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발적 범죄자 콜렉터가 된 건에 대하여.
탈덕은 왜 이리 어려운 건지. 연예인은 왜 이다지도 망나니 같은 놈들이 많은 건지. 누군가의 실수가 바다 건너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냐는 말이다.
이상하게 내가 좋아하기만 하면 꼭 성매매를 한다든지… 여성을 폭행을 한다든지… 음주운전을 한다든지… 인종차별을 한다든지… 그릇된 역사관을 갖고 있다든지… 하는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정녕 이 사고를 저지른 건 내가 아님에도 나는 이들 범죄자보다 더 심적인 고통을 느낀다. 대체 왜, 병크는 니가 쳤는데 내가 슬픈 걸까? 극심한 분노를 맴돌다 결국 슬픔으로 귀결되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최근 당한 병크 경험을 살려 나의 감정 타임라인을 돌아보기로 했다.
※병크: ‘병X+크리티컬’이 합쳐진 신조어로 팬 문화에선 좋아하는 연예인이 루머 혹은 부정적인 사건에 휘말릴 때 사용된다. 방송에서 큰 말실수를 하거나, 사생활에서 비매너적 행동을 보였거나, 사회면에 올라갈 법한 불법을 저질렀을 때 ‘병크 터졌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탈덕: 어떤 분야나 사람에 대하여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그만두다. 脫(벗을 탈)과 덕질을 합친 신조어.
누군가는 연예인의 허황된 이미지를 믿는 것이 바보 같다고 한다. 카메라 뒤에선 온갖 추잡하고 문란한 사생활을 갖고 있을 거라고, 그 숨겨진 단면을 직시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엔 오류가 있다. 우린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겉면만을 보고 판단한다. 아니, 판단을 위해 제공되는 것은 전부 ‘겉면’ 밖에 없다. 사회 생활을 하며 갖게 되는 대외적 이미지, 그건 연예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오히려 연예인은 그 페르소나(사회적 자아)가 극단적으로 부각된 경우다. 겉모습만 보고 호감을 가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자동적인 일이다.
팬들은 왜 내 연예인을 착한 사람, 인성이 좋은 사람이라 믿을까? 외모에 매력을 느껴 시작한 덕질에서 우리는 곧 얼굴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게 된다. 각종 영상/잡지 인터뷰와 SNS에 쓰는 문장, 이모티콘 하나하나까지. 팬들은 자연스레 그들의 언어와 태도, 가치관에 노출된다.
과거의 에피소드, 성장 경험담, 직업정신, 인생의 가치, 도덕적 윤리관, 약자에 대한 태도, 전반적인 말투, 말 할 때의 제스처. 내가 좋아한 이들은 이 모든 부문에서 다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감사할 줄 알고, 젠더 감수성이 트여있는 사람들이었다. 그저 한 명의 사람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사람, 아니 ‘꽤 좋은 사람이구나’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 '바른 태도'를 방대한 분량으로 보고 난 후 호감을 갖게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 병크 소식을 들었을 땐 믿을 수 없었다. 그런 비상식적인 행위를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했을 리 없었던 것이다. 근 이틀 정도 내 감정은 분노, 황당, 소름 그 자체였다. 감정마다 각각의 이유가 따라왔다.
[분노]
그들이 행한 병크의 피해자는 나의 정체성과 맞물렸다. 여성, 아시안, 한국인. 그 가해엔 내가 포함되어 있었고 알고 보니 나는 그들의 혐오대상이었다. 대부분의 팬들이 나와 같은 상황이었으며, 일방적 혐오를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황당]
‘그런 짓 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는데 충격 받았다. 그들의 병크는 본인 입으로 내뱉었던 여러 가치관과 완전히 대립되는 것이었다. 가령 모든 생명권은 존중 받아야 한다고 발언했던 이가 사실 저열한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등의 사례였다.
[섬뜩]
그들은 자신의 팬층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이 여성이며, 아시안, 한국인의 비율이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콘서트 티켓 구매자나 유료 멤버십 구독자, 저서의 해외 판매 부수 등의 수치로 잘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타겟에 맞춰 그 나라 말로 감사인사를 전하는 일도 빈번했다.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그렇게 음습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에 모두가 섬뜩해했다.
나는 자문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장 마음을 접을 수 있나? 덕질을 하면서 행복해했던 순간, 그들에 대한 애정, 내가 들였던 재화와 시간과 수고. 그 모든 것들을 한 번에 버릴 수 있나?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없었고 여전히 좋긴 좋았다. 나는 왜 이런 놈들한테 한 번에 정을 뗄 수 없는 걸까? 가장 크게 솟구쳤던 감정은 바로 자기혐오였다.
