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진담을 말하다_011
천규석을 읽는다
천규석은 농부다. 우리나라에 이제 약 300만 명도 안 되는, 인구의 6%에 불과한 ‘농부’ 가운데 한 명이다. 한국의 농부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고, 가장 노령화된 집단이기도 하다. 농가 인구의 고령화는 31.8%로 우리나라 평균인 11.3%에 비하면 무려 세 배가 높다.
천규석은 늙은 농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급진적이며 단호하고 날카롭다. 그의 주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몽상가’, ‘비현실주의자’, ‘정신나간 늙은이’로 매도한다. 천규석의 선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도 그를 ‘이상주의자’라고 부르는 데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천규석은 비타협적이며 논쟁적인 인물이다.
천규석은 오래 전부터 한국의 농업이 살 길에 대해 부르짖었지만, 그것은 광야에서 외치는 외로운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농민은 줄어들고, 늙었으며,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농업이 살아남기 위해 기업농, 대규모 영농 복합단지, 단위 면적 당 생산을 늘리기 위한 화학비료와 농약의 사용, 단일 작물의 대량 생산, 공장 방식의 작물 재배, 유전자 변형 등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변해가는 것에 대해 천규석은 격렬하게 반대한다.
천규석의 급진적이고 격렬한 주장을 뒤집어 생각하면, 반자본, 반경쟁, 반도시, 반물질주의다.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자본주의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전복적인 주장이며, 자본주의를 극복해야만 가능한 또 다른 사회의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천규석의 주장은 자본주의에서 태어난 노동운동의 한계조차도 뛰어넘는 급진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편협하고 근시안적인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에 대한 강력한 질타이기도 하다.
6%의 사람들에게도 읽히지 않는 천규석의 주장이 왜 옳으며, 지금 우리가 천규석을 읽지 않으면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게 될 지를 그의 저작을 통해 알아보자.
천규석은 현재 일곱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땅덩이와 밥상 [창작과비평]
땅 사랑 당신 사랑 [명경]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실천문학]
쌀과 민주주의 [녹색평론]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실천문학]
소농 버리고 가는 진보는 십리도 못 가 발병 난다 [실천문학]
윤리적 소비 [실천문학]
천규석은 일관되게 한국의 농업을 비판한다. 그것은 잘못된 정부의 정책일 때도 있고, 농사를 짓는 농민들일 때도 있다. 현재 한국의 농업은 법, 제도, 정책, 행정, 농사 기술, 농사를 짓는 농민의 생각 등 모든 면에서 잘못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알만한 사람들은 한국의 농업이 피폐해지는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고 있다. 한국 농업은 구조적인 문제이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부분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농업과 농민을 희생시키며 추진된 ‘근대화’라는 것은 천규석의 주장대로 전면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비판만 한다면, 많은 학자들이 하듯 그도 한 명의 비판적 이론가에 머물 뿐이다. 하지만 천규석은 대학을 마치고 고향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는 명망가도 아니고, 활동가도 아니며, 지식인연 하지도 않는다.
그는 농사를 지으며, 한국의 농업과 농민의 삶과, 농사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체제와 정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시작했다. 그의 말은 곧 그의 삶이며, 그의 몸짓은 곧 그의 언어이다.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시골에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농사와 농민을 가까이 하게 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시골에서 살며 알게 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농민들은 소위 ‘관행농’이라는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70년대 이후 농기계의 도입,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면서 생산량이 늘어나는 것을 경험한 농민들은 당연하게 화학비료를 논밭에 퍼붓고, 제초제와 농약을 살포하는 것이 농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양평 지역은 그나마 농약과 비료를 쏟아 붓는 관행농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 곳임에도 유기농 인증을 받지 않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유기농 인증은 각종 농약 사용을 3년 이상 사용하지 않은 땅의 토질을 검사해 합격해야만 받을 수 있는데, 여기에도 여전히 문제는 있다.
