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기반 도시설계의 회복을 위하여
감정 기반 도시설계의 회복을 위하여
처음 세종시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차를 타고 진입한 도시는 정갈했다.
차량의 속도를 자연스럽게 늦추는 라운드어바웃,
세련되게 포장된 수변 산책로,
유리 벽면이 번듯한 상가 건물들.
표면만 본다면 완성도 높은 도시였다.
그러나 걸음을 옮길수록 의문이 생겼다.
수변 공간을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상가마다 '임대 문의'가 붙어 있었으며,
그 조용함은 단순한 평일 낮의 한산함이 아니라
정서가 머물지 못하는 도시의 구조적 공허함에 가까웠다.
그곳은 어딘가와 너무 닮아 있었고,
그래서 더 이상 ‘세종’일 필요조차 없어 보였다.
나는 공간 안에 있었지만, 장소 안에는 없었다.
“도시는 지도로 완성되지 않는다. 기억으로 완성된다.”
이 말은 도시를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수많은 신도시를 걸어보면,
이 문장은 허공에 머무른다.
도로는 반듯하고, 건물은 새것이며, 계획은 철저하다.
그러나 거리에는 일상의 리듬이 흐르지 않고,
상점은 비어 있으며, 삶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 침묵은 단순히 경기 침체나 소비 위축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마주한 것은, 형태는 있지만 감각이 없는 도시들이다.
사람이 살기 전에 지어진 공간이, 오히려 사람을 밀어내는 구조.
도시는 본래, 사람들이 머물고 돌아오며 관계를 맺는 ‘느린 시간’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도시는 도시가 아니라 상품에 가깝다.
속도를 위해 계획되고, 분양을 위해 설계되며,
체류가 아닌 거래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는 완성되어 있지만,
살아지지 않는다.
“We do not simply live in places—we live through them.”
— Edward Casey, Getting Back into Place
한국의 신도시는 역방향으로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걷는 길, 동네의 중심, 일상의 패턴이 차츰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건물부터 짓고 나서 생활을 기대하는 구조다.
아파트가 세워지고, 중심 상가가 배치되고, 그 사이에 사람의 삶이 나중에 끼워 맞춰지길 바란다.
하지만 도시적 삶은 미리 짜여진 동선에 억지로 흐르지 않는다. 인간의 일상은 즉흥적이고, 감정은 반복 속에서 안정되고, 장소와의 관계는 스스로 경험한 이야기 속에서 형성된다.
지각심리학자 제임스 깁슨은 환경이 우리에게 말없이 제안하는 ‘행동 가능성(affordance)’이 공간 경험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도시는 그 가능성을 닫아둔다.
너무 반듯하고, 너무 정돈되어 있고, 너무 완성되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 공간을 통과하지만 머무르지 않는다. 점포는 문을 열지만 손님은 들르지 않고, 아이들은 놀이터가 아닌 거실에 머무르고, 주민은 아는 얼굴 없이 엘리베이터를 오른다. 도시의 외형은 있지만, 장소성이 자라날 여백이 없다.
심리학적으로도 이런 환경은 장소 애착(place attachment) 형성을 방해한다. 애착은 무언가에 정서적으로 '익숙해지고, 반복하고, 기억하며' 형성되는 관계다.
그러나 완성된 도시에서 그 관계는 시작될 틈조차 얻지 못한다.
“Places are not simply physical settings. They are lived, remembered, and emotionally invested.”
— Yi-Fu Tuan, Space and Place
신도시의 상업 공간은 대부분 철저하게 계산된 구조로 배치된다. 상가는 아파트 단지의 1층에 정렬되고, 중심상가몰은 주차장 중심으로 둘러앉는다. 설계 도면상으론 이상적이다.
하지만 그 도면엔 ‘우연히 걷다 들르는 가게’, ‘이웃을 마주치는 좁은 골목’, ‘의도 없이 앉을 수 있는 자리’ 같은 요소는 없다.
이러한 도시 공간은 거주와 소비를 하나의 거래로 통합하려 한다. 건설사와 시행사는 상가를 분양 상품으로 만들고, 분양이 끝나면 그 공간의 의미는 끝난다.
남겨진 상인은 텅 빈 거리에 커튼을 걷고, 바깥을 본다. 그리고 묻는다.
“왜 아무도 오지 않는 걸까?”
문제는 단순한 상권 침체가 아니다. 이 도시에서는 사람과 공간 사이에 감정이 통하지 않는다.
길은 넓지만 방향이 없고, 가게는 있지만 이야기의 주인이 없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단지 기능을 수행한다. 소비자, 임차인, 거주자로만 존재할 뿐, 주인이 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환경적 친밀성(environmental familiarity)'과 '행동 주체성(agentic behavior)'은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익숙한 장소에서 더 느긋하게 걷고, 더 많이 웃으며, 더 자주 돌아온다. 그러나 신도시에서 그런 익숙함은 애초에 설계되지 않았다.
