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눈사람

by 정희주


눈사람을 만들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몸이 어는지도 몰랐다.

커다란 눈사람을 들며 행복했다.

모자도 씌워고 목도리도 둘러주다.

내가 지켜줄게.


눈사람이 녹다.

큰 눈사람이니까

그늘에 두었으니까

쉽게 무너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속으론 마음을 조리며 학교에 다녀왔다.

다행이다. 많이 녹지 않았네


눈사람이 녹다.

다음 날에도 다음날에도 조금씩 녹아내렸다.

내 마음도 만큼씩 허물어졌다.

눈이 오는 것도 햇살이 비추는 것도

내가 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지켜내지 못했어.


눈사람이 사라졌다.

내 마음도 함께 삭아버렸다

삭아버린 그 자리엔 새로운 각오가 새겨졌다.

다시는 눈사람을 만들지 않겠어.

지킬 수 없는 것을 사랑하지 않겠어.

사라지는 것에 마음을 주지 않겠어.


눈이 내린다

그날처럼 큰 눈이 내린다.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싸움을 한다.

겨울 동상이 걸린 발가락이 간질거린다.

나가지 않을 이유를 찾는다.

어차피 녹을 거잖아.


눈이 내린다

그날처럼 큰 눈이 내린다.

뛰어다니는 한 아이가 내게 눈을 던진다.

차갑고 찝찌름한 눈이 빰에 닿는다.

눈사람과의 기억이 떠오른다.

행복했던 시간의 나를 기억한다.


눈이 내린다.

그날처럼 큰 눈이 내린다.

다시 눈사람을 만든다.

눈밭을 뒹굴며 온몸으로 눈을 느낀다.

지나갈 겨울이기에 소중하게 여길 거야.

변할 것을 알기에 사랑할 거야.

keyword
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구독자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