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회복을 돕는 가을의 치유 메커니즘
가을의 날씨를 만끽하고 계신가요?
정신없이 바쁜 일상에서도 한번 쯤은 단풍을 보러 다녀오세요
겨울이 오기 전에 아름다운 자연을 봐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달의 심리학] 10월의 글 '치료의 숲, 자연에서' 입니다
깊숙한 시골로 출장을 떠났다. 좁은 도로, 급격한 회전, 양옆 어두운 숲의 그림자를 따라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운전에 영 소질이 없는 나에게 반갑지 않은 길이었다. 식은 땀이 났다. 정신을 가다듬고 핸들을 꽉 쥔 채, 도로만 주시하며 나아갔다. 일을 잘 마치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야 눈에 들어온 풍경. 내가 아침에 올랐던 산길은 양옆으로 거대한 단풍나무가 즐비해 있었다.
느린 속도로 나무 길을 달렸다. 단풍잎에 반사된 햇빛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이 앞 유리를 덮으니 가을의 한가운데를 유영하는 기분이 들었다. 자연이 만든 캔버스는 완벽한 작품처럼 펼쳐졌다. 긴장이 풀리고 온몸이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자연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치유하는구나.
10월의 마지막 주, 마감을 지키지 못한 초조한 상황이었다. 거의 삼 개월 정도를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렸다. 쉴 새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려도 진도는 좀처럼 나가질 않았다. 다크서클이 팔자주름까지 내려온 채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그런 몰골을 도저히 못 보겠는지 남편이 나를 끌고 나와 차에 태웠다. 목적지는 근교 공원이었다. 급한데, 이럴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써야 하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불편한 마음으로 공원에 도착한 나는 와, 하고 할말을 잃었다. 단풍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워 경외감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머물고 돌아오니 정신이 맑아졌다. 누가 내 뇌를 청소한 것처럼.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정리가 술술 되었다. 단풍은 대체 나에게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인간의 주의력은 한정되어 있다. 쉴 새 없이 주의를 살피면 에너지가 소진되고 정신적 피로가 몰려온다. 생각을 잘하려면 때로는 생각을 멈춰야 한다. 그런데 그게 잘되지 않는다. 흰 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평소 생각한 적도 없던 흰 곰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게 인간이 머리를 쓰는 방식이다. 그래서 때로는 어떤 상태에 압도되어 생각을 멈추는 순간이 필요하다. 나는 단풍을 보다가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느낌을 경험했다. 머리를 짓누르던 피로감이 사라졌다. 혹시 자연이 나의 뇌를 회복시킨 걸까?
환경심리학을 연구하는 심리학자 리타 베르토와 연구팀은 학생들에게 자연 이미지, 또는 도시 이미지를 오랫동안 보여줬다. 그리고 주의력 테스트를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도시 이미지를 본 학생들의 주의력은 그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자연을 본 학생들의 주의력은 월등히 올라간 것이다. 자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은 회복된다.
주의 회복 이론attention restoration theory에 따르면 정신적 피로는 자발적 주의 때문에 생긴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따라 읽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는 것처럼 우리는 의도적으로 어딘가에 주의를 둔다. 그런 순간이 지속되면 뇌는 피로감을 느낀다(그렇다고 책을 덮으라는 뜻은 아니다. 곧 피로 회복 방법을 알려줄 테니 부디…). 정신적 회복은 비자발적 주의로부터 이루어진다. 비자발적 주의는 특별한 노력 없이 시선을 빼앗기는 것을 말한다.
비자발적 주의가 이루어지려면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먼저 시선을 빼앗으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매력soft fascination이 있을 때 우리는 애쓰지 않고 주의를 돌린다. 업무나 고민거리에서 멀찍이 떨어진 탈일상being away이어야 하고, 충분히 넓고 깊은 공간extent일수록 좋다. 그리고 개인의 필요와 욕구에 잘 들어맞는 적합성compatiability이 충족될 때 우리는 자발적 노력 없이 주의를 둘 수 있다.
자연은 이 네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흔들리는 나뭇잎, 흐르는 시냇물은 튀지 않으면서 눈길을 사로잡고, 자연과 관련된 직업이 아닌 이상 일상과 멀찍이 떨어져 있다. 자연은 언제나 광활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에 딱 들어맞는다. 자연을 보는 동안 우리 뇌는 주의를 두면서도 힘을 들이지 않고 자연히 피로감이 회복된다.
인간의 머릿속은 소음으로 가득하다. 기대, 욕심, 부담, 의무감, 책임감 등에 파묻혀서 해야 할 일을 고민한다. 또 후회, 아쉬움, 두려움 등으로 지난 일을 곱씹는다. 속이 시끄럽다. 그럴 때 자연이 주는 힘은 놀랍다. 단풍잎으로 온통 빨갛고 노랗게 세상이 가득 찰 때 우리는 그 색감에 압도된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칙센트미하이는 행동이나 경험에 완전히 빠지는 상태를 몰입flow이라 불렀다. 몰입에 빠지면 자의식도 사라지고 시간의 흐름도 잊는다. 오로지 그 자체에 빠진다. 몰입하는 동안 생각이 멈추고,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무엇보다 몰입 상태에 빠지면 가장 깊은 행복감을 느낀다.
살면서 어딘가에 쉽게 몰두할 수 있을까? 권태로운 일상과 바쁜 일정 사이에 널을 뛰며 균형 잡기도 바쁜데 말이다. 그럴 때 단풍과 같이 시각적으로 압도되는 자연을 마주하면, 우리 마음은 완전히 사로잡힌다. 그 공간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깊은 행복에 빠진다.
자연이 주는 힘은 그 자체로도 놀랍지만, 그중 단풍만이 가진 특별한 매력은 아마도 색감일 것이다. 색채 심리학에 따르면 색감마다 일으키는 감정이 다르다. 초록색을 보고 있으면 평온함이 느껴지고, 파란색을 보고 있으면 차분함과 평화가 떠오른다. 회색은 우울감을, 검은색은 권위나 슬픔을 부른다.
단풍의 색은 어떨까? 빨강은 정열과 사랑의 색이다. 보고만 있어도 에너지가 샘솟는다. 주황색은 활기차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노란색은 행복과 기쁨을 느끼게 한다. 이 세 가지 색감으로 뒤덮인 세상을 보고 있으면 우리의 감정이 어떻게 될지, 설명하지 않아도 뻔하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단풍을 보고 오니 힘이 솟았다. 빨리 돌아가서 일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을이면 으레 계절의 행사처럼 단풍놀이를 떠난다. 인증을 위해 사진을 찍고, 막히는 교통 체증에 짜증도 난다. 하지만 단풍을 본다는 건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이 만들어준 거대한 쉼터로 들어가는 일이다. 화려한 색감에 압도되어 생각 없이 걷다보면, 마음속 묵직했던 것들이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이토록 단순한 행위가 우리를 회복 시킨다는 사실이 신비롭다.
바쁠수록 시간을 내어 치유의 숲으로 떠나자. 단풍이 절정 에 이를 때쯤, 우리 마음도 절정에 이르는 축복을 받을 테니.
일 년 열두 달의 심리를 차근히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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