유기농 인증을 받은 농가에는 혜택이 많이 돌아가므로 군청과 농업기술센터에서는 농민에게 유기농 인증을 받으라고 권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농민은 자신들이 먹는 농산물에는 농약을 치지 않거나 어쩔 수 없이 농약을 치더라도 최소한으로 줄인다. 따로 유기농 인증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급형 농사를 짓는 소농의 경우, 한 해 먹고 남은 농산물을 알음알음으로 팔아 가용으로 쓰는데, 이들에게 유기농이란 의미가 없다. 쌀농사는 우렁이 농법(이 농법에 대해서도 천규석은 날카롭게 지적한다)으로 하고, 밭농사는 주로 고추, 마늘, 깨, 콩 등인데, 농약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고추의 경우는 농약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소출을 위해 몇 차례의 농약을 뿌리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쉽게 ‘유기농’을 말하지만, 천규석의 기준으로 볼 때 한국에서의 ‘유기농’은 대부분 거짓이다. ‘유기농’을 한다면서 비닐하우스에서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은 오직 천규석 뿐이다.
어느 지역을 가 봐도 유기농을 한다면서 비닐하우스에서 밭작물을 재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지역 또한 마찬가지다. 심지어 유기농을 몇 십 년째 하고 있는 농민도 비닐하우스에서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밭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매도하긴 어려운 부분이 있다. 농사지을 땅이 좁아서 단위 당 소출을 많이 생산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수도 있고, 특수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변명들이 모두 구차하게 들리는 것은, 천규석의 말이 옳기 때문이다. 지금 도시에 공급되고 있는 채소는 농약과 복합비료 범벅이다. 특히 비닐하우스에서 짓는 작물은 그 안에 닭똥, 복합비료, 농약투성이며, 비닐하우스 내부에서 채소와 농민 모두 농약에 중독된 상태라고 고발한다.
천규석은 한국 농업과 관련한 모든 부문을 두드린다. 농사를 짓기 위해 가장 핵심이 되는 씨앗의 출처는 다국적 곡물자본인 카길, AMD, 루이 드뢰피스, 몬샌토 등에 종속되어 있고, 모든 동물의 사료와 식품의 주원료인 옥수수 역시 곡물자본을 통해 수입 하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다.
수입 사료를 먹은 소, 돼지, 닭의 분뇨로 비료를 만들어 그것을 밭에 뿌리고, 수입한 씨앗으로 식물을 키워 먹는 상황을 많은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식량 자급율이 겨우 26%에 불과하고, 그나마 쌀을 제외하면 겨우 2.5%의 먹거리 자급률이니, 이것은 한 나라의 농업이라고 할 수 없을 지경인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정부는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기조로 값싼 노동력의 수급을 위해 구조적 이농(離農)을 유도했다. 농산물 가격의 통제를 통해 도시 노동자의 저임금 구조를 고착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렀다.
신자유주의라는 현재에도 농업의 자본과 도시에 의해 수탈, 착취당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기업농, 대농 위주의 농업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우루과이라운드, WTO, FTA 체제에서 산업경쟁력 위주의 정책을 일관하고 있으며, 농업의 피해와 포기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한국 농업의 총체적 문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농사의 기초가 되는 씨앗, 비료, 농약, 퇴비 등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강요된 농산물 가격의 낮은 가격은 농사를 기계화, 개별화 노동으로 전락시켰다.
70년대부터 시작된 비료, 농약에 의존하는 화학농업이 농사를 망치고 있다.
여러 단계를 거치는 농산물의 유통 경로는 농민을 착취하는 구조다.
현재의 농협은 농민을 이용해 돈을 버는 금융기관이자 유통회사일 뿐이다.
정부는 농토의 비율을 계속 줄이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 농지를 쉽게 매입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농민이 농산물 가공업을 쉽게 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농민은 농협을 통해 농사빚을 지고 헤어날 길이 없는데, 이는 구조적인 문제다.
외국 농산물의 수입으로 쌀과 농산물 가격의 폭락은 노동자의 저임금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농촌문화와 생산문화의 파괴주범은 도시의 상업주의적 소비문화와 제국주의적 속성 때문이다.
