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는 잘 꽂히던 칼이 심장에는 들지 않았을 때
(spoiler)
작년에 거의 한 달간 정말 수많은 공포 영화를 봤다. "내가 왜?"를 거듭 외치면서 손가락은 공포 영화의 재생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느낀 생각은 '아, 큰일났다'였다. 공포 영화의 매력에서 못 빠져나올 것 같았다. 적어도, 정말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공포 영화들 마저도 지루하지 않았다. 평소에 단 1도 접하지 않았었고(1은 있었겠다), 언제 튀어나올 지 모른다는 설정이 항상 존재하기에 긴장감을 놓칠 수 없다라는 이유에서인듯 하다. 정말 이대로 가다간 도저히 안되겠더라. 그래서 결국 내가 좋아하는 서스펜스 장르이자 기분 좋은 추천까지 받았던 영화 <나이브스 아웃(Knives Out, 2019)를 봄으로써 공포 장르에 속박된 내 정신세계를 해방시키고자 했다. 이래봤자 또 공포 영화에 손이 갈 것 같은데 약간의 효과는 있겠지...
다수의 주연을 두는 외국 영화, 특히 영어권 국가에서 개봉한 영화들은 유명한 배우가 누가 나오는지가 영화의 큰 기대감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제작사에서는 잘 알려진 배우, 혹은 갑자기 확 뜬 배우들을 섭외하여 영화에 대한 기대폭을 크게 높이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다. 한창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영화를 연달아서 찍어내렸던 시기가 있었다. 2017년에 개봉했던 <범죄도시>를 시작으로 2019년까지 무려 12편의 영화의 주연을 맡아왔다. 개봉하는 영화마다 마동석이 없으면 이상했을 정도였다. 사실 <범죄도시>, 그 이전에 있었던 <부산행>의 출연으로 인해 마동석의 네임밸류가 굉장히 높아졌고, 그 것을 사용하여 텐트폴 영화들을 찍어내기 위해 수많은 영화사가 마동석을 섭외하여 영화들을 제작해내어 기본적인 수익이라도 얻어내려고 했다. 그 결과, <범죄도시> 이후로 나온 영화들은 싸그리 다 망하고, 혹평도 많았고, 쌍욕도 먹었다. 너무 찍어내리기에만 바쁜 나머지 시나리오는 개나 준 듯 하다. 적당히 부려먹었어야지..
하지만 미국은 좀 다른 듯 하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캡틴 아메리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인지도가 매우 높아진, 이 영화에 출연한 크리스 에반스가 그의 예인데 이미 몇 년 전부터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로 인지도가 하늘을 찔렀던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매해 찍어내린 영화가 극히 드물었다. 물론 개성이 다양한 주연급 배우들이 우리나라 시장에 비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미국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났던 MCU 세계관 영화의 주연 배우가 이 정도 수의 영화밖에 출연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영화의 수익을 크게 신경쓰지 않고 그에 적절한 배우들을 섭외하여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보니 오랜만에 출연한 이 배우에 대한 기대감도 매우 큰 폭으로 상승하게 되고, 그와 연결되어 영화의 기대감도 자연스레 높아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나이브스 아웃>이 그런 것을 노렸다면 잘 노린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역시 <007 시리즈>의 다니엘 크레이그, 70편이 넘는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는 마이클 섀넌에 대한 기대보단 '캡틴 아메리카'의 크리스 에반스의 출연 소식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가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나도 물론 그랬다. 게다가 영웅 이미지와 전혀 다른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했던 점 역시 매우 흥미로웠다. 특히나 eat shit!(똥 먹어라)을 연발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전날 밤에 잘 싸워놓고 과음하고 다음 날 미쳐버린 캡틴 아메리카를 보는 것 같았다. 똑같이 선의 편에 서있는 크리스 에반스였다면 조금은 식상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또 이 영화의 진짜 주연, 다니엘 크레이그를 빼놓을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007 시리즈>에서 엄청난 명성을 알렸었고, 이미 데뷔 29년차의 우리 아빠와 동갑내기인 베테랑 배우이다. <나이브스 아웃>을 보고 있으면, 그저 가만히 다리꼬고 앉아있는 모습만 봐도 괜한 멋을 느끼게 해준다. 그냥 영화 내내 저렇게 앉아있는 역할을 했었어도 극찬을 받았을 것 같은 포스와 함께 '도대체 저 배우 아니면 누가 저 역할을 해?' 라는 생각을 거듭 하게 만드는 대체불가 캐릭터를 맡았다.
