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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Oct 09. 2023

꼿꼿한 숙녀는 압도한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다

Robert Lewis Reid <summer girl> 92.71x 83.19 cm, 1896, 개인 소장

미국의 인상파 화가 로버트 루이스 리드(Robert Lewis Reid, 1862~1929)는 꽃으로 장식한 여자를 그리는 데 유명했습니다. 뽀얀 파스텔톤의 컬러가 투명한 터치를 이루는 기묘한 기법이 매력적이어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예쁨의 상징과도 같은 꽃과 여성이란 주제와 소재가 늘 그렇듯이, 리드의 작품은 가치만큼 예술성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여름 여자>는 그런 그의 작품 중에서 꽃 없이, 보다 견고한 여성 그 자체가 강조되는 세련된 작품입니다. 

하얀 치마, 보라색 블라우스 차림의 여름 여자는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무엇에도 지지 않겠다는 듯 단단하게 묶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못 더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마저도 굳세어 보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허리만큼은 꼿꼿하게 지켜야 한다는 듯 허리에 손을 지탱하고 더욱더 허리와 어깨를 바르게 폅니다. 시선은 저 멀리, 고개가 숙여지지 않도록 몸의 끝부분과 시선의 끝을 사방으로 펼칩니다. 봉긋하게 각을 넣어 부풀린 양 어깨끝은 천사의 깃을 단 듯 하늘로 뻗습니다. 등이 탄성을 이루며 힘을 과시합니다. 흐트러짐 없이 S자를 이루는 등줄기 사이로 우아함이 흐릅니다. 어떻게 앉고 서느냐에 따라 최선의 자신을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습니다. 


숙녀의 옷을 입으면 내 양 어깨는 뒤로 당겨진다. 숙녀의 자리에 앉으면 내 등줄기는 위로 길게 뻗는다. 숙녀의 치마는 무릎과 발목을 자석처럼 붙이고, 숙녀의 소매는 손가락을 단정하게 모은다. 숙녀는 존재하고  분위기를 장악한다. 


과장 좀 더 해서… 태초에 비언어가 있었다. 회화과 1학년 전공 시간에 배운 데즈먼드 모리스의 맨워칭과 바디워칭이 최초였다. 몸의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몸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려준다. 언어 이전의 언어가 비언어다. 당시에는 몸과 문화적 상징, 의미와 기타 역할을 분석하는 것이 주였지만, 지금은 몸의 언어가 가진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사회 안에서 몸짓이 가진 적절한 표현력과 절도 있는 예의바름의 전달에 관심을 가진달까. 적어도 사회 안에서 반가이 용납받을 만한 몸의 언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얼마든지 어필할 수 있다, 좋은 자세의 중요함은. 건강에 대해서는 당연하고 보기 좋음에 대해서도 역시,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더욱. 


필라테스는 코어의 건강을 위해 한다. 요가는 몸을 초월해 정신을 위해 한다. 바디라인을 가꾸는 데 열중하는 운동은 매끈한 곡선을 완성하고, 정신수련을 열망하는 운동은 드넓은 영혼의 세계로 이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몸은 그런 목적과 조건에 매여있지 않다. 우리가 바라는 건 그저 단정함이다. 돈과 시간을 집중할 시간과 여유가 부족한 사람들은 도전할 수 없는 방법을 나는 감히 추천하지 않는다. 


내가 본 몸짓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꼭 몸매가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몸을 꼿꼿이 세우려 하는 사람들이었다. 굳이 더하자면 거기에 절도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 당장 개인레슨을 받아 군살 없는 몸을 가질 수는 없고, 당장 깨달음을 얻어 몸의 제약을 초월할 수도 없다. 그저 매일 일상의 삶을 사는 우리는 시간의 빈틈마다 몸가짐을 가다듬는 것뿐이다.   


다만 이러한 몸의 언어는 지속적인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누군가는 바른 자세가 익숙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도 바른 자세로 앉고 서며 푹 퍼져 있는 행동을 불편해한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을 아직은 나는 만나보지 못했다. 항상 나쁜 것은 달콤하고 더욱 편안하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푹 퍼진 몸은 편안하기 그지없다. 그 단맛을 맛본 사람은 자꾸만 그렇게 설탕의 척추 없는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잠시 잠깐이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허리를 꼿꼿이 편 시간보다 늘어난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바른 자세가 익숙해질 일은, 무엇보다 편안해질 일은 없다. 우리에겐 없다. 항상 흐트러진 몸을 추슬러 절도 있게 무게중심을 내리고 견갑골의 날개를 한껏 들어올려야 한다. 배의 복근과 등의 배근에 힘을 주면 더할 나위 없다. 


나는 카이프로랙틱 전문가가 나무를 깎아 만든 골반과 종아리 고정기구를 사용한다. 직장에서는 허리, 골반과 무릎을 두툼한 리본으로 연결해 허리를 펴고 바른 자세를 만드는 바른 자세 교정기구를 쓴다. 어깨 끈을 당겨 벨크로로 붙이는 허리와 어깨를 펴는 교정기구 역시 바른 자세를 잡는 데 도움을 준다. 누군가는 유난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끊임없이 자기 몸의 무게추를 점검하지 않으면 결국은 경망스러운 비언어를 가지게 되고야 만다. 


욕심을 좀 부리자면 아름다운 것, 그 중에서도 우아함과 기품이 깃든 작품, 예술 작품 뿐 아니라 생활 소품을 곁에 두고 자주 바라본다면 우리의 시선과 눈매는 자연히 아름다워진다. 눈이 대상을 닮아가므로, 이 눈이 머무는 끝 역시 아름다움에 익숙해지므로, 아름다움을 머금은 눈의 주변부 근육이 꼭 그러한 표정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아, 확장되는 아름다움만큼 표정 역시 풍부해지는 것은 덤이다. 


이러한 단정함과 그윽한 표정으로 어떤 옷을 걸칠 것인가도 고민한다. 앞서 “취향은 수많은 실패와 낭비의 결과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미 수많은 실패로 인해 어떤 옷이 어떤 장소에 있는 어떤 분위기의 나에 적합한지를 알고 있다면 더욱 좋다. 꼭 비싼 옷일 필요도 없다. 브랜드 이름이 크게 박힌 고가의 옷일지라도 막상 입은 이와 어울리지 않아 위화감을 느낀 경험이 누구에게든 있을 것이다. 이상한 걸로 끝나면 다행이다 옷이 고가일수록 옷 속의 사람이 더 우습게 보일 수도 있으니. 이름없는 보세옷의 디자이너일지라도 장인 정신을 가지고 만든 옷이라면 목적과 분위기가 분명할 것이다. 그 목적과 분위기를 읽고 자신과 적합하다는 판단 하에 고른 옷이라면 옷이 사람을 살리고, 사람이 옷을 살릴 것이다. 적어도 서른이 넘은 여자라면 그런 판단력은 갖출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 힘이 든다. 품위는 불편한 것이다. 우리가 품위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런 데 있다. 누구도 열심히 불편하기보다 대충 편안히 지내고 싶기 때문에,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는 품위를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 몸을 어떻게 해야 가장 좋은 모습으로 보이고 유지하는지를 알고, 스타일이 정착되어 있어 얕은 유행에 휘둘리지 않는 확신이 있는 여자, 단정하고 확고한 말투가 신뢰감을 주는 여자, 그런 여자가 우리 세상에는 더 필요하다. 마음과 몸이 꼿꼿한 여자는 세상을 힘 있게 산다. 더 이상의 군더더기가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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