식량(먹거리)을 수입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발상은 민족과 국가의 존립을 포기하는 것이다.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 노동력의 공급원이 되는 농산물 저가격 구조,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는 제도를 타파해야 한다.
한국의 대표 자본가 모임인 전경련의 한 자본가는 한국의 모든 농업을 폐지하고 그 땅에 반도체 공장을 지어 수출하고 쌀은 수입해서 먹고 살자는 말을 했다. 자본가에게 농업은 쓸데없이 땅이나 차지하고 있는 애물단지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농업은 한 나라를 유지하는 근본이며,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문화와 예술의 탄생지이며, 생태계를 유지하고, 중금속 오염과 수질 오염 등을 정화하는 자연치유 능력까지 갖춘 생명 공생 과정이다.
천규석은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지적을 한다.
‘진정한 노동해방도 도시와 공장 안에서 노동자가 자본가나 경영자와 평등해지는 것이 아니고, 지속 불가능한 이 공업산업사회를 해체하고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촌공동체를 다시 만들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노동운동의 목표이자 진보 운동의 목적이기도 한 자본주의 해체와 그 대안 사회의 구현을 뛰어넘어 ‘인간 해방’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천규석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를 ‘순진한 몽상가’라거나 ‘현실을 모르는 낭만주의자’라거나 ‘이상주의자’라는 딱지를 쉽게 붙인다. 천규석이 주장하는 사회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내용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천규석은 일관된 주장을 펼쳐 왔다.
비료, 농약, 제초제로 망가지는 땅은 화학농, 유기농을 넘어 생명공동체 농업으로 이행해야 한다.
노동자에게 생활공동체, 조합운동을 확대하자.
계절식, 완전식, 조화식, 소식의 자연건강식과 생명공동체가 대안이다.
이웃공동체와 공동체 생활양식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증산을 위해 비료, 농약의 과다 사용이 문제이며, 식량이 부족하면 공동체로 나누는 지혜가 필요하다.
유기농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농민 자신의 생산축소, 도시인의 소비축소, 모든 사람의 욕망축소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유기농공동체 운동은 인간이 욕망축소에 기초한 자급자족적, 공동체적, 지속적인 삶 운동이며, 공생적인 농업문화의 주체성과 자존심의 부활 운동이다.
천규석은 여러 사람과 함께 만든 도농직거래 조직인 ‘한살림 공동체’의 발기문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1) 모든 생명은 유기적 연관 속에서 더불어 무한하게 공생한다.
2) 비료 농약 생활하수 공장폐수 대기오염과 산성비, 오존층 파괴, 지구 온실화 등의 복합오염에 죽어가는 땅을 살린다.
3) 무농약 저공해 계절농산물의 직거래를 원칙으로 한다.
4) 농촌과 도시가 함께 사는 삶이다.
5)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6) 한살림 농사는 이웃 농민과 두레로 지어야 한다.
7) 돈많은 사람의 개인건강식을 위한 유통업소가 아니다.
8) 한살림 물품은 가격이 아닌, 생명가치로 따진다.
9) 물품 이용은 5세대 이상 이웃과 더불어 공동체 봉사자를 통해 공동구매한다.
10) 이웃과 대화를 통한 자기변화를 거듭해야 한다.
11) 자원을 절약하고 재생 순환시키는 구체적 생활실천을 한다.
12) 쓰레기 없는 세상을 지향한다.
13) 스스로 공생을 실천하는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린 세계이다.
14) 이웃 생명을 위한 자율적 봉사와 희생을 도모한다.
15) 생명의 유일한 도리이자 의무이다.
16) 민족주체의 밥상공동체다.
‘한살림 공동체’를 위한 내용이지만, 천규석의 생각이 어떠한가를 잘 정리한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천규석은 농사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내용도 있다. 미래의 공동체 농장을 운영하기 위한 실천적 원칙들인데, 아래와 같다.
