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질란테 #살인자ㅇ난감
가장 낮은 곳에서 이뤄지는 복수
사적 제재는 근래 국내 드라마계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키워드 중 하나이다.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복수심'은 원래도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야기 소재였으나, 최근 유행했던 복수물의 양상은 조금 달랐다. 단순히 개인의 해원 판타지를 넘어, 부조리한 시스템을 겨냥하는 사회고발적 성격이 강했다. 주인공은 단지 억울한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보호와 구제를 받지 못한 약자의 대변자로 치환된 것이다. 드라마 <빈센조>, <모범택시>등을 시작으로 이런 특징을 지닌 사적제재와 관련된 드라마들이 등장했는데, 특히 최근에는 주인공이 심판자를 자처하고 악인을 처단하는 ‘자경단’, 즉 비질란테의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 디즈니+ <비질란테>, 넷플릭스 <살인자ㅇ난감>은 대표적으로 새경향을 잘 보여주는 자경단 성격의 다크히어로 사적제재물이라고 생각한다.
사적 제재란, 사회가 약자를 지켜주지 않을 때 스스로 지킬 권리가 있다는 믿음.
'사법 체계'에 대한 불신 정서는 사적제재 판타지물의 씨앗을 틔웠다. 일종의 '정의실현'에 대한 욕망이 장르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기존에는 법원이란 시스템 안에서 정의와 저항을 이야기했다면, 이제는 법대 위에서 내려지는 판결에 대한 울분을 체계 밖에서 표현하는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시청자들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이제 법체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이뤄진다. 실제 <비질란테>와 <살인자ㅇ난감>의 주인공을 살펴보면 기존의 엘리트 법조인 캐릭터가 아닌, 사회 체제 밖에 위치한 캐릭터들이다. <비질란테>의 김지용은 경찰대에 다니고 있으나 아직 학생 신분으로,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 인물이다. <살인자ㅇ난감>의 이탕 역시 꿈 없는 지방대학교 휴학생으로, 우연히 살인을 시작하며 선과 악 사이를 줄타기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드라마는 보다 현실과 맞닿은 ‘정의’를 추구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비질란테>와 <살인자ㅇ난감> 두 작품 속 주인공들이 ‘살인’을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은 사적제재물 내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점이다. 그동안 드라마 주인공이 사회적 용인 기준을 넘는 ‘심각한’ 불법을 저지르지 않은 것은, 하나의 불문율처럼 여겨졌다. 드라마의 주인공이란, 시청자들이 이입하고 선망할 수 있는 대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범택시> <더글로리> <빈센조> 등의 사적제재 드라마들 조차 ‘살인’이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진 것도 그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질란테와 살인자난감의 캐릭터들의 연쇄 살인 행위는 선망과 이입의 대상으로 비치던 주인공들의 사회적 기준이 얼마나 낮아졌는지를 증명하기도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캐릭터의 도덕성이 아닌 어떤 방식으로든 악을 얼마나 ‘통쾌하게’ 응징하느냐에 방점이 찍혀있는 듯하다. 어느새 화려한 ‘정의 구현’ 보다 추악한 ‘범죄 응징’이 더욱 주목받는 키워드가 되었음을 두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은 있다’는 전제?
두 드라마 세계관에 녹아있는 전제는 동일하다. '죽어 마땅한 사람은 있다.'
죽어 마땅한 자는 대부분 누군가에게 끔찍한 폭력을 행사한 자로, 누군가를 폭력으로 죽게 했다면 그 사람도 폭력에서 죽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정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드라마 비질란테의 지용은 자신이 정한 기준에 따라 죽어 마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결정하고, 법 집행에 나선다. '살인자ㅇ난감'의 이탕 또한 살인을 저지른 대상이 악인을 선별한다는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의 보복 방식은 과격할지언정, 현실에서 느끼지 못하는 카타르시스를 부여한다. 현재 사법체계는 ‘죽어 마땅한 사람들’을 '제대로' 처벌하기 위한 기준과 과정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죄가 죄로 다뤄지지 않는’ 현사회의 단면이 켜켜이 쌓이면서 사적제재물은 공감대를 넓힐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적제재물은 사실 하나의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은 곳에 있는 정의를 쫒는 드라마로 여겨진다.
그러나, 단순히 사적제재만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일회성 오락에 그칠 뿐.
‘정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이제 많은 드라마에서 빈번히 다루는 주제가 됐다. 비질란테와 살인자ㅇ난감이 사적제재를 통해 다루는 ‘정의’의 의미는 상당히 극단적인 위치에 있다. 이러한 캐릭터들이 흥행하고 공감받는 것이 얼마나 우리 사회가 병들어있는지를 역으로 생각해 보게도 된다.
이제 단순히 사적제재를 통해 악인을 ‘응징’하는데 그치는 것은 안일하다. 그런 맥락에서 비질란테와 살인자ㅇ난감은 기존 사적제재물의 장르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나쁜 놈을 나쁜 놈이 처단한다’라는 다크히어로물의 카피에 끝나지 않고, 사적제재가 정답이 아니라면, 사회는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주인공을 단순히 영웅화하지 않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비질란테 지용이 결국 권력의 꼭대기에 있는 짭질란테와 손을 잡는다거나, 사적제재의 명제를 뒤집어 ‘살인을 저질러보니 나쁜 놈!’이라는 상황을 통해 개인이 사회에 맞서 악을 처단하는 행위에 대해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사적제재, 다크히어로 등의 피카레스크물 흥행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다크히어로의 역할을 하는 유튜버들이 sns상에서 영웅시되는 것을 보면, 정당한 처벌에 대한 대중의 갈증은 여전하다. 사적제재물이 올바른 정의가 다시 설립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제일 좋겠지만, 실제 현실에서 '사적제재'의 탈을 쓰고 일어나는 각종 기행을 보면 이 소재 사용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앞으로의 콘텐츠들은 그 방향이 사적제재를 재현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법의 구멍을 보여주고 새로운 정의의 방향을 의논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