해 두셨더라고요. 아이돌 얘기나 러닝 크루 얘기도 ‘그건 어떤 분위기야?’ 하며 진짜 궁금해하는 눈빛으로 물어보세요. 단순히 대화를 이어가려는 게 아니라, 모르는 세상을 배우고 싶어 하는 느낌이 나요.”

신입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사람 얘기도 그냥 흘려듣지 않으세요. 제가 무심코 ‘어제 잠을 잘 못 잤다’고 말했는데, 다음 날 ‘오늘은 좀 나아?’ 하고 물어봐 주시더라고요. 지나가듯 던진 얘기를 기억해 두셨다가 며칠 뒤 다시 꺼내 주실 때도 있고요. 그럴 때 ‘아, 내가 한 말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구나’ 하는 게 느껴져요. 그래서 단순히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인지 두 분은 오래 일해온 사람들처럼 차분하고 여유로움이 묻어나는데, 또 한쪽에서는 이상하게 생기가 보여요. 모르는 얘기가 나오면 꼭 물어보고, 새로운 것도 직접 해보시잖아요. 거기에다 옆사람 얘기도 기억해 두셨다가 다시 물어봐 주시고요.

보통은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관심 없어’, ‘그건 다 해봤어’ 하면서 넘기고, 젊은 분들은 불안해서 조급하게 움직이는 경우가 많잖아요. 근데 이분들은 둘 다 아니에요. 편안하면서도 호기심 있게 배우려는 기운이 있고, 그렇다고 흔들리거나 급해 보이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나이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성숙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어디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 분위기예요.”

나는 순간 생각이 멈칫했다. 별것 아닌 농담으로 시작한 대화였는데, 신입의 말은 오래도록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이에 대한 그의 말은 단순히 숫자를 두고 한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소피가 얼굴이 늙은 모습으로 변하는 마법에 걸린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면 그건 단순한 저주가 아니었다. 마음이 꺾이면 금세 늙은 얼굴이 되고, 마음이 설레거나 살아나면 다시 젊은 얼굴로 돌아간다. 겉모습을 바꾸는 힘이라기보다, 내면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얼굴이 달라지는 마법이었다.

처음엔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곱씹어 보면 현실과 그리 멀지 않다. 사람의 얼굴과 태도에는 그가 품은 마음이 은근히 비치곤 하니까. 어떤 이는 불안과 조급함 때문에 날이 서 있고, 또 어떤 이는 오래된 습관에 눌려 무겁게 보인다. 반대로 어떤 이는 호기심과 관심을 잃지 않아, 묘하게 생동감 있는 기운을 풍긴다.

그런걸 보면,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흐르지만, 그 흔적이 남는 모습은 제각각인듯 하다. 소피의 얼굴이 순간마다 달라지듯, 사람도 내면에 따라 때로는 젊게,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또 다른 무언가의 빛깔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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