내가 제일 크게 생각하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특징은 푸른 눈빛, 그리고 묵직하게 긁고 나오는 목소리이다. 그가 카메라를 보며 연기하는 장면을 보면 빨려들어간다는 표현보다는 묘한 기분이 든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또 워낙에 인상이 강렬해서 그런지 오래 바라보고 있기에는 좀 힘든(?) 면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맡는 역할이 어느 정도 한정된 것으로 보인다. 007에서의 제임스 본드, 여기서는 탐정 역, 더 나아가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제목부터..)에서는 실종 사건을 조사하는 기자로 나오기도 한다. 연기 스펙트럼이 그렇게 넓지 못하다. 다만, 그 안에서의 임팩트가 엄청날 경우 스펙트럼에 대한 한계가 오히려 장점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딱히 다른 장르를 도전하지 않아도 '난 그냥 이런 역할하려고 배우생활 하는거야.'라는 메시지를 연기로써 보여준다면 관람객들에게는 그만한 선물이 없을 것이다.
영화를 쭉 보고 있으면 전개법이 <아이덴티티>와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다. 사건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나열한 후에 각 인물들에게 알리바이와 사건에 대한 연관성, 범행 동기가 될 수 있는 요소들, 그리고 과거 행보 등을 부여한다. 그래서 관람객으로 하여금 수많은 추측을 하게 만들고 마지막에 '속았지?'라고 하며 반전을 선사하는, 독특하다고 하면 독특하지만 어찌보면 많이 보편화된 전개법을 사용했다.
근데 이러한 전개법이 영화를 보는 재미에 있어서는 엄청 훌륭하게 작용한다. 일단 수많은 생각을 관람객에게 요구한다는 점이 있는데, 이는 영화에 대한 집중력도 높일 뿐더러 각 인물을 하나하나 살리려는 감독의 의도까지 볼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런 류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각 인물들을 제거해 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범인이 누군지 맞히려는 관람객들이 늘어날 것이고 그에 해당하는 반전을 맞이하는 것, 감독의 의도대로 감상한 것이 된다. 나 역시 이 요소를 그대로 적용받아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했다.
또, <나이브스 아웃>은 미국 영화의 여러 특징 중 하나인 '비판'을 담기도 했다. 여기서 보여지는 故 할란(?)의 가족은 현 미국의 트럼프 정권을 축소하여 보여준다. 그와 연결지어 빈부격차, 이민자 문제 등을 보여주는데 그의 매우 대표적인 요소가 바로 가정부 마르타이다. 마르타는 어머니가 불법 체류자인 우루과이 출신 가정부로 나오는데, 할란 가족은 이런 마르타에게 너가 어떻든 간에 잘 해주고 보살펴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할란의 죽음으로 인해 나온 유언장에 모든 사유 재산을 마르타에게 넘겨주겠다는 내용이 있었고, 그 이후 가족이 마르타를 대하는 행동은 변화하게 된다. "너는 우리 가족이 아니다.", "이 재산을 물려받을 권한이 없다.", "이 돈으로 불법 체류중인 너의 어머니를 구해줄 수도 있다." 등의 말을 내뱉으며 마르타에게서 어떻게든 재산 소유권을 탈취하려 하지만 "할런이 모든 재력을 내게 주었으니 제 재력으로 처리할 수 있겠네요." 등의 대처를 보여주며 맞서 싸워내고 결국 가족은 재산 소유권을 빼앗는 데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보면 마르타에게 이민자라는 요소를 부여하여 멕시코와의 장벽 등 몇 년 전에 이민자에 대해 강하게 까내리고 하대했던 적이 있는 트럼프 정권에게 승리적 희열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보인다. 즉, 감독은 이민자를 굉장히 무시하고 있는 현 트럼프 정권의 상황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헌터 킬러>, <런던 해즈 폴른>, <인디펜던스 데이> 등 미국 우월주의를 강하게 표출하려는 영화들 사이에서 이런 미국 정권을 꼬집는 영화가 빛을 발하는 경우가 드물게 발생하는 듯 하다.
