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경청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난 후 며칠 뒤였지.
점심시간에 네가 다른 팀 동료랑 얘기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어. 상대가 한참 자기 얘기를 쏟아내는데, 너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빛은 계속 머뭇거리더라. 말을 끊으려다 다시 주저하고, 정리할 타이밍이 와도 잠깐 기달렸다가 금세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랄까.
그때 너의 고민에 대해서 조금 선명하게 느껴진 게 있었어. 내가 봤을 때 너는 들어주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어디까지 들어줘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 같았거든.
누군가의 말을 어느 지점에서 받아들이고, 어느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멈춰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없으니 매 순간 ‘이게 맞나?’ 하고 계속 생각하느라 더 지쳐 보였어.
즉, 상대방이나 대화 기술에서 문제를 찾기 전에 먼저 봐야 할 건 이거야. "네가 직장에서 어떤 태도로 일하고, 동료들과 어떤 관계를 만들고 싶은지". 진짜 문제는 그 내부 기준이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야.
그래서 이번엔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직장에서 경계를 세우려면, 그 경계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 네가 직장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부터 차근차근 짚어봐야 하니까.
사실 직장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기대와 가치관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야. 누군가는 직장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누군가는 개인의 성장 경로를 만들기 위해 오고, 어떤 사람은 인정받는 경험을 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그 말은 즉, 직장 생활에서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이 모두 다르다는 뜻이야. 누군가에게는 성과가 기준이고, 누군가에게는 분위기나 인간적인 유대가 더 중요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출퇴근 질서처럼 명확한 규칙이 핵심 가치일 수도 있어. 심지어 “나에게 방해만 안 되면 된다”는 태도로, 철저히 자기 울타리 안에서만 일하는 사람도 있지.
이걸 하나의 단어로 묶어 정의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해. 직장은 여러 기준이 동시에 흘러가는 공간이니까.
그래서 오히려 자기 기준이 없는 사람이 더 힘들어져. 이 혼합된 흐름 속에서 누구의 기대에 발맞춰야 하는지, 어디까지 맞춰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거든.
네 모습을 보면서 그런 부분이 조금 보였어.
너는 상대의 리듬을 읽고, 그 흐름을 존중하려고 해. 그런데 사람들이 각자 다른 기준을 갖고 있으니, 네가 어떤 기준을 중심에 두고 반응해야 하는지가 늘 모호해지는 거지. 그래서 어떤 날은 관계 중심적인 사람 옆에서 너무 건조했나 마음이 쓰이고, 어떤 날은 엄격한 기준을 가진 사람 앞에서 결정을 흐린 것 같아 스스로를 탓하게 되고.
그렇다고 해서 ‘이런 가치가 맞고 저런 가치가 틀렸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야. 애초에 직장은 서로 다른 기대와 방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고, 그 다양성 자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사람마다 직장에서 찾는 가치가 다르니, 너도 너만의 기준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기 경계가 없는 사람은 옆자리 사람의 방식에 쉽게 휘둘리고, 반대편 팀의 스타일에 또 맞춰가다가 결국 ‘내 방식’이 무엇인지 희미해져. 그러다 보니 관계 때문에 지치고, 성과 때문에 압박받고, 기대 때문에 흔들리게 되는 거야.
반대로, 일에 대해 “나는 이런 방식으로 일하고 싶다”, 관계에 대해 “나는 이 정도까지는 감당하고, 이 이상은 어렵다” 이렇게 내부 기준이 분명한 사람은 다르게 움직여.
그 사람은 상대가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든, 그 가치에 맞춰 ‘너무 많이’ 가지 않거든. 자신의 방식이 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기대와 자신의 리듬을 구분할 수 있어.
그렇다고 그 기준이 거창한 게 아니야. 대단한 선언도 아니고. 그냥 이런 거야.
“나는 직장에서 주어진 역할과 내가 지키고 싶은 삶의 균형을 함께 고려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싶다.”
“나는 관계를 완전히 닫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받아내지도 않는 쪽에 있다.”
“나는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대화를 선호한다.”
이런 생각들을 하나씩 세워가는 과정이 결국 너만의 기준을 정립하고, 자연스러운 경계를 만드는 일이야.
직장은 원래 다양한 기대가 섞여 있는 곳이라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너는 어떤 기대를 기준점으로 삼고 있는지 알고 있어야 누구를 만나도 지금처럼 소모되지 않고, 반대로 누구와도 단절되지 않으면서 너만의 리듬을 지켜낼 수 있다고 믿어.
그래서 나는 네가 지금 고민하는 이 시점이 되게 중요한 변곡점이라고 생각해.
타인의 가치가 다양한 공간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서 있을지 경계를 정리하는 순간, 관계도, 일도 조금 덜 흔들리고 조금 더 너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게 되거든.
어디에 설지는, 결국 네가 정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