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대안 가족'에 천착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결핍 상태에 있으며, 온전하지 못한 시간을 살아왔다. 그들의 불완전한 상황은 현대인이 겪는 '불안'과 같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말처럼, 개인이 놓인 상황을 불안으로 내모는 건 개인의 의지가 아닌, 현대를 만든 인류의 집단 의지다. 개인은 이런 집단 의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사회'라는 틀 안에 종속되거나 지배당한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런 사회의 구조를 보여주지 않고, 개인들의 삶을 통해 그들이 갇혀 있는, 억압의 틀을 보도록 한다. 소영의 경우, 그는 어린 나이에 '성'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다. 소영의 가족 이야기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데, 소영에게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즉, 생물학적 부모는 있었으나, 그 부모가 '가족'이자 '부모'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음을 소영의 처지를 보면서 관객은 알게 된다.
그건 동수도 마찬가지다. 동수는 '꼭 데리러올께'라고 메모를 남긴 엄마를 기다리며 보육원에서 성장한다. 그는 입양을 거부하며 끝까지 엄마가 나타나길 기다렸지만, 엄마가 자기를 버렸다는 걸 깨닫고, 마음 깊이 절망한 상태였으나, 소영을 만나고, 소영이가 아들 우성이를 버렸다 다시 찾으러 온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누그러진다.
상현 역시 가족이 있으나 온전하지 않은 불완전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내와 이혼했고, 어린 딸을 두고 있다. 그는 세탁소를 운영하지만 현재 사채빚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고 있으며, 돈을 벌려고 영아 매매라는 범죄를 저지르나, 인간성이 황폐한 말종은 아니다. 오히려 유사 가족인 이들 사이에서 우성이를 씻기고, 먹이고, 아픈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받게 하는 '엄마'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상현의 모습을 통해 소영은 부모에게 받지 못한 위로와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고레에다 감독 작품의 특징은 '착한 영화'인데, 등장 인물이 사회에서 용인하지 않는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위반해도 그들의 인간성까지 망가지지 않은 걸 보여준다. 오히려 그들이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피를 나누지 않은 타인들이 정서적 유대와 감정적 연대를 통해 '가족'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따뜻하고 감동 있는 영화라서 좋지만, 극적 긴장감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이 작품에서도 영화를 다 본 다음, 주인공의 행동과 심리가 상식과 어긋나는 느낌이 든다. 그것이 시나리오의 한계인지, 인물을 해석하는데 실패한 것인지는 감독만이 알겠지만, 내 기준으로 인물의 모순된 행동을 살펴보면 이렇다.
첫 장면에서 깊은 밤, 소영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천천히 언덕을 올라 베이비 박스가 설치된 교회 앞에 도착할 때, 소영의 태도는 너무 침착해서 관객은 소영의 현재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뒷부분에서 밝혀지듯, 소영은 아이(우성)의 친부를 살해하고 아이를 데리고 나와 베이비 박스 앞에 아이를 내려 놓는다. 상식으로 보면, 어린 여성이, 그것도 자기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를 살해한 직후에 이렇게 담담하게 행동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소영은 불안과 두려움, 공포 같은 감정으로 격렬하게 반응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꼭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아닐지라도 그의 내면이 심상치 않다는 걸 관객이 알아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반응은 상현도 비슷하다. 상현은 동수를 꾀어 동수가 야간 당직을 설 때 베이비 박스에 들어오는 아기를 빼돌려 아이를 찾는 사람에게 돈을 받고 넘긴다. 엄연한 불법이지만 상현이 이런 일을 하는 건 오로지 돈 때문이다. 상현이 소영에게 사실을 말하고, 함께 아이를 매매하러 다니는 장면은 비극의 희화다. 소영이 경찰에 고발하는 게 두려워서 소영과 아이 판 돈을 나누자고 제안한 것도 그렇고, 누군가 버린 아이에게 '좋은 부모'를 만나게 해주는 '삼신 아저씨'라고 자신을 포장하는 걸 보면 상현은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로 보인다.
상현은 오히려 소영의 아이, 우성이를 돌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서로 다른 생각과 목적을 가진 네 명(갓난아이 우성은 빼야 한다)이 우성이를 중심으로 '대안 가족'으로 결합하는 과정은 고레에다 감독이 이전 작품들에서도 꾸준히 추구한 주제다.
