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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승 May 26. 2018

내향형 의사의 세계 참여

판단과 행동의 기준을 주체에 두는 사람을 내향형으로, 객체에 두는 사람을 외향형으로 분류할 때 나는 내향형에 해당할 것이다. 학교와 병원에 적응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습득해야 하는 외적 적응을 제외하고는 내면세계에 대한 관심에 머물러온 데다가, 외적 활동을 할 때마다 큰 피로감과 어색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성장시켜준 스승과 학회에 대한 봉사의 마음으로 학회 실무에 꾸준히 참여한 것이 그나마 내가 해온 외향적 활동이라 할만하다.  


정신건강의학과 클리닉을 운영하고 분석과 진료를 전담하는 개업의로서 여러 가지 사회적 역할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큰 부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담을 짊어진 이유는 어떤 의무감 때문이다.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수련을 마칠 즈음 의사로서의 역할을 크게 네 가지 영역, 즉 진료, 연구, 교육, 봉사로 분류하기로 정했다. 내 나름의 외적 활동의 네 개의 축인 것이다. 이 가운데 철저히 클리닉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진료 한 가지며, 그 외의 영역은 모두 진료실을 넘나들며 행해진다. 전공의 시절부터 공부를 지속해온 분석심리학은 환자와 그 질병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체정신, 즉 의식과 무의식 전체를 포괄하며 심원(深遠)한 원형의 세계를 탐구한다. 또한 질병관은 물론이요 인간의 세계관(Weltanschauung)을 중시하기에 필연적으로 진료실 너머의 넓은 세계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나에게 본격적인 사회 참여의 계기가 된 사건은 2014년에 벌어진 저 비극적인 세월호 참사다. 당시 한국 사회는 감당하기 힘든 충격과 비탄에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생존자와 유가족, 그리고 시민들의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한 대응이 절실했다. 나는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홍보기획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홍보기획이사인 이동우 선생님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학회가 해야 할 역할을 정리해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나는 재난정신건강위원회 설치가 필요하다는 제안서를 제출했고, 그것이 학회 테스크포스에서 통과되어 체계화된 재난 대응의 기반이 되었다. 연이어 학회 성명서와 보도자료 발표, 재난정신건강위원회 설치, 안산시 통합재난심리지원단 운영에 참여했다. 피해자를 돕고자 많은 의사들이 자원봉사자로 나섰으나 전문가를 교육할 자료가 미비한 것을 알게 되어 교육위원회에 들어가서 의사를 위한 '재난 이후 개입 모델' 교육 자료를 제작하여 보급했다. 세월호 사고 후 국민 정신건강 안내서 제작에도 참여했다. 국가 차원의 재난정신건강 대응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일본과 미국 등 해외 사례 연구를 시행하고 보고서와 논문으로 발표했다.  


2015년에는 감염병 메르스의 국내 유입으로 인해 시민들이 공포와 불안에 압도되었을 때, 재난정신건강위원회 동료들과 함께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와 공동으로 ‘감염병 스트레스에 대한 정신건강지침’을 제작했다. 국가 서비스의 부재를 절실히 느낀 동료 연구자들은 보건복지부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단의 연구과제로 ‘재난 유형과 개입 시기에 따른 재난정신건강지원서비스 모형 및 업무수행전략 개발’을 추진하게 됐고, 나는 ‘재난정신건강지원 정보콘텐츠 및 플랫폼 개발’에 연구원으로 참여하여 각종 재난에 대비하고자 시민을 위한 재난정신건강지침을 만들었다. 2017년 불시에 닥친 포항 지진에서 피해자는 물론이요 불안에 떠는 시민들, 현장에 투입된 지원자들에게 ‘재난에서 마음 건강 지키기’ 책자를 보급하여 안정을 회복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이 계기가 되어 일본국립정신신경연구센터의 트라우마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요시하루 킴 선생의 초청을 받아 2016년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부(World Health Organization Western Pacific Regional Office, WHO WPRO)에서 열린 전문가 미팅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세계의 전문가들과 함께 재난정신건강 분야의 정보와 경험을 공유했다. 같은 해 여름에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가장 큰 피해지역인 후쿠시마현과 미야기현의 ‘마음의 케어 센터’를 현지 방문하여 한일 전문가 워크숍을 진행하고 일본의 훌륭한 전문가들과 우의를 다졌다. 풍부한 인적, 학술적 교류는 이 분야를 발전시키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장황하게 열거한 이런 활동들은 내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지 않은 것이기에 전반적으로 봉사의 영역에 들어가며, 경우에 따라 연구와 교육에도 해당할 것이다. 한때는 대학교수가 되어 교육에 매진하고 싶다는 소망이 강했으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거나 주어진 제안을 부득이하게 사양하고 나서 클리닉을 개원한 뒤로는 연구와 교육의 영역에서 멀어진다는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되돌아보니 만약 대학이나 대형 병원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과연 이렇게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마도 각종 행정적 업무와 복잡한 인간관계들에 치어서 좁은 울타리 안에서 소극적 자세로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다. 개원을 하니 요식적으로 만들어내야 할 연구업적에 대한 부담도, 불편한 시선으로 견제할 동료도 없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본질을 추구할 수 있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왕성해진 사회적 활동 때문인지 각종 방송에서 출연 요청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보기에 나는 봉사만 했지 달리 얻은 이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방송 기회가 있으면 나를 추천해주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대응 상황 보고를 시작으로 정신건강에 대한 대담 등에 출연하는 일이 많아졌다. 흥미를 위해 제작하는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출연 제의가 들어왔지만, 이것은 모두 거절했다. 심지어는 훌륭하다고 정평이 난 다큐멘터리 제작팀에서 ‘분석을 통한 치유’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며 찾아와서 분석하는 과정을 영상에 담고 싶다고 하여 큰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당시 분석가도 아닌 수련생에 불과한 데다가 내밀한 분석 과정을 연출을 가미하여 흥미위주로 방송한다는 것이 무척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명성을 알릴 수 있는 솔깃한 유혹이었다. 그때 나는 중요한 꿈을 꾸었다.  


