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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명희 Nov 04. 2021

[평어 대담] 가까워지고 싶은 우리, 말 놔야 할까?

동등한 소통 원츄


마리는 동등한관계는 말에서 온다고 생각하고, 꼬박꼬박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15년째 존대어로 사회생활 해왔다. 존대어를 통해 얻고 싶었던 것은 동등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었지, 상대를 높여 드리거나, 낮추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더 친밀하고 도움되는 관계로 서로에게 연결될 수 있다라는 취지의 반말, ‘평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었다. ‘아니, 존대어를 평어라고 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상대방이 반말이 더 편할 수 있는데, 내가 존대어를 강요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원했던 것은 동등한 관계였지, 존대어냐 반말이냐라는 형식을 규정짓고 싶은 것은 아니었기에, 이제와 다시 반말로 이루어진 평어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페이스북에 올라온 두 동료의 평어 사용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평어가 동등한 존재로서 대화하게 하고, 우리를 진솔한 관계로 이끈다는 게 요지였다. 같은 회사 동료는 아니었어도, 같은 생각일 것 같은 신뢰가는 동료 둘이었기에 바로 이 둘을 소환해 경험을 들려달라 부탁했다.




대담자1: 이장(양석원) 자유학교 창립자, 사회혁신 스타트업 지원, 2021년 10월 페이스북 글 중

강의 시간에 2학기 정도 학생들과도 (수)평어 실험을 해 보기도 했고, 자유학교도 매번 필수는 아니지만 살아있는 언어로 대화를 하는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수)평어를 쓰는 것을 제안해서 실험하고 있고 지금도 나이와 상관없이 그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평어’라는 새로운 언어체계를 디자인해서 사용하고 있는 디자인학교(디학)의 열다섯의 글쓴이가 글 쓴을 엮은 책 ‘예의있는 반말’을 관심있게 읽었다.


대담자2: 제제(안지혜) 금융업계 회사원, 전 글로벌 스타트업 지원, 2021년 10월 페이스북 글 중

지난 한 주 내내, 강릉 에서 반말로 대화를 하며 친해지는 과정에서 존대어로 문을 연 관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세계가 열렸습니다. 존대어로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고작 반말을 썼다고 열리다니. 실은 존댓말의 잘못이 아닌 발화자인 내 상상력의 한계와 언어의 한계 속에서만 내 세계를 쌓아온 잘못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모더레이터: 마리(이명희) 소셜섹터 종사자, 워크보트 빌더

나는 존대어로 이야기 하는 게 편하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 많은 것 같다. 내가 진짜 원한것은 동등한 관계였으니, 필요하다면 내가 변할 수도 있다. 솔직히 평어사용으로 그게 가능하다면 존대어 사용에 그렇게 목맬 필요가  필요 없지 않나도 싶다. 그런데, 과연 그게 그렇게 효과가 있을까? 서로를 오히려 편하고 가깝게 생각해 실수할 가능성도 높아지지 않나? 여러 의구심이 있다.


“평어는 크게 보면 반말과 비슷하지만, 나이에 상관없이 상대를 호칭할 때 성을 빼고 이름으로만 부르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흔히 우리가 이름 뒤에 붙이는 ‘~야’를 붙이지 않는다. 그래서 디학에서는 선생님이면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성민을 만나면 “성민,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라고 말을 던지고, 그도 “송이, 난 잘 지냈어. 고마워” 하고 받는다.”  [p94, 예의있는 반말]