이 영화는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는 가족 영화로 보이지만, 본질에서는 '여성 영화'다. 그것도 '모성'에 관한 영화다. 소영이 아이(우성)를 교회 앞에 버리고 떠났을 때, 아이를 베이비 박스 안에 넣어준 사람은 수진이다. 영아 매매범을 잡으려는 형사로, 그가 우성을 베이비 박스 안에 넣은 건 상현이 반응하도록 하는 의도였으나, 한편으로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어서였다. 이 두 반응은 수진에게 자연스러운 심리여서 구분하기 어렵다.
아이를 버렸다 다시 찾으러 온 소영은 아이를 찾으러 온 이유를 분명히 말하지 못한다. 소영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지만, 본능에서 아이를 이렇게 버려서는 안 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목소리가 '모성'일 수 있지만, 그보다 오히려 '양심'이라고 말하는 게 합리적이다.
상현이 아이(우성)를 돌보는 장면은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나온다. 상현은 아이를 돌보는 모습이 능숙하다. 이미 많은 아이를 돌본 경험이 있고, 그가 비록 영아 매매를 하는 범죄자이긴해도 아이를 단지 '상품'으로만 여기지 않는다는 건 영화 전체를 통해 드러난다. 상현은 남성이지만, '모성'을 내재한 인물이다. 그는 아이(우성)의 엄마인 소영에게 '엄마'의 역할을 대리하며, '엄마'의 존재를 대신한다. 소영은 어쩌면 '엄마'가 없었을 수 있다.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최형사가 피해자와 함께 있던 여성(소영)을 추적하다 찾은 집에서 가출한 여러 명의 청소년을 발견했고, 소영 역시 그런 아이 가운데 하나였음이 드러난다. 이때 가출 청소년들이 생활하는 그 집에는 '엄마'가 있었지만, 그 엄마는 아이를 돌보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를 착취해서 돈을 버는 '가짜 엄마'라는 현실에서, 소영은 일찌기 엄마의 부재를 인지한 불행한 여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가 결정적으로 '여성 영화'라는 증거는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난다. 상현과 소영을 추적하는 수진은 소영의 부탁을 들어주고, 윤씨 부부 역시 수진과 소영의 부탁을 들어준다. 즉, 여성들은 한 아이(우성)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아무런 연고도, 이익도 없는 일을 흔쾌히 맡는데, 이건 여성의 연대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다.
앞에서 고레에다 감독이 '착한 영화'를 만든다고 했으나, 그가 다루는 서사는 비극적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자식을 버리고 사라진 엄마와 그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이야기며, '걸어도 걸어도'는 사고로 죽은 어린 장남의 기일에 모인 가족 이야기이고,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이혼한 부모와 아버지와 어머니 아래 떨어져 자라는 아이의 이야기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조산원에서 바뀐 친자식과 만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이고,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장례식과 이복동생에 관한 이야기, '태풍이 지나가고'는 이혼한 부부의 이야기, '어느 가족'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는 '유사 가족', '대안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처음부터 불행하거나, 어느 순간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불행을 일부러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테니, 그들에게 불행은 운명처럼 주어졌거나, 잘못한 선택으로 불행한 삶이 된 경우다. '브로커'에서 상현이 그런 인물이다. 그는 세탁소를 하고 있지만 사채빚에 시달리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선택한 도박 때문이다. 그가 이혼 당한 것도, 그가 영아 매매를 선택한 것도 모두 그가 도박에서 벗어나지 못해 발생한 일이니, 그에게 불행은 스스로 불러들인 운명이다.
소영, 동수의 경우는 '아무도 모른다'의 주인공이 성장하면서 겪을 수 있는 상황처럼 보인다. 어려서 버림받은 아이들이 마치 들개처럼 사회를 떠돌며 생존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비극의 상황을 이들도 겪는다. 불행한 인물들이 겪는 비극적 상황 안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아무리 따뜻하게 그려봐야 현실은 나아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 이 지점이 영화 속 인물이 부닥치는 구조적 한계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들, 등장인물이 놓인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고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 대부분이 열린 결말로 끝나는 이유는 '영화 언어'를 구사하는 그의 특징이면서, 그가 관객을 향해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감독 자신도 인물들이 커다란 사건을 겪은 다음, 어떻게 살아갈지 알지 못한다. 인물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그건 감독의 바람일 뿐, 인물들 앞에 놓인 (작품 속)현실은 여전히 녹록치 않고, 세상은 정글처럼 복잡하고, 약육강식의 법칙이 살아 있는 무서운 곳이다. 감독은 인물들을 현실에 던져 놓고,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뿐, 간섭하지 않는다.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이 살아가는 일상과 그들의 과거, 그들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비극의 상황을 보고, 그럼에도 그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인생의 깊은 터널, 폭풍우를 뚫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응원하게 된다.