나는 학회를 앞두고 커다란 고급 양복점에 갔다. 아침 일찍 가서 정장 세탁을 맡겼다. 젊고 키가 큰 신입 점원에게 ‘이거 오늘 학회에 입고 가야 하는데, 세탁이 되겠느냐? 20분밖에 시간이 없다.’고 물었다. 그러자 점원은 자신만만하게 ‘가능하다.’고 했다. 20분 후 나는 맡긴 정장을 찾아서 입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정장은 주름이 잔뜩 지고 후줄근하게 늘어져 있었다. 소매에는 때와 얼룩이 더 심해졌다. 나는 점원을 찾아서 어찌 된 일인지 물었다. 그 점원은 우물쭈물 대답하지 않다가 내가 다그쳐 묻자 그제야 대답을 했다. 세탁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내 양복으로 매장 바닥의 물기를 닦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답하는 태도가 무심하고 뻔뻔하기까지 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으며 사장을 만나겠다고 했다. 마침 사장이 출근하여 아침 회의를 하려고 했다. 그 매장은 대단히 컸기 때문에 직원도 많았다. 나는 매장 한쪽에 마련된 아주 긴 테이블에서 회의를 시작하려던 사장 앞에 서서 그 신입 점원의 소행을 말했다. 사장은 조금 당황하며 확인을 해보겠다고 했다. 곧 일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사장이 사과를 하는데, 뭔가 충분치 못했다. 나는 입고 나갈 옷도 아직 없고, 이미 학회는 시작해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 후줄근한 정장을 걸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잠을 깼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나는 정장으로 표현된 외적 인격, 즉 페르조나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번듯하게 보이려고 노력해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뒤로 한동안 모든 방송 출연 제안을 거절했다. 심리 서적을 내자는 도서기획자의 제안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역시 모두 거절했다. 설익은 나의 세계관이 활자화되어 사람들에게 잘못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미성숙한 글은 가끔 숨겨진 독기를 품고 있어서 달콤한 위로의 말로 위장하여 읽는 이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방송과 책으로 이름을 알리고 활발히 활동하면서도 초심을 지키며 중심을 잃지 않는 동료들이 많이 있지만, 간혹 자신의 명성에 도취하여 무너져가는 이들도 있다. 나는 내 명성 추구가 나와 남을 해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원래의 내향적 태도로 돌아와서 내 앞에 마주 앉은 한 명의 개인과 함께 무의식을 탐구하고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발견해나가는 작업에 정진하기로 다짐했다. 병원 안 아담한 공간에 상징 연구에 필요한 책들을 모아서 ‘글이 익는 솥’이라는 의미로 ‘문정(文鼎)도서관’이라 이름 짓고 피분석자의 꿈에 나타난 무의식의 재난 원형상의 기원을 파고들었다. 한국융연구원에서 이부영 원장님의 지도를 받으며 동학(同學)인 김지연 선생님, 이주현 선생님과 함께 재난심리연구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재난의 의미를 탐구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그렇게 해서 2017년 여름 한국융연구원 분석가 수련과정 수료 논문 ‘재난과 대처양식에 대한 분석심리학적 연구: 한국의 전통문화를 중심으로’를 완성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나는 인간의 정신, 그중에서도 무의식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열리는 강연회나 토론회에서 여러 다른 외향적 접근을 보상해주고 훌륭한 균형을 제공해준다는 것을 체험했다. 2016년 ‘갑질’이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을 때 보건복지부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에서 이를 두고 정신건강정책포럼을 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갑 안의 을, 을 안의 갑, 즉 갑과 을의 상호 그림자 투사와 권력 콤플렉스에 대해 지적하고 분석심리학적 견지에서 해법을 제시했다. 논문으로 펴낼 정도의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포럼 자료집의 원고가 국내외 여러 매체의 요청을 받아 인용되고 있으니 개인의 정신세계를 대상으로 삼는 분석심리학이 사회 현상의 심층적 해석에도 적용됨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다.  