마리: 비슷한 시기 제제, 이장 두 분의 글을 페이스북에서 보게 되었어요. 두분은 평어사용을 실제로 경험해 오셨고, 지지하신다고 보여요. 왠지 딱 와 닿는 언어로 평어 사용에 대해 이야기 해주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섭외드렸습니다. 흔쾌히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평어를 사용해 오시면서 진짜 인상적이었던 점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제: 먼저 저는 반말쓰는 걸 편해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런데 내가 말을 편하게 함으로써 상대방은 불편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평소에도 많이 의식하는 편이었어요. 특히나 제가 직장 내에서 비중있는 직책을 가지게 되었을 때, 권력관계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나의 반말이 상하관계를 가르게 될 까봐 조심스러웠어요. 페이스북에 제가 평어를 쓴 상황은 마을 강릉 일로오션(@illoocean) 프로젝트 참가자로 가게 된 때였어요. 참가신청서에서부터 나이/ 학력/ 지위 프로필은 비밀이었고, 커뮤니티 안에 평어를 쓰게 될텐데, 괜찮은지를 물었어요. 저는 당연히 오케이(Okay) 했고, 강릉에 처음 도착했을 때 들었던 말이, “오. 제제, 왔어?” 라는 물음이었어요. 평소 같았으면 제가 먼저 반말해서  선 넘을 까봐 고민했을 텐데, 세팅자체가 모두 반말이어서 제가 말을 함에 있어 조심하느라 다른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었어요. 명희샘(마리)이 대담 초대배경에서도 말씀 하셨듯이, 저도 존대어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에 예민해요. 같은 “요”를 붙였어도, “먹어요”와 “드세요”는 다르지요. 또 왜. 있잖아요. 무조건 존대한다는 서비스정신으로 패스트푸드 점에서 “햄버거 나오셨습니다” 막 이러는 경우도 진짜 별로에요. 일로오션 사람들과 함께 하는 동안, 신기하게 상대방이 나를 어느 위치에 놓고 생각하는지 탐색하는 코스트(비용)이 사라진 느낌이었어요.


이장: 저는 원래 명희샘같은 스타일이에요. 그냥 다 존대가 편해요. 그러다가 서울 올라와서 고향친구 동생 한 명과 같이 살게 되었는데, 다른 친구들이 그 사람한테만 반말하니까, 그 사람하고 더 친한것 같다고 다른 친구들이 서운해 하더라구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여전히 존대어가 편했어요. 그러다, 덴마크에서 인생 사는 법을 배우는 학교 ‘폴케이스콜레’에 가게 되었을 때 언어가 우리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 학교에서는 살아 있는 언어를 쓰는 것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노래도 부르고 시도 쓰고, 자기 마음과 생각을 말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중요시 했어요. 한국에 돌아와 폴케이스콜레 같이 자신의 인생을 사는 법을 배우는 학교를 한국에도 만들고 싶어 ‘자유학교’를 만들게 되었어요. 자유학교의 모토가 ‘전환을 위한 안전한 실험실’인데, 어느날 멤버들 사이에서 자유학교 내에서 ‘평어’를 써보는 것이 어떤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자유학교만의 문화를 만들던 때였고, 해보고 아니면 그만해도 되니까 프로그램 운영중에 1-2주 실험으로 평어를 쓰기 시작한 것이 프로그램이 끝난 지금에도 이어지고 있어요. 아마 좋으니까 계속 쓰는 거겠죠. 자유학교에는 20대 부터 50대 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자유학교에서 보면 20살 청년이나 50대 중년이나 ‘어떻게 살아야지?’라는 고민은 결국 똑같이 하는 것 같아요. 서로 평어를 쓰다보니,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 내가 더 어린사람에게 더 도움이 되어야지 하는 무의식적 부담이 없어 지는 것 같아요. 그저 같이 고민하는 같은 인간인 거죠. 얘기하고 보니, 평어를 쓸 때 서로 인간대 인간으로 만나는 것 같아요.


제제: 맞아요. 서로 평어를 쓰면, 내가 좀 더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도, 무언가를 지적받았을 때 권위에 도전받았다는 느낌, 그러니까 나와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위협감도 덜한 것 같아요.


마리: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도 평어를 쓰는데, 아이가 커갈 수록 더 예의 없게 들리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어요. 오히려 존댓말을 가르쳐야하는 것 아닌가? 반말이 존중해서 쓰기 더 어려운 것 같거든요.  예를 들어, 반말로는 "엄마 가위 줘. 엄마가위. 엄마 가위 내놔.”로 이야기 하는데, 존대어를 쓰면,  "엄마 가위주세요"로 순화되는 것 같아요.