그리고 3일 째 되던 날, 묘하게 차분해졌다. 병크를 쳤다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상을 좀 더 침착히 바라보았다. 전날의 폭풍 같은 감정 저변에 깔린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속상함, 안타까움, 슬픔이었다.
[속상함]
이 병크는 영원히 꼬리표가 될 것이고 그들의 커리어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팬이란 누구보다 저들이 잘되길 바라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고된 하락이 속상했다.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노력을 알았기에 마음이 아팠다. 물론 망친 건 저들 스스로지만, 팬심이란 그런 것이기에.
[안타까움]
인간적인 안타까움이었다. 어쩌다 저런 불건전한 사상을 가지게 된 걸까. 자신이 가진 신념이 찬반 가릴 것 없이 절대적으로 나쁜 것이란 걸 왜 모르고 있는 걸까. 특유의 충실함을 왜 저런데 낭비하는 걸까. 그 사실을 평생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란 데서 사적인 연민이 들었다.
[슬픔]
그리고, 궁극적으론 슬펐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해야만 했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 좋아하지 않기. 돈 쓰지 않고(멤버십 구독과 굿즈 사기를 멈추고) 관심 끊기. 새로운 소식과 컨텐츠에 반응하지 않기. 특히 더 이상 응원의 마음을 들지 말아야 한다는 게 괴로웠다. 짧아도 일 년, 길면 십 수 년을 좋아했던 사람을 이날부로 좋아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건 생이별을 하는 것 마냥 슬픈 일이었다.
나는 모든 연예인들이 팬에게 잘해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건 내가 팬이니 나에게 잘해라 라는 말도, 너의 지갑을 채워주는 소비자에게 예를 갖춰라 라는 말도 아니다. 팬들이 주는 그 막대한 애정의 소중함을 알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팬은 모든 것을 지지해준다. 그들이 앞으로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뭘 하든 간에 늘 같은 자리에서 응원해줄 사람들이다. 부모자식 관계가 아니고서야 이토록 대가없는 애정이 있을까 싶다. 남들 다 걸리는 코로나라도 내배우·가수가 걸리면 괜한 걱정에 매일 완치하길 기도를 하는 게 팬이다(나도 구오빠가 신종플루 국내 연예인 감염사례 1호라 울오빠 죽는 줄 알고 벌벌 떨며 열심히 기도했던 과거가 있다). 팬들이 입에 달고 사는 ○○아 행복해, 밥 잘 챙겨 먹어, 잘 자, 괜찮아, 즐거웠으면 됐어 라는 말은 정말로 매번 진심이 담긴 것들이다.
특히 팬이란 최대한의 이해심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그릇된 행동을 하더라도 대체 어떤 게 저들에게 영향을 주었을까. 보육의 부재, 주입식 교육, 잘못된 민족문화, 타인이 해한 트라우마 때문일까. 별별 생각을 다 해 그들을 이해해보려 한다. 그건 그들이 날 때부터 틀어진 ‘아예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 분명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는 마지막 신뢰를 전제로 한다.
모두가 욕할 때 나라도 믿어주자 라는 꿋꿋한 애정은 결국 일정 선을 넘었을 때 배반되어 버린다. 그 선은 일반적 기준에 비해 아주 너그러웠음에도 그 병크의 심각함이 너무 커 윤리적 포용을 하지 못할(해서는 안 될) 정도가 됐을 때 끊어진다.
그러니 연예인들은 셀프병크로 팬을 탈덕 시킬 때, 돈을 불려주는 구매자 몇 명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의 삶을 응원해줬던, 그리고 앞으로도 기꺼이 그 마음을 내줄 수 있었던 ‘편’이 떠나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나의 토로다.
누군가는 연예인에 왜 그렇게 과몰입 하냐며 핀잔주겠지만 사실 이건 꽤 보편적인 감정이다. 당장 스타와 메세지를 주고받는 유료 플랫폼 '버블'의 구독자가 (올해 기준) 200만명을 넘어설 시대에, 문화 컨텐츠와 그 주체가 되는 연예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온 세상에 깔려 있다. 누군가의 팬이란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적어도 수억 명은 될 거란 얘기다. 대중적인 취미를 비난하는 건 당연히 문제가 있다. 대상을 애정하는 마음은 아주 일반적인 것이 되었고 그렇기에 반복될 이 좌절 현상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간만에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거대병크를 당해 충격이 컸다. 고백하건데 사실 완전한 탈덕은 불가할 거란 생각이 든다. 애정을 소멸시키더라도 한때 열혈이 좋아했던 이들에 대한 추억은 남아있을 것 같다. 결국 아련한 기억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도 신경 꺼야지, 꺼야지 하며 내 이성과 윤리 잣대를 최대한으로 가동시켜본다. 덕질… 넘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