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키신을 들었다

뮌헨의 클래식 공연 1

by 뮌헨의 마리
예브게니 키신의 2023.3월 뮌헨 공연.



2023. 3.7(화) 저녁 8시, 뮌헨.

예브게니 키신 Evgeny Kissin의 연주를 들었다. 장소는 코로나 기간 중에 뮌헨의 이자르 강변에 새로 이전한 연주회장인 가슈타이크 Gasteig의 이자르 필하모니 공연장이었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그날 오후 한국슈퍼에서 예정된 근무도 취소되었다. 와야 할 물건들이 다음 날로 지연되었기 때문. 날씨도 도와주었다. 낮에는 쌀쌀했는데 남편과 아이의 저녁을 준비하고 밖으로 나오자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시간이 넉넉하면 이자르 강변을 따라 걸어도 30분이면 도착할 듯한데 정해진 약속이 있으면 왜 시간은 늘 촉박하기만 한지. 대중교통으로 20분쯤 일찍 도착하는 편을 택했다.


방법은 두 가지.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가는 것과 우반 지하철과 버스로 연계하는 것.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보다 우반을 타고 버스를 갈아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버스를 기다릴 때는 날이 제법 밝았는데 버스를 타고 이자르 강 다리를 건너는 사이 어둠이 내려 공연장 건너편에 내리자 주위가 어둑해졌다. 버스 안에는 말쑥하게 단장한 독일 노인분들로 가득했다. 아하, 이분들이 모두 나와 같은 곳으로 향하시는구나. 예상은 적중했다. 버스에 탄 승객 상당수가 가슈타이크 정류장에서 내렸다. 버스는 가볍게 출발했다. 연주회장은 건물 안쪽의 직사각형 공간 바닥에서 천장까지 뚫린 형태로 로비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넓은 공간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키신의 인기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키신의 연주와 피아노.



예전에 힐더가드 어머니와 남편과 아이와 다 같이 와 본 적은 있지만 혼자 온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혼자라 외투는 맡기지 않았다. 끝나면 빨리 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확인하고 외투를 놓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여자 화장실은 생각보다 멀었다. 공연 중간 휴식 시간에는 화장실 줄이 얼마나 긴지 공연 시작 전에 못 들어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내가 예매한 좌석은 19열 28석. 무대를 바라보고 중앙에서 오른쪽이었다. 보통은 중앙에서 왼편을 선호하는데, 피아노 독주 무대라 오케스트라 협연 때보다 피아노가 가운데로 올 거라 미리 예상하고 표를 산 건 아니었다. 매진된 좌석 중 운 좋게 가운데 한 자리가 남아 있어 사고 보니 그랬다.


키신의 공연은 공연 며칠 전에 우연히 동네 둥근 광고 기둥을 통해 알았다. 앗, 혹시 저 사람이 내가 듣던 그 피아니스트 키신? 맞았다! 서둘러 공연 사이트에 들어가니 좋은 자리는 예매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표값은 조금 비싼 편인 123,23유로. 평생 키신의 공연을 보면 몇 번을 본단 말인가. 한국에서라면 표 구하기도 쉽지 않을 터라 무리를 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솔직히 키신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자주 듣는데 댓글에 키신이라는 이름이 명되었다. 도대체 어떤 피아니스트일까. 피아노의 신동이라는데. 2세 때 들은 음악을 그 자리에서 피아노로 연주하며 주변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12세 때 러시아 모스크바 공연으로 주목을 받았다는 피아니스트. 1988년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니 신년음악회, 1990년 영국 BBC 프롬스로 데뷔. 1990년 카네기홀 100주년 기념 공연 스타트를 끊었고, 어떤 피아노 콩쿠르에도 나간 적이 없다는 피아니스트, 키신.



키신의 공연 포스터와 뮌헨의 연주회장 가슈타이크 실내 로비.