고레에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건 어쩌면, 인간은 누구나 같다, 행복한 사람이나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이나 그들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아닐까. 개인이 겪는 불행이 그가 모든 걸 잘못해서가 아니고, 그에게 전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불행이 닥치기도 하고, 행복한 사람의 이야기보다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에 더 많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감독은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리나'에서 말하고 있다. 고레에다 감독이 그리고 있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한' 개인의 이야기다. 불행한 개인들이 모이고, 이들이 '유사 가족' 또는 '대안 가족'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불행한 개인이 겪었던 트라우마가 조금씩 완화되는 과정이 있거나, 그런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암울한 미래만 보여주기도 한다.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소영은 여전히 어린데, 그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까. 부모 없이 자란 동수나 해진의 미래는 어떨까. 그들의 현재는 암울하고 힘겹다. 상식으로 보면 그들의 미래도 그리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런 현실을 보여주며, 관객이 주인공들의 마음을 잠깐이라도 읽어주기를 바란다. 세상에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들도 당신(관객)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힘들고 괴로운 현실을 살아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지 않느냐고.
작품의 완성도로만 본다면 고레에다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비교해 이 작품은 최고의 작품은 아니다. 주제의 일관성, 인물의 비극성, 열린 결말 같은 감독의 정체성은 확인할 수 있으나 인물들이 보여주는 인과의 개연성이 조금 부족하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고레에다 감독이 일본 사회를 통해 만든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 세계관으로 그동안 일본에서 만든 여러 편의 영화에서는 일본의 현실과 인물을 합리적으로 그렸으나, 한국 배우들과 한국의 현실을 그린 이 작품에서는 고레에다 감독의 세계관이 어딘가 약간 어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어색함의 원인은 일본과 한국 사회가 그만큼 다르다는 뜻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보편적 인간의 삶을 그린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보편적 인간의 유형이 일본에서는 '상식'으로 보여도, 한국을 비롯한 다른 사회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황금종려상을 받은 '어느 가족'의 경우, 고레에다 감독의 의도와 다르게 일본 사회에서도 '불행하고 어두운 이야기'를 그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개인의 불행을 겉으로 드러내는 걸 꺼리는 일본 사회에서 고레에다 감독은 '상식'을 말하는 감독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상식'은 다른 나라에서 온전히 이해할 뿐.
어느 날 사라진 부모와 남겨진 아이들이나, 베이비 박스에 자기 아이를 놓고 가야 하는 부모라면 평범하지 않을 걸 사람들은 안다. 그들의 삶에 닥친 어려움과 고통, 슬픔, 외로움, 괴로움은 평범하게 성장하고, 살아온 사람은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동수'나 '소영'은 여전히 살아간다. 관객이 느끼는 건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과 동수나 소영의 내면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영화의 서사를 통해 변하는 인물의 감정, 내면의 표정, 마음의 변화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결국 관객이 끝까지 마음에 담게 되는 느낌과 감정도 영화 속 인물이 드러내는 감정이며, 인물의 감정을 통해 그 인물이 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기쁨, 행복의 감정보다는 슬픔, 외로움의 감정이 훨씬 오래 남는다. 그건 결핍에서 오기 때문이다. 결핍은 개인이 사회적 동물임을 증명하며,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음을 의미한다. 가족은 혈연이고, 본능에서 서로를 보호하는 존재다. 가족 사이에서 개인은 안심하고 평온한 삶을 누린다. 가족을 일찍 잃거나, 해체되어 연결하지 못하는 개인은 그래서 근원적으로 불행하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런 해체된 개인의 불행-외로움, 슬픔, 두려움-을 찬찬히 개인의 삶을 통해 들여다본다. 소영과 동수는 관객에게 '잃어버린 가족'이 되고, 그들의 처지와 감정이 자연스럽게 '나(관객)'에게 전달, 이입한다. 슬픔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는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은 그렇게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