공간이 기억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그곳에 감정을 저장할 수 없다.
공실률은 단지 경제 지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 도시에 정서적으로 실패하고 있다는 집단적 신호다.
아무리 건물이 새로워도, 살고 싶지 않다는 감정은 결국 행동으로 이어진다.
사람은 머무르지 않고, 거리는 썰렁해지고, 도시의 체온은 서서히 내려간다.
“Environmental familiarity reduces anxiety and builds attachment. Unfamiliarity breeds withdrawal.”
— Amos Rapoport, The Meaning of the Built Environment
서울의 을지로, 대구의 교동, 목포의 원도심, 그리고 부산의 보수동과 초량, 범일동.
이곳들에는 낡고 비좁은 골목이 있지만, 그 사이엔 여전히 사람이 살아 있고, 시간이 머물러 있다.
문구점 유리창에 비친 누렇게 바랜 종이 전단, 같은 자리에 앉아 도토리묵을 파는 할머니,
작은 간판 하나 없이 계속되는 장사의 리듬.
이런 장소는 오늘날 ‘도시계획’이라는 말 아래서는 종종 무질서로 분류되지만,
사실은 도시에서 가장 질서 있게 쌓인 감정과 기억의 레이어다.
이런 장소들은 시민들의 일상 안에 깊이 스며든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장소 애착(place attachment)이라 부른다.
자주 머물고, 반복적으로 관계 맺으며, 익숙함을 쌓아가며 형성되는 정서적 유대.
도시는 그런 유대 속에서 공간이 ‘나의 것’이 되는 과정을 통해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토록 정서적이고 사람에 가까운 도시들이
지금 한국의 개발 구조 안에서는 점점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사람들이 애정을 갖고 살아온 도시는 정책의 관심 밖에 놓이는가?
구도심은 권리관계가 복잡하고, 토지 소유가 분산되어 있으며,
조합 구성부터 이익 배분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불확실하다.
행정은 이러한 ‘느린 복잡성’을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신도시는 다르다.
대규모 택지를 국가나 공공이 주도해 정리하고,
개발사업자가 일사천리로 진행하며, 성과는 빠르게 수치화된다.
속도와 예측 가능성을 선호하는 제도 구조와 완벽히 호환되는 방식이다.
부산 역시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 초량 이바구길, 범일동의 오래된 시장들은
삶의 층위가 깊이 쌓여 있는 공간이지만, 개발에서 뒤처지고 방치된다.
반면, 전포동 카페거리는 본래 임대료가 저렴하고 비어 있던 공간에
몇몇 독립 카페와 소상공인이 들어서며 자연스레 정서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시가 그 ‘성공’을 인지한 순간, 상황은 바뀌었다.
전포동은 브랜딩되고, 디자인되고, ‘거리’가 되었고,
결국 임대료가 오르며 원래의 분위기는 빠르게 소멸되었다.
사람이 만든 감정의 공간은, 제도가 흉내 내는 순간 정지된다.
삶을 품은 도시가 개발 대상에서 탈락하고,
살아본 적 없는 신도시가 상품으로 거래된다.
결국 우리는 익숙함을 느끼는 공간을 밀어내고,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살기를 강요받는다.
이 도시의 미래가 문제인 이유는 단지 노후화 때문이 아니다.
정서적 기억이 있는 공간이 자꾸만 지워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다.
도시는 지형보다 기억으로 먼저 사라진다.
“Place attachment is rooted in repeated rituals, bodily routines, and shared history.”
— Setha Low, On the Plaza: The Politics of Public Space and Culture
어느 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낡은 공장 건물에 카페가 들어서고, 창고에 작은 전시공간이 열리고,
인근 소규모 제조업체들과 엉성하게 공존하던 골목이
갑자기 ‘성수동’이라는 이름 아래 유행의 전선에 등장했다.
서울 성수동, 그리고 부산 전포동.
이 두 곳은 본래 계획된 문화지구도, 행정의 성과도 아니었다.
임대료가 낮고, 간섭이 덜하며, 규제가 느슨했던 공간이기에
젊은 창작자와 소상공인들이 조심스레 자리를 틀 수 있었고,
그 결과 사람들의 감정이 스며드는 도시적 밀도가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이 도시적 생명력은, ‘성공 사례’로 주목되는 순간부터 위기를 맞는다.
지자체는 뒤늦게 이를 모방하기 시작한다.
“○○의 성수동”, “○○형 문화 골목”, “힙지로 프로젝트” 같은 사업이 전국 곳곳에서 등장하고,
디자인은 정교해졌지만, 감정은 거세된다.
성공의 형식은 복제되었지만,
그 성공을 가능케 한 느슨함, 실패의 여지, 우연의 속도는 복제되지 않았다.
결국 공간은 ‘예쁘지만 낯선 곳’, ‘찍고 갈 뿐 머무르지 않는 곳’이 된다.