1) 자연적으로 생산되는 재료로 농장을 유지(자연농법)
2) 동물을 키워 퇴비를 자력으로 생산
3) 가축은 그 농장에서 나오는 식물로 사육
4) 재배되는 식물의 다양화(공생농법)
5) 유기물질의 순환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6) 토지 내의 규소의 순환을 강화
7) 토양, 동물, 식물의 균형적 상태를 유지
8) 파괴된 환경이 복구되어야 한다
9) 잡초와 해충을 제거하기 위해 윤작을 한다
10) 풍토 기후에 맞는 적지 계절농을 해야 한다
이와 함께, 공동체 농장을 유지하는 철학적 원칙도 제시했다.
1) 너무 많은 시간 육체적 노동에 혹사당하지 말라
2) 농장을 위해 외부로부터 구입하는 물품을 최대한으로 줄이라
3) 농업을 돈이 아닌 정신적인 면을 더 중시하는 독창적이고 진취적인 생각을 하라
이와 같은 원칙들은 천규석이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기준이다. 천규석은 ‘소농’, ‘가족농’, ‘소규모 공동체’, ‘자급자족형 공동체’, ‘두레농’, ‘공생농두레’ ‘지역자급자치공동체’ 등 비슷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천규석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분명한 공동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 소농을 확대한다. 소농 한 가구는 도시의 스무 가구와 농산물을 직거래 한다.
* 소농은 두레로 확대한다. 두레의 다섯 가구는 공동생산과 함께 도시의 이백 가구와 농산물을 직거래 한다.
* 농사는 완벽한 순환농으로 한다. 퇴비도 자체 생산, 쓰레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 모든 학교(유치원부터 대학까지)와 학교급식을 농가(농두레)와 직거래 한다.
* 노동조합이 있는 곳부터 공장, 기업의 식당에 농가(농두레)와 직거래 한다.
* 도시에서 귀농하는 젊은이들을 농두레에서 흡수해 농사를 가르친 후 함께 농두레에 참여하거나 독립 소농으로 자립한다.
* 도시의 조직-노동조합, 시민단체, 동호회, 회사원(들), 향우회, 동창회, 아파트 부녀회, 주민단체 등-은 농촌에 있는 땅을 매입해 그 지역의 농두레에 농사를 맡긴다.
* 농두레에서 지은 농산물은 위에서 말한 도시의 조직에서 직거래로 공동구매한다.
* 농산물 가공 역시 농민이 직접 만들어 판매한다.
여기서 천규석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에너지 자급과 관련해 필자가 자급자족공동체 공부를 하면서 나름대로 준비한 것이 ‘태양광 발전’, ‘지열 발전’, ‘풍력 발전’이었다. 기존의 화석연료의 반생태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그마져도 곧 고갈될 날이 머지않았으니 당연히 자연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천규석은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자급자치공동체’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 체제 옹호자들은 수출을 해서 먹고 사는 현재의 상황을 모르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주장이라고 말할 것이다.
천규석의 주장대로라면 백 년 전 사회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우물안 개구리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진보며, 인간다운 삶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진보적이라는 사람들 대부분도 미래의 전망에서 ‘농업’을 배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천규석이 말하는 농업의 미래를 바탕에 놓지 않고 대안 사회를 말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또다른 연속이며, 모래성 위에 쌓는 건물과 같다.
천규석은 지금과 같은 국가간 무역이나 심지어 공정무역이라고 불리는 중개무역 조차도 ‘국제분업에 의한 비자급적 시장 수탈을 공정무역의 이름을 빌려 옛 식민지 땅에서 현재와 미래까지도 계속 연장 확대하려는 신식민지주의의 논리일 뿐’이라고 말한다.
물론, 천규석의 논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문제는 많다. 현재의 강고한 자본주의 구조를 극소수의 공동체 운동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회의와, 외국과의 무역을 줄여간다 해도 국민 모두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역량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며, 삶의 질은 담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이다.