2017년에는 정신건강의학과 정신치료 수가 개선 작업에 참여하여 한국분석심리학회 회원들의 지혜를 모아 정신치료 발전을 위한 수가 개선안을 제출했으며,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열린 ‘상담을 원하는 국민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질 높은 상담을 받게 하기 위한 정책’ 토론회에서 정신치료 분야의 연자로 초빙되어 ‘의료의 영역을 넘어서는 정신치료의 세계: 인격의 성숙’ 제하의 강연을 했다. 당시 보건복지부 측, 학회 측, 개업의 측 연자들은 모두 현실적 수가 문제에 집중해서 개선안을 제시했지만, 나는 정신치료의 본질에 대해서 강조하여 내적 균형을 제시하고자 노력하여 큰 호응을 얻었고 이어진 라운드테이블 미팅에서도 밀도 높은 토론이 가능해졌다. 학회와 의사회의 보험위원회의 노고로 수가 개선 작업은 국민과 의사를 위해 값진 결실을 보았다. 실무를 지휘했던 분에게 전해 듣기로는, 보건복지부 측 인사가 토론회의 강연을 들으며 정신치료의 본질에 대해 인지하고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챙겨서 정신분석 수가의 개선이 힘을 얻었다고 한다. 외적인 협상과 대응이 물론 중요하지만, 한 개인과의 철저한 분석 작업을 전달하고자 노력한 것이 나름의 역할을 해서 큰 보람을 느꼈다.


2017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추계학술대회 정책 토론회를 마치고


2018년부터는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어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동료들과 함께 정신건강정책 수립과 보완에 참여 중이다. 특히 한국의 높은 자살률에 대한 대책이 절실한 상황에서 정부 당국자들이 시민의 정신건강증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정신보건위원회는 전문가적인 견해와 대책을 제시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세계에 참여하지 않고 닫힌 공간 안에 오래 머물다 보면 작은 방 안의 현자(賢者) 노릇에 도취할 수 있다. 불편하고 낯설어도 현실의 사람들과 섞이고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내향적 인간에게 현실적인 균형감을 찾아준다. 클리닉 밖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연구, 교육, 봉사의 세계 참여는 다시 내 진료실 안으로 돌아와서 나와 마주 앉은 한 개인을 넓고 깊게 공감하는 데 큰 바탕을 제공해준다. 나는 이런 외적 활동들을 행함에 있어서 교수, 봉직의, 개업의로 직역을 구분하는 것은 이제 무의미하다고 본다. 내 페르조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융학파 분석가이며, 이 모든 세계 참여 활동은 나의 의업(醫業)을 심화, 확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철저히 자기 자신이 될 것을 강조하면서도 이것은 사회로부터 분리되거나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한 인격을 가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더욱 훌륭히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독립된 개별적 존재이면서도 서로 연결된 집단의 일원이다.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 어느 쪽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양쪽을 가진 전체로서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2018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춘계학술대회 워크샵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진료실을 넘어선 정신건강 역량강화를 위한 워크샵"에서 패널토론으로 발표한 내용입니다.

한국융연구원 회보 길(2018년 봄호)에 기고한 글의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후배 의사들의 사회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글 _ 정찬승 (융 학파 분석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신보건위원회 상임위원

대한신경정신의학회·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건강위원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이사

보건복지부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 재난정신건강정보센터 연구원

울산대학교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마음드림의원 원장

http://www.maum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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