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Vivaldi - Four Seasons Op.8, 'Spring'
18세기 베네치아에는 네 곳의 자선원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피에타 자선원(Ospedale della Pietà)’은 부모를 알 수 없거나 더 이상 돌봄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이 모여드는 운명적인 장소였습니다. 당시 베네치아의 화려한 운하 뒤편에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들, 혹은 가난과 질병, 전쟁의 풍랑 속에 가족과 생이별한 아이들의 슬픈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이름 대신 번호로 기록된 채 자신의 뿌리를 모른 채 자라야 했던 소녀들, 그들에게 세상은 차가운 벽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적막한 곳에 ‘빨강 머리 신부’라 불리는 한 젊은 음악가가 교사로 부임합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사제 서품을 받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였습니다. 사실 그는 선천적으로 기관지가 약해 미사 집전을 힘겨워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의 영혼이 미사보다는 오직 음악에 미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사 중에도 영감이 떠오르면 제단을 떠나 작곡에 몰두할 정도로 그는 지독한 음악가였습니다.
결국 서품 5년 만에 미사 집전을 포기한 그는 고아 소녀들을 돌보는 피에타 자선원으로 향합니다. 베네치아 선착장 바로 앞에 위치한 이곳에서 비발디는 수용된 800여 명의 소녀 중 40명을 엄선하여 노래와 악기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글을 배우는 것과 동시에 바이올린, 첼로, 오보에를 손에 쥐었습니다. 공동 생활 공간에서 눈을 뜨고 간단한 식사를 마치면, 공간은 이내 악기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같은 곡을 수천 번 반복하는 연습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이 소외된 아이들이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피에타의 음악은 점차 입소문을 타고 베네치아를 넘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베네치아를 찾는 여행자들은 이들의 연주를 듣기 위해 일부러 발걸음을 했습니다. 다만, 당시 관습에 따라 연주자들은 무대 위 가림막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연주해야 했습니다. 청중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려 퍼지는 천상의 소리에 경악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영사의 비서로 일하던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이 소녀들을 직접 만난 뒤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불우한 소녀들 중에는 천연두로 얼굴이 망가진 아이도 있었지만, 그들은 천사처럼 노래했고 어떤 악기도 두려움 없이 우아하게 연주했다.”
당시 비발디로부터 교육을 받은 피에타의 소녀들에게, 음악을 연주하러 나가는 시간이야말로 세상의 햇살을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해방의 시간이었습니다. 비발디의 음악은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해 준 기쁨이자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의 상황을 철저한 고증 위에 상상력을 얹어 그려낸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바버라 퀵(Barbara Quick)의 소설 『비발디의 처녀들』입니다. 이 소설은 비발디가 아꼈던 제자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안나 마리아의 회상 형식을 빌려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빨강 머리 신부님’이란 별명으로 불린 비발디는 이곳 피에타에서 일하며 500여 곡에 달하는 아름다운 협주곡을 썼는데, 그 유명한 《사계》 역시 이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사계》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정경을 묘사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비발디는 각 계절마다 음악의 흐름을 설명하는 ‘소네트(Sonnet)’를 써넣었습니다. 소네트란 ‘작은 노래’라는 뜻을 지닌, 전통적인 14행 형식의 정형시를 말합니다.
훗날 ‘음악의 아버지’ 바흐(J. S. Bach)가 비발디의 협주곡 17편을 필사하며 작곡법을 익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오랫동안 묻혀 있던 비발디의 음악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오늘날 ‘사계’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음반이 나와 있습니다. 또 연주자들은 이 곡을 연주함에 있어 새로운 해석의 틈새가 바늘구멍만큼도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연주자들이 나와 새로운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익숙한 멜로디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제저녁부터 대지를 적시던 봄비가 새벽녘 소리 없이 잦아들었습니다. 오늘 아침은 다소 흐리지만, 곧 구름을 뚫고 나올 햇살이 예고된 듯 주변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아파트 뒤뜰에 핀 목련, 거리 양옆의 개나리와 매화가 저마다의 속도로 봄을 알리고 있는 오늘, 우리는 이 ‘빨강 머리 신부’가 피에타의 소녀들과 함께 일구어낸 희망의 선율을 다시 꺼내 보려 합니다.
https://youtu.be/j5My1SnYXjY?si=Ko-iHjQFuYuVwDqC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의 협주곡집 《화성과 창의의 시도》 중 가장 유명한 '사계(Le quattro stagioni)' 중 '봄(La Primavera)'은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생동감 넘치는 걸작입니다. 지난 2023년 3월 대전시립연정국악원에서 내한 공연한 스테판 플레브니악(Stefan Plewniak)과 베르사유 궁전 왕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공연 영상을 감상합니다.