개인적인 생각을 하나 덧붙이자면, 보통 플롯 트위스트 영화들은 반전의 충격이 크게 다가오는데 그 이유는 관람객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 때문이다. 근데 <나이브스 아웃>은 좀 달랐다. 수많은 플롯 트위스트 영화를 접해본 사람들이 하는 추측에서, 뻔한 반전의 대상을 제외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요소로 다가온다. 특히나 반전 영화라는 것을 알고 보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반전 영화라는 것을 마르타가 한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며 암시를 해준다. 저대로 행동해서 할란이 죽었다는 설정으로 이 영화를 마무리짓기에는 아쉬움이 매우 크기에 반전 요소를 분명히 집어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그 때부터 일부 관람객은 진범이 누군지 추측하게 된다. 근데 할란과 평소에 사이가 너무 안 좋았고, 심지어 싸워서 뛰쳐나가는 장면까지 있는 랜섬이 진범이라는 설정은 너무 뻔하디 뻔하다. 근데 알고보니 랜섬이 범인이라는 걸 알면 관람객 입장에서는 다른 의미에서의 반전의 반전일 수 밖에 없다. 일부 관람객들(나 포함)은 실망도 했을 듯하다. 그런데 좀 더 나아가서 해석해보면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하다. 굳이 비판의 성향이 강한 영화에서 큰 반전을 집어넣기보다는 '이왕 비판하는 거 다른 비슷한 요소도 집어넣어보자'는 감독의 성향이 드러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일찌감치 '악역'이라는 요소를 집어넣고 악역은 웬만해서 반전의 요소로 쓰이지 않을 걸 알고 있는 관객으로 하여금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 후에, 결국 악역이 진범인 것이라는 것을 밝혀주며 '결과적으로 던지는 메시지 중 하나는 '권선징악'이었습니다.'라고 말해준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해봤을 때에는 나름 훌륭한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knives out. 그대로 해석하면 '칼을 뽑아들다.'이지만, 관용적인 표현으로는 '적의를 드러내다.', '분위기를 험악하게 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사실 이 영화의 전체적인 전개를 보면 이 세 가지 표현이 다 쓰인 듯 하다.
사실 '칼'이 들어가있는 영화 제목, 그리고 영화 내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칼을 보고 각 상황마다 등장하는 칼이 어떤 상징성을 갖고 있는지 유심히 보았다. 그래서 나는 칼이 등장하는 장면을 총 3군데 잡아봤다. 할란이 죽기 직전, 유서 개봉, 그리고 마르타에게 향하는 칼, 이렇게 세 장면이다.
처음 등장하는 칼은 마르타에게 약을 투여받는 할란의 시선과 함께 등장한다. 칼 집에 담겨 칼을 뽑아들어 테이블에 꽂으며 할란은 이런 말을 한다.
"랜섬, 참 나를 많이 닮은 놈이야. 자신만만하고 멍청하고 참견 싫어하고 뒤는 생각도 안 하고 인생을 게임처럼 살지. 그렇게 살면 그 차이를 모르게 돼. 무대 소품과 진짜 칼의 차이를. 죽음은 겁나지 않아. 하지만 가기 전에 몇 가지는 고쳐놓고 싶어. 내 인생의 책을 멋지게 마무리해야지. 어디 보자꾸나."
이에 마르타는 "보면 알겠죠."라고 받아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이 대사를 집어넣은 감독의 의도가 보였다. 앞으로 전개될 내용은 랜섬과 관련이 깊을 것이고, 이와 동시에 'knives out'의 첫 번째 관용표현인 '적의를 드러내다.' 즉,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랜섬을 묘사한 점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할란의 죽음으로 랜섬의 모난 점을 더욱 부각시키려 했고, "보면 알겠죠."라고 하는 마르타의 대사로는 앞으로 마르타가 이 상황을 해결하는 데 일조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던진 것으로 해석했다.