우리가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국가 단위의 자급자족 모델은 쿠바다. 쿠바는 미국의 무역제재로 인해 스스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 결과 식량자급률 95%를 이루며 자급자족의 사회를 만들었다. 그것도 화학농이 아닌 소농 위주의 유기농으로.
하지만 우리는 분단 상황이고,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의 힘에 의해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모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못 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쿠바와 엄연히 다른 조건을 가지고 있고, 안타깝게도 그 조건이 몹시 불리하고 열악한 상황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천규석을 읽어야 하고, 천규석의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미래의 패러다임이 너무도 분명하게 ‘농업’으로 이행하기 때문이다.
21세기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에너지와 식량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파괴로 인한 피해만으로도 과학기술을 부르짖는 자들의 말로가 어떤가를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은가.
고층빌딩, 첨단 가전제품, 자동차, 비행기, 인터넷, 텔레비전, 냉장고, 대형매장 등 생활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는 현재에 비해 천규석의 공동체는 분명 낯설고 힘든 세상이다. 물자는 흔하지 않고, 마트에도 상품은 넘쳐나지 않을 것이며, 도시는 축소되고, 도시의 온갖 소비적 상업은 거의 사라질 것이다.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의 욕망과 소비,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사라지고,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새로운 공동체 문화가 탄생할 것이다.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발적 노동을 하고, 자신과 공동체를 위한 봉사와 자기 수련, 학습과 취미 생활이 늘어나고, 경쟁이 사라진 공간에는 협동과 화합의 문화, 예술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도 민중들의 자발적 공동체는 ‘두레’로 나타났고, 작은 공동체와 마을 단위의 두레는 자급자치를 바탕으로 다른 공동체와 다른 마을과 연대하면서 지역문화를 꽃피웠다.
역사는 달라도 인간의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경쟁이 아닌 공동체이며, 두레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바탕으로 강고하게 번창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체제의 한계가 뚜렷이 보이듯, 그 종말도 머지않았음을 천규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 천규석의 ‘공생농두레’는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들릴 수 있겠지만, 철저한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소모품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노동에서 해방되는 길,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 인간으로 독립해 스스로 먹거리와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자급자립공동체를 꿈꾸는 것만으로도 희망의 빛을 발견하는 것이고, 대안 사회를 꿈꾸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불온하다면 천규석은 불온하다. 그 불온함은 자본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두려움의 표현이고, 무지와 이기심에서 나오는 불안함의 표현이다. 자신이 가진 알량한 기득권이나 약간의 물질적 자산을 잃는 것이 불안하고 두려워서 ‘진정한 진보’로 나아가지 못하겠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사람들이 많은 것 또한 현실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얻는 교훈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 같아도 이미 그 수명은 다 해가고 있고, 지구의 한정된 자원을 수탈한 결과 번성할 것만 같던 자본주의 체제는 곧 정점을 지나 추락하게 되고, 대안 사회가 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그때 천규석은 모두가 다함께 사는 사회, 인간 뿐 아니라 지구에 있는 모든 생물과 더불어 공존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아니, 그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대안 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것이 비현실적이라면 천규석은 비현실적 인간이다.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걷고, 아무도 하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두 가지로 부른다. 멍청한 사람이거나 선지자거나. 천규석은 멍청한 사람일까, 선지자일까.
우리 사회에서 노구의 몸으로 홀로 ‘자급자족두레공동체’를 외치는 사람은 천규석 뿐이다. 그의 목소리는 작지만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와 같고, 폭풍우를 몰고 오는 한 점 구름 같은 존재다. 그가 이 땅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참고문헌
이 땅덩이와 밥상, 천규석, [창작과비평]
땅 사랑 당신 사랑, 천규석, [명경]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천규석, [실천문학]
쌀과 민주주의, 천규석, [녹색평론]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천규석, [실천문학]
소농 버리고 가는 진보는 십리도 못 가 발병 난다, 천규석, [실천문학]
윤리적 소비, 천규석, [실천문학]
녹색평론
농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