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고인
지아장커 감독 작품. 빠르게 변하는 중국의 현재를 세 개의 시간으로 나눠 보여주고 있다.
1999년 펜양.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는 같은 동네에서 자란 소꿉친구다. 20대 중반의 이들은 가깝게 지내지만, 서로 서 있는 위치는 다르다. 영화에서는 설명하지 않지만, 리앙즈는 부모도, 자신도 노동계급 출신의 노동자인 걸 알 수 있다. 진셩은 부모가 당 간부로 추측할 수 있다. 진셩이 20대에 탄광을 운영하는 자본가가 될 수 있었던 건 그의 능력보다는 그의 부모 능력으로 가능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오는 아버지가 작은 가게를 운영한다. 서로 다른 출신 성분이지만 세 사람은 가족처럼 가깝게 지낸다.
지아장커 감독이 직접 밝혔든, 중국에서 1999년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 중국에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본격 퍼지기 시작한 것이 1999년이라고 한다. 중국은 시장 개방 정책을 통해 '세계의 공장'을 나서서 맡게 되고, 수억 명의 중국인민은 공장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전국에서 대도시와 대도시 근교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리앙즈와 진셩은 타오를 두고 삼각관계를 이룬다. 리앙즈와 진셩 모두 타오에게 자기와 결혼하자고 말하지만, 타오는 선뜻 한 사람을 선택하지 못한다. 리앙즈는 진실한 사람이지만 너무 가난하고, 진셩은 엄청난 부자라서 오히려 부담스럽다.
타오와 친밀하게 지내는 리앙즈를 본 진셩은 자기가 운영하는 탄광에서 일하지 말라며 리앙즈를 해고한다. 리앙즈 역시 구차하게 굽신거리며 일하기 싫다며 탄광을 그만둔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사이에 둔 정적이자,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으로 구분되어 있는 적대적 관계라는 것을 '사랑'의 관계를 통해 드러낸다.
타오는 아버지와 고향을 찾아가는 기차에서 진셩과 결혼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 사실, 무표정 자체가 사윗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관객은 알아챈다 - 너의 미래는 너 스스로 결정하라고 말한다. 타오의 아버지는 리앙즈가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리앙즈는 통신대학으로 법학과를 나왔는데, 스스로 지식인인척 하지 않고, 탄광노동자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타오는 리앙즈를 찾아간다. 바람에 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걸어가던 타오 앞으로 갑자기 전투기가 추락한다. 놀란 타오는 그 장면을 한참 보다 다시 길을 걷는다. 비현실적인 상황이 벌어졌지만, 그것이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곧바로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타오는 어렵게 리앙즈의 집을 찾아가 리앙즈를 만난다. 그리고 청첩장을 건네면서 결혼식 때 와달라고 말하지만, 리앙즈는 고향을 떠나겠다고 말하고, 그날로 가방 하나만 들고 고향을 떠난다. 리앙즈의 마음은 어땠을까. 사랑했던 여자가 돈 많은 친구와 결혼을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돈 없는 자신을 탓했을까.
타오는 아이를 낳는다. 아이의 이름은 '골드'다.
2014년. 리앙즈는 여전히 탄광노동자로 일한다. 그는 고향을 떠나 타관에서 일하고 있고, 결혼해서 얼마 전 아이가 태어났다. 15년 전, 고향을 떠나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선 땅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며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으니 그의 삶도 평범한 중국노동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리앙즈는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병원에서는 더 큰 병원으로 가봐야 한다고 말한다. 리앙즈는 탄광 일을 그만두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집은 그가 떠날 때와 똑같은 모습이다. 좁고, 먼지가 많이 쌓인 낡은 집.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물도 나오지 않는 움막 같은 집이다.
리앙즈는 고향에서 일할 때 가깝게 지내던 친구를 찾아간다. 다만 얼마라도 돈을 빌릴 생각이었지만, 그 친구는 리앙즈를 반기면서도, 탄값이 떨어져 탄광이 문을 닫을 처지라고 말하고, 자신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돈을 벌러 갈 계획이라고, 보증금을 여기저기서 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진셩의 소식을 들려준다. 진셩은 예전보다 더 큰 사업을 하고, 상하이에서도 잘 나가는 자본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타오와는 이혼했다는 말도 한다.
직원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하는 타오. 고급한 옷을 입고 외제차(아우디 A6)를 타고, 많은 직원을 거느린 사장님이 되었다. 리앙즈의 아내가 타오를 찾아온다. 리앙즈가 아내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앙즈의 성격에 타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건 참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가 이웃들이 말하는 소리 - 아마도 리앙즈의 가족을 도와주려는 선심에서 한 말이겠다 - 리앙즈의 어릴적 친구 타오가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일방적으로 찾아온 것이다.