이 곡은 각 계절의 풍경을 묘사한 '소네트(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표제 음악(Program Music)입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로, 단순히 아름다운 선율을 넘어 자연의 소리를 악기로 정교하게 모사한 것이 특징입니다.
제1악장: Allegro (00:04)
멜로디와 전개: 시작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화려하고 명쾌한 주제 선율은 '봄이 왔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전체 합주(Ritornello)와 독주가 번갈아 나오며 에너지를 더합니다.
묘사된 장면:
- 새들의 노래: 독주 바이올린과 두 대의 바이올린이 높은 음역에서 트릴(Trill) 기법을 사용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묘사합니다.
- 샘물과 미풍: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고 속삭이듯 흐르는 샘물의 소리가 현악기의 유연한 움직임으로 표현됩니다.
- 천둥과 번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며 빠르게 반복되는 음형과 강한 악센트가 봄날의 소나기와 천둥을 긴박하게 그려냅니다.
제2악장: Largo (03:43)
멜로디와 느낌: 1악장의 활기찬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아주 느긋하고 서정적인 선율이 흐릅니다. 평화로운 목가적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악기 구성의 묘사:
- 졸고 있는 양치기: 독주 바이올린이 길고 느린 호흡으로 평화롭게 잠든 양치기의 노래를 연주합니다.
- 잎새의 속삭임: 배경에서 들리는 현악기의 잔잔한 움직임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를 뜻합니다.
- 충실한 개: 비올라의 짧고 거친 반복음은 옆에서 주인(양치기)을 지키며 짖는 '개'의 소리를 묘사한 것인데, 이는 비발디의 재치가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제3악장: Allegro (06:06)
멜로디와 전개: 12/8박자의 쾌활한 춤곡 리듬(지그, Gigue)이 특징입니다. 눈이 녹고 꽃이 피어난 들판에서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묘사된 장면: '전원무곡(Danza Pastorale)'이라는 이름처럼, 양치기들과 요정들이 눈부신 햇살 아래서 피리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을 화려한 바이올린 기교로 마무리합니다.
베르사유 궁전 왕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스테판 플레브니악은 시대 악기 연주의 대가답게, 바로크 음악 특유의 생동감을 극대화합니다. 현대적인 매끈함보다는 고음악 특유의 거칠면서도 선명한 질감을 살려 자연의 생명력을 더 강렬하게 전달합니다. 춤곡의 리듬감을 아주 탄력 있게 표현하여, 봄의 역동적인 기운을 느끼기에 최적의 연주입니다.
이 곡은 듣는 이로 하여금 머릿속에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리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각 악장마다 숨겨진 자연의 소리(새, 물, 바람, 개 짖는 소리)를 찾아보며 감상하시면 더욱 즐거운 시간이 되실 것입니다.
어제저녁부터 대지를 적시던 봄비가 새벽녘 소리 없이 잦아들었습니다. 오늘 아침, 비에 씻겨 유난히 맑고 투명해진 공기를 마주하며 창밖을 내다봅니다. 아파트 뒤뜰에 핀 하얀 목련, 거리 양옆으로 노랗게 고개를 내민 개나리와 매화꽃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봄이 왔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주변을 가득 채운 이 생동감 넘치는 봄의 징후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비발디가 이 곡에 직접 써넣은 소네트의 구절이 떠오릅니다. 300년 전 베네치아의 봄도 오늘 우리 곁의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드디어 봄이 왔다!
새들은 기뻐하며 즐거운 노래로 인사를 나눈다.
산들바람의 부드러운 숨결에 시냇물은 정답게 속삭이며 흐른다.
하늘은 갑자기 검은 망토로 뒤덮이고 천둥과 번개가 몰려온다.
잠시 후 하늘은 맑게 개고 새들은 다시 즐거운 노래를 부른다." - 비발디가 쓴 소네트
어젯밤의 봄비와 천둥은 어쩌면 오늘 아침의 이 명랑한 새소리와 꽃들을 예비하기 위한 소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김훈 작가는 2000년에 발표한 그의 산문집 『자전거 여행』에서 꽃이 피어나는 찰나의 역동성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꽃은 필 때의 광휘를 스스로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꽃은 필 때 온 몸을 떨고, 그 떨림으로 인하여 꽃은 피어난다."
가림막 뒤에 갇혀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던 피에타의 소녀들이 쇠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한 줌의 햇살을 보며 활을 켰을 때, 그들의 손끝에서 떨리던 선율은 소나기 같은 시련 뒤에 반드시 찾아오는 맑은 하늘이었고, 스스로의 광휘를 감당하기 위해 온몸을 떨며 밀어 올린 생명의 전율 그 자체였을 것 입니다.
어젯밤의 비바람이 오늘 아침의 꽃들을 더욱 선명하게 깨웠듯이, 우리 삶의 고단함 뒤에도 이토록 눈부신 봄날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싶어지는 아침입니다.(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