한국의 팬층도 두터워 보인다. 총 4회 내한 공연을 했는데 전석이 매진. 2018년 3월 마지막 네 번째 공연 때는 2분 만에 전석이 매진되었다 한다. 신동 출신의 그를 거장으로 세운 건 엄청난 연습량과 피아노에 대한 진지한 태도였다고. 실력 있는 자가 성실하게 연습까지 하면 게임 끝 아닌가. 진지한 것도 인정해야겠다. 브로슈어 사진도 그렇고, 연주를 직접 들어도 그랬다. 감동받았다는 말은 못하겠다. 1부에서는 바흐와 모차르트와 드뷔시를 들었는데 솔직히 말해 바흐는 졸렸고, 모차르트도 비슷했다. 반전이라면 드뷔시가 놀랍게도 박력이 넘쳤다는 것. 잠이 달아날 정도. 도끼로 바위를 치듯,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그런 박진감. 오, 피아노의 신동, 천재의 기운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작곡가나 작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들어서 감동이 덜하지 않았나 싶다.


2부는 대망의 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는 괜찮았다. 감동의 물결까지는 아니었어도 졸리지는 않았다. 그림이나 음악이나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리는 건 진리인 듯하다. 그렇다고 실망은 하지 않았다. 이 나이에 마침내 클래식에 입문한 게 어딘가. 오랫동안 클래식을 라디오로만 들어오던 나이롱 애호가였는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들을 만큼 듣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소문에, 키신이 앙코르곡을 많이 연주해 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들리는 바로는 앙코르곡을 너무 많이 연주해서 다 못 듣고 나가는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뮌헨에서는 3번의 앙코르곡을 들려주었다. 곳곳에서 기립 박수가 터졌고, 그 세 곡을 못 참고 나가는 사람들도 있긴 있었다. 당연히 앙코르곡을 제목도 모른 채 들었고, 그런 내가 한심했지만 어쩌겠나.



마르타 아르헤리치 공연 안내 브로슈.



4월에도 뮌헨의 클래식 공연은 계속된다. 코로나 때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던 공연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느낌. 그중에서도 주목을 끄는 공연은 아르헨티나의 마르타 아르헤리치 Martha Argerich. 옥스퍼드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함께다. 그녀 역시 나로서는 이름만 아는 피아니스트다. 41년생으로 올해 나이 만 81세를 넘긴 진짜 거장이다. 아직까지 현역으로 피아노를 친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 196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경이로운 연주 실력과 카리스마로 피아노의 여제라 불린다는데. 이쯤 되면 일단 표부터 사놓고 볼 일 아니겠는가. 남편도 아이도 고개를 가로젓는 바람에 아르헤리치 공연도 혼자 보게 될 것 같다. 이번에도 운 좋게 매진된 좌석 사이에 하나 남은 표를 발견했다(132,70유로). 3살 때 피아노를 시작, 8살 때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0번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데뷔했다는 전설 같은 그녀의 연주를 직접 들을 4월을 기대하고 고대한다. 5월의 조성진 공연(110,50유로)과 함께. 3월 뮌헨의 거리에는 꽃집마다 봄꽃들이 만발하고, 마리엔 플라츠와 빅투알리엔 마켓 사이의 성당 앞에서는 거리의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봄이 오는 소리처럼 맑고 고왔다.


PS. 밤에 명연주로 알려진 아르헤리치와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가 협연한 1982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들었다. 역시 넘사벽. 건반을 칠 때의 힘이 대단해서 1994년 내한 공연 때 줄을 끊어먹은 적이 있다는 일화가 무색하도록 팔뚝 근육이 장난 아니었다. 내친김에, 1978년 뉴욕에서 주빈 메타와 협연한 호로비츠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도 연달아 들었다. 라프마니노프가 생전에 극찬했다는 호로비츠가 75세에 연주한 곡으로 레전드라는 말 밖에는. 그래도 나는 다시 윤찬의 연주로 돌아갈 것이다. 첫 정이란 그런 것이다. 그 덕분에 클래식에 입문했고, 그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를 알았으니까. 참, 호로비츠의 연주 중 내게 깊은 감명을 준 건 1986년 모스크바 연주다. 그의 나이 82세. 미국으로 망명한 지 61년 만에 다시 러시아로 돌아간 노장이 연주하는 스카를라티 곡을 독일에서 TV로 보고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너무 아름다웠다. 정작 공연에서 러시아 청중들을 울린 건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였지만.



뮌헨의 꽃집과 거리의 피아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