두 번째로는 최종 재산 상속 내용이 적혀있는 봉투를 찢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여기서는 'knives out'의 두 번째 관용표현인 '분위기를 험악하게 하다.'를 적용시키면 맞다. 할란이 사망한 시점에서부터 영화가 전개되는 건 사실이지만, 또 다른 혼란이 생긴다는 것을 '칼'이라는 요소를 사용하여 암시했다. 이 유서에는 본인이 갖고있던 모든 것을 마르타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고, 그것을 면전에서 들은 모든 가족 구성원은 당황해하고, 그와 동시에 마르타를 향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영화 내에 또 다른 요소를 부여하여 마르타에게 위기를, 그리고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도 갈등이 생기도록 하여 영화를 좀 더 파국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를 보였다. 여기서 사용한 '칼'이 개인적으로 제일 소름돋게 다가왔던 것 같다.
세번째로 등장한 칼은 랜섬의 손에 쥐어졌다. 블랑의 추리로 인해 범인임을 들킨 랜섬은 화를 이기지 못하고 수많은 칼이 꽂혀있는 조형물에서 단 하나의 칼을 꺼내들어 마르타의 심장에 꽂는다. 여기서는 그냥 그대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칼을 뽑아들다.'. 물론 꽂히진 않는다. 칼이 안으로 들어가는 장난감 칼이었던 것.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다른 것도 아닌 '사건의 종결'이다. 선이 아닌 악의 패로 돌아가는, 어찌보면 반전의 요소를 부여하지 않은 점이기도 하고 이 역시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요소인 듯 하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칼이 꽂혀있는 조형물을 클로즈 아웃으로 보여주며 하필 고른 것이 장난감 칼이다는 것, 안될 놈은 안된다는 것도 역시 보여준다.
아쉬웠던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각 인물을 잘 살리지 못했다는 점을 개인적으로 꼽고 싶다. 할란의 사망 이후에 랜섬, 마르타, 블랑 이 세 캐릭터를 위주로만 이야기가 풀이된다. 그렇다 보니 가족으로 나오는 다른 인물들의 특징은 초반에만 잘 살렸지 그 이후로는 거의 안 나오다시피 진행된다. 초반에 심어놓은 알리바이와 사건에 대한 연관성을 까맣게 잊게 만들만큼 비중을 확 줄이는데, 반전의 요소로도 역시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쓰였다면 관람객들한테 욕 먹었을 듯. 그나마 마르타의 집에 몰래 찾아온 월트 캐릭터가 있었으나, 애잔함만을 남긴 채 그대로 캐릭터를 묻는다. 창 밖을 바라보던 할머니 역시 내 머릿속의 범인 후보 중 한 명이었으나, 랜섬이 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한 요소로만 쓰였다. 심지어 이렇게라도 나오지 않은 인물들은 머릿속에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아쉬움.
둘째로, 반전으로만 봤을 때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의외의 인물을 기대했을 몇 관람객들에게 그랬을 것 같다. 처음부터 악역으로 나왔던 인물이 그대로 진범이 되는 경우는 예전에만 자주 다뤘지 요즘 시기에는 극히 드문데, 사실 권선징악을 목표로 했다면 성공한 것이 맞으나, 반전이라고 집어넣었다면 실패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플롯 트위스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많이 아쉬웠다.
이 영화를 본 목적은 서론에 말했듯이, 공포 영화들에 영화 인생이 사로잡혀 있는 나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꽤나 큰 효과가 나타난 듯 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공포 장르가 딱히 생각이 안나는, 원래 내가 좋아하던 서스펜스 장르 쪽으로 관심이 다시 돌아간 듯하다. 그리고 각본 자체도 매우 치밀했고, 간만에 보는 배우들이 나왔다는 점 역시 너무 반갑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