제제: 그래도 “가위 내놔요”는 아니잖아요?! 하하.  존대어도 가능하다고 하지만, 존대어 체계에서는 쓸 수 있는 말 없는 말이 나누어 져 있기도 한 것이 존댓말을 쓰기 어려운 점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나이어린사람이 수고하셨다라고 어른에게 말할 수 없는 것 처럼요.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말해야 하는 것 같아요. 존댓말은.


이장: 반말이 더 군더더기가 없는 것 같아요. 빌려드린 ‘예의있는 반말’ 책에서도 얘기하듯이 언어도 프로토콜이라고 생각해요. 프로토콜에는 수반되는 철학이 있구요. 그런 측면에서 저는 시간 정해 놓고 상하관계를 풀어보자 하는 야자는 반대에요. 상하관계가 있지만 잠시 묻어둔 다는 거잖아요. 책에 보면 평어로 쓰는 반말에는 법칙이 있어요. 호칭없이 이름을 부르거나, 별명을 부르고, 서로를 존중하는 말을 하죠. 그런의미에서 ‘야’,  ‘너’라고 상대를 호칭하면서 가족이나 친구사이에 하는 반말은 평어가 아닌 그냥 반말이죠.  

                                                                                                                                         

제제: 아. 저는 언제 부턴가 엄마, 아빠를 미선,법모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미선은 나의 관점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크고, 그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넓히려 노력하는 멋진 엄마에요. 법모는 제가 이름으로 부르기까지 좀 반대가 많았어어요. 그래도 지금은 인정하는 편이에요.


마리: 오이. 왜그랬어요?


제제:  저는 자라면서 정상가족 맥락에서 그려지는 부모의 역할이 사람에게 너무 무거울 수 있겠다는 생각했어요.  저도 엄마, 아빠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지만,  엄마, 아빠를 호칭하면서 대하면 그런 롤(역할)을 더 요구하게 되는 것 같았어요. 엄마 아빠를 그 보다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아빠 법모는 게을러요, 막 낮에도 집에 있고, 바삐 일하지도 않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요. 아빠로서의 롤을 잘 수행하지 못하면서도, 게다가 성격적으로 예민하기도 하고, 그런게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아빠의 특질은 아니잖아요? 아빠라면 이런 역할을 해야할거 같은데, 왠지 아빠라면 밉고 화나고, 싫고 그런 기분이 들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아빠라면 이해가 안되는데, 법모라면 개의치 않게 되더라구요. 좀 더 사람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마리: 오호. 신박하네. 지혜님(제제)은 난 사람임. 제 아이들한테도 제 이름부르라고 해야겠어요. 흐흐. 이미 대화중에서 이야기 하셨던 것 같지만, 한 번 더, 두분은 실제 존댓말, 반말 뭐가 편하세요?


이장: 저는 평어가 편하고 그런것은 아닌것 같아요. 친소가 없는데 평어를 쓰는 것은 이상하고 어색해요. 평어라해도 반말은 TPO(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서 쓰는 게 좋아요. 저는 평어에도, 그러니까 반말에도 폐해가 있는 것 같기는 해요. 특히 가족들 끼리. 가끔 누나나 여동생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제제: 저는 반말이 더 편하긴 한데, 저도 누울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요. 반말은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싶은 까닭에 쓰는 것이기도 해요.  저는 전에 회사에서도 이사something 이었지만 제제라고 부르는 게 상관이 없기도 했어요.  


마리: 그런데 만약 우리 셋끼리는 평어를 쓰는데, 누군가가 우리랑 함께 하게 된다면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까요? 평어쓰는 커뮤니티의 사람들이 다시 존대어를 쓰는 제3자와 만나는 관계에서 배척(경계를 만들지는)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요.


제제: 사람따라 다를 것 같은데, 저같은 성향이면 상관없어요. 제가 그 상황이라면, 그럼 나도 그래도 돼? 먼저 물을 것 같아요.


이장: 저는 그냥 저 편한대로 계속 존대를 할 것 같아요.


마리: 저도 이장님 같은 스타일인데, 그러면서도 소외감을 느낄 거 같아요.  그렇다고, 셋중 둘사이는 반말, 한명에게는 존댓말 오고가는 것도 정신없을 것 같구요.