타오는 리앙즈의 아내를 반갑게 맞고, 리앙즈는 잘 있는지 묻는다. 리앙즈의 아내는 서럽게 운다. 그녀도 남편이 암투병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슬프고, 안타깝고, 고통스러웠으니 처음 보는 남편의 친구에게 속절없이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타오는 리앙즈의 집을 찾아가 리앙즈를 만난다.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집에 누워 있는 리앙즈를 보면서, 타오는 치료비에 쓰라며 돈을 건넨다. 리앙즈는 고마운 마음으로 돈을 받지만, 그 뒤로 리앙즈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리앙즈는 치료를 했어도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리앙즈에게는 아내와 어린 아이가 있고, 이 두 사람은 다시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타오는 진셩과 이혼했지만, 자식인 '달러'를 보고 싶어한다. 어렵게 진셩과 통화해서 '달러'가 비행기를 타고 타오에게 온다. 상하이국제학교를 다니는 어린 '달러'는 어려서 엄마와 헤어져 엄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지금은 아버지, 새엄마와 함께 살고 있고,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중국말도 잘 못한다.
타오가 아들과 시간을 보내는 사이, 아버지가 고향을 방문했다 갑자기 사망한다. 타오는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아들을 다시 진셩에게 돌려보내면서 아들에게 집 열쇠를 준다. 언제든 네 집이니까 돌아오라고.
2025년. 대학생 '달러'는 수업시간에 엄마가 없다고 거짓말한다. 피터(진셩의 영어 이름)는 돈을 많이 벌어 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자본가로, 가족이 모두 호주로 이민을 왔다. 하지만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진셩은 영어만 하는 아들 '달러'와 정서적 거리가 생긴다.
수업시간에 교수는 90년대 중국에서 유행했던 노래라면 '산하고인'을 틀어준다. '달러'는 그 노래가 퍽 낯익다. 어디선가 들어봤던 노래라고 생각하지만, 어디에서, 누구와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달러'는 교수와 함께 집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난다. 달러와 진셩이 대화하는 방식은, '달러'가 구글 번역기에 영어로 문장을 입력하고, 그것을 중국어로 번역해 아버지 진셩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방식이었는데, 그렇게는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래서 중국말을 잘 하는 교수에게 부탁해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달러'는 대학 생활을 그만두고 싶고, 집을 나가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 아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비웃으며 화를 내는 진셩. 중국의 과거 세대와 현재 세대의 갈등은 나라와 민족, 인종을 가리지 않고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버지와 다투고 집을 나와 교수와 함께 관광용 헬리콥터를 탄다. 시끄러운 헬기의 소음 속에서 '달러'는 중국에 계시는 친엄마 이야기를 꺼내며 서럽게 운다. 그의 내면에는 엄마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중국을 거쳐 교수가 살던 토론토까지 한바퀴 돌며 '달러'의 엄마도 만나보고 중국도, 캐나다도 돌아보고 오자고 말하며 공항에서 항공권을 구입하려 하지만, '달러'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 여행을 포기한다. 그에게 중국은 너무 멀고, 낯설고,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타오는 아들이 좋아하는 만두를 빚고, 눈 내리는 골목을 서성인다.
지아장커의 작품 가운데 비교적 덜 건조하고, 이야기의 맥락이 분명한 작품이다. 주인공 세 사람 가운데 아무래도 리앙즈에게 마음이 더 간다. 진셩은 젊어서부터 자본가로 잘 먹고, 잘 사는 인물이었고, 타오도 진셩과 결혼하고 이혼하면서 아마 큰 돈을 위자료로 받아 사업을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타오 역시 먹고 사는 문제는 겪지 않으며 나이 들어 가는데, 다만 자식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반면 리앙즈는 성실한 노동자로 일하지만, 결국 그는 암으로 고생하다 죽게 되고, 그의 아내와 아들은 역시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살게 된다. 만약 타오가 진셩과 결혼할 마음을 굳혔더라도, 진셩에게 부탁해 리앙즈에게 작은 가게라도 차릴 돈을 건넸다면, 리앙즈가 고향을 떠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영화는 주인공 개인의 세세한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핵심은 아니다. 이들 세 명의 친구가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을 중국의 현실에 맞춰 그려 본 것이니, 개인의 삶은 많은 부분 생략된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노동자 리앙즈의 삶이 고난으로 점철되는 것은, 중국인민의 현대사 역시 그렇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