사람들은 그 거리를 지나가면서 “여기 어디서 본 것 같다”고 느끼고,
그다음에는 다시 오지 않는다.
심리적으로 볼 때, 이런 공간은 감정적 진입이 허용되지 않는 구조를 가진다.
사용자가 자율적으로 공간을 구성하거나, 흔적을 남기거나, 실험할 수 있는 틈이 없다.
사람이 거기 존재할 수는 있어도,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은 되지 못한다.
게다가 이 복제의 논리는 원래 공간의 감정도 파괴한다.
성수동은 빠르게 고급화되었고,
임대료는 올랐고, 원래 공간을 만든 사람들이 밀려났다.
‘사람들이 만든 동네’는
‘그 사람들을 밀어낸 동네’가 되어버렸다.
도시는 복제될 수 없다.
도시는 감정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따라 할 수 있어도, 누적된 습관과 우연한 발견,
그리고 정서적 주인의식은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책은 여전히 복제를 선호한다.
왜냐하면 복제는 빠르고, 눈에 보이며, 수치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표면만 살아 있는 도시를 양산할 뿐이다.
형식은 정교해지고, 감정은 얇아지고,
우리는 다시 똑같은 실패의 거리를 걷는다.
“Culture cannot be installed. It must be lived into.”
— Richard Sennett, The Uses of Disorder
도시는 수치로 만들어질 수 없다.
우리가 진짜로 기억하는 장소는 면적도, 설계도, 완공률도 남지 않는다.
대신 떠오르는 것은 벤치 끝에서 나눴던 대화, 골목 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
늘 그 시간에 불이 켜지는 가게의 안온함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지금의 도시계획은,
바로 그런 ‘느껴지는 것들’을 철저히 배제한다.
모든 것을 선형적으로 배치하고, 미래를 미리 규정하며,
공간의 감정을 지우고 구조만 남긴다.
그러나 삶은 설계도를 따라 흘러가지 않는다.
도시를 계획한다는 것은, 사실 사람이 어떻게 공간과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철학적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도시는 단지 교통과 상업의 공간이 아니라,
기억이 스며들고 감정이 남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건축가도, 도시 디자이너도, 정책가도 이제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이 공간에서 사람은 머물 수 있을까?”,
“이 골목에 우연히 앉아볼 수 있을까?”,
“이 도시의 리듬은 인간의 속도와 맞닿아 있는가?”
공간은 절대 먼저 완성되어서는 안 된다.
먼저 완성된 공간은 사람을 초대하지 않는다.
진짜 도시는 사람의 흔적이 그 공간을 바꾸고,
시간이 켜켜이 쌓이며, 점차적으로 스스로를 완성해간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계획이 아니다.
오히려 더 느슨한 구조, 더 많은 여백,
그리고 사람들에게 선택권과 실패의 권리를 주는 도시다.
디자이너가 만들지 않은 공간도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디자인은 계획이 아니라 관계의 가능성이 되어야 한다.
도시란 결국, 누가 남고, 누가 다시 돌아오는가로 결정된다.
“Design is not about control. It is about creating conditions for life to happen.”
— Jan Gehl, Cities for People
도시는 완공되었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다시 돌아오고, 또 머물고, 반복해서 그 길을 걸을 때,
비로소 도시가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지금 한국의 많은 도시들은 완벽하게 설계되고, 신속하게 건설되지만,
그 안엔 기다림이 없고, 틈이 없고,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살 수는 있지만 살고 싶지 않고,
걷기는 하지만 멈추고 싶지 않은 거리들.
그것이 지금의 도시가 가진 ‘완성의 역설’이다.
우리는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도시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안에 실패와 실수와 우연이 들어올 수 있어야 하며,
감정이 머무를 수 있는 틈이 열려 있어야 한다.
완벽한 도시는 없다.
그러나 기억이 쌓이는 도시,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남는 도시,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드는 도시는 있다.
그리고 그런 도시는
누군가의 속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감정이 완성한다.
“Cities have the capability of providing something for everybody, only because, and only when, they are created by everybody.”
“도시는 모두를 위한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다. 단, 모두가 그 도시를 함께 만들 때만.”
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 (1961) - Jane Jacobs
“A city ought to be an open system, one that allows residents to shape it, rather than a closed, finished product.”
“도시는 닫힌 완성물이 아니라, 거주자들이 끊임없이 만들어갈 수 있는 열린 체계여야 한다.”
Building and Dwelling: Ethics for the City (2018) - Richard Sennett
“First we shape the cities — then they shape us.”
“우리는 도시를 만들고, 그 도시는 다시 우리를 만든다.”
Cities for People (2010) - Jan Gehl
“Modernist planning aimed to remake society by remaking space. But what it often produced was alienation.”
“모더니스트 도시계획은 공간을 바꿈으로써 사회를 바꾸려 했지만, 종종 소외를 낳았다.”
The Modernist City (1989) - James Holst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