제제: 그러면 말해야죠. 명희샘.(웃음)


마리: 나도 반말해도 되나요? 너도 말 편하게 해. 이런 말 말씀이죠? 그러면 평어를 쓰는 사이라는 것은 더 친한 느낌이기도 한데, 내가 먼저 그 커뮤니티에 들어가고 싶다는 사인을 주는 것, 왠지 자존심상할 것 같은대요?


제제: 그런 생각하면서 놓치는 기회가 아깝지 않을 까요?


마리: 아. 그렇네요. 역시 똑똑한 사람. 그래야 겠네요. 그런데, 평어를 쓰는 사이라도, 일하는 관계 등 또 돌아와야 하는 언어체계가 있다는 것 불편하지 안나요?


이장: 저는 자유학교 하고 프로젝트 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반말, 존댓말 사람마다 오고가는 것 생각보다 에너지 안들어요. 저는 그냥 왔다갔다 하고 있어요.


제제: 저도 별로 안그런 것 같아요. 제가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단톡방이 있는데, 그 안에 나이가 77, 89, 93년 생인데, 존댓말, 반말이 말 섞여서 오고 가는데 괜찮아요. 저는 그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데 고하를 생각하는 에너지가 전혀 들지 않아요. 그런데, 말씀하신 맥락으로 다른 케이스는 생각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서로 아무런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고 만났던 사람들이 더 장기적이고 일상적인 관계가 생기면서, 지위 고하가 생길 때요. 그 상황에서 마리가 물어보신 내용과 비슷한 고민지점과 어려움이 생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리: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이요?


제제: 예를 들어 A, B, C, D, E가 서로 취미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편하게 만났는데, 함께 일하게 되는 경우를 봤어요. A가 대표로 있는 회사에 B,C,D,E가 일하게 되는 거죠. 같은 커뮤니티의 멤버로  만났지만, A의 회사는 평어를 쓰는 문화가 없거든요. 여전히 이들 사이에서는 평어를 쓰지만,  회사 내에서 책임도 다르고 지위에 따를 영향력도 다른데 서로 평어로 동등하게 의견을 나누는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걸 안좋은 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데, 왠지 그런상황에서 계속 평어를 쓰면 회사대표로서 커뮤니케이션하는데 효율이 안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그게 맞는데,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났으니 효율이 안나는 거요. 회사가 효율 안나는 거를 참기는 참 어려운 거 같아요. 근데 명희샘, 이건 우리가 소셜섹터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연대와 비슷한 것 같아요! 나쁘다는 게 아니고 속력이 안나는 것. 사실 그런데, 효율생각하면 연대하면 안되는 거 같아요. 왜 우리는 연대라는 이름으로 속력을 기대하고, 상대가 갈아 넣어지길 바라게 되는 걸까요?


마리: (웃음) 저도 동의해요. 오기전에 오늘 대담 어떻게 준비하나 하면서 지난 달 글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서서 비슷한 이야기를 페북에 썼는데. 진짜 찌찌뽕.


할일이 많을 때, 열심히 한다해도 나혼자는 자신이 없을 때, 연대와 협력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연대와 협력을 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더 조바심 내고, 힘들게 함께한 다른 사람이 내맘 같지 않은 것에 더 예민해지게 되는 것 같아요.

지난 몇달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나 이외 다른 누군가의 힘과 에너지가 필요할 때 찾아야할 것은 연대와 협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는 agent가 필요한듯.

연대와협력 은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누군가 알아주고,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것 자체만으로도 고맙다고 생각될 때 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요. 결국 연대와 협력을 원하는 우리에겐 먼저 서로 알아주는 여유와 알아만 줘도 고맙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마리, 대담 직전 페이스북글]


마리: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러면 평어는 “학습하는 공간, 그러려고 만난 커뮤니티에서만 쓸수 있는 가상의 것.”이 아닐까요? “예의있는 반말”책에서도 존대어가 편한 어떤 선생님이 그러더라구요.  나는 부캐처럼 평어를 쓰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특수한 상황에서 부캐처럼 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제: 저는 평어를 쓰면서 오는 강점을 알고 있지만 강요 할 생각은 없어요. 그것을 하고(accept), 말고는 자신의 결정인듯해요. 자신이 평어사용이 부담스러우니, 부캐로 시험해보고자 하는 선생님도 좋은 태도신 거 같아요. 어떻게든 시도해 보려고 노력하시는 거잖아요. 제가 평어를 쓰는 환경이 좋다고, 그 선생님을 평어세계로 넘어오시라 채근하고 싶진 않아요. 다만 제 친구라면 가끔 물어 볼 것 같아요.


“Still(여전히) 지금이 편해??”


마리: 와 그말 고마운 말이네요. 물어봐 주는 것.


이장: 그 선생님의 마음은 이해가 가요. 평어를 쓰는게 목표가 아닌데, 굳이 부캐까지 만들어야 하는가 싶긴 해요. 목적은 수평하기 위함인데.


마리: 마지막 그러면 진정 동등하다는 것은 무엇인지? 어떨때 동등함을 느끼세요? 결국 존대어를 쓴것도, 지금 평어를 고민하는 것도 사실 그 맥락이네요.


제제: 제가 처음 회사에사서 정말정말 타이틀 없는 제제 였을때 동료를 만난것과, 회사의 임원 직책을  가진 제제로 동료를 만났을 때, 두 경우 모두 똑같이 제제라 부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불편한 지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더 편하게 이야기 하라고 하고 싶지만, 그건 회사에서 부장님이 오빠라고 부르라는 것과 뭐가 다른가 싶었어요. 나는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눈치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건 어쩔 수 없죠. 남이 나를 그렇게(동등하게) 봐줘야 되는게 아니라, 제가 먼저 저 자신의 직책을 떼고, 표식을 떼고,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내 책임과 해야할 일들을 보면 그게 쉽지않죠. 결국 내 준비가 먼저 인것 같아요.


이장: 동등하다고 하는 것은 공평, 공정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 같아요. 공정한 상황 안에서 자신이 공부 잘하고, 돈잘 번 게 자기 능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공정하다는 착각이라고 마이클샌델이 그랬잖아요.  동등함도 그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다 달라요. 이걸 기계적으로 균형을 맞출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동등함은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죠. 그 인정이 뭐냐면, 서로 똑같은 출발점에 놓을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서로 같은 목표점에 다다를 필요도 없고요. 세상에 진짜 대단한 사람들이 많아요. 아 그럼 저는 그 사람은 능력이 슈페리어(superior) 하구나.하고  끝.해요.  정신승리가 필요하죠. 각기 다른 사람들의 능력에서 가치는 돈이라는 하나의 가치로으로 환산했을 때 엄청 차이가 날 수 있지요. 그렇다고 사람이 동등할 수 없다는 게 아니에요. 하나의 가치로 환산해서 비교할 수 없을 뿐, 그에 상응하는 다른 무언가를 분명 가지고 있을 거에요. 저는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각자의 고유성을 서로 발견해줄 때 동등함을 느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쉽게 동질성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계기로 지연, 학연을 드는 것 같아요. 빨리 같은 것 먼저 찾는 거죠) 상대방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고유성을 발견하고, 고유하다는 것 자체를 가치롭게 생각하는 것, 쉽지 않은 일이에요. 엄청 시간과 노력이 드는 비효율 적인 프로세스에요. 그럼에도 개개인의 고유성이 발견될 수 있는 기회와 상황이 주어질 때, 누군가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해서 하일라이트 해줄 때, 동등함을 느낍니다.


마리: 긴 시간 감사합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컴퓨터를 덮고 수다를 했다. 존댓말이냐 반말이냐는 다시 꺼내지지 않았다. 그시간 우리는 서로의 고유성을 찾고 싶었을까.








(보너스: 대담 현장 사진)


[대담이라기엔 즐거운 수다, 알아가는 재미, 그러나 또 만날 지는 노장담 - 왼쪽: 제제, 오른쪽: 이장, 사진: 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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