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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by 정희주

내 마음에 폐허가 있다.

나조차도 존재를 알지 못하는 폐허가 있다.

바람이 부는 날 간신히 서늘한 소리가 들릴 뿐

번개가 치는 날 간간히 모습을 드러낼 뿐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유기된 곳에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폐허가 있다.


내 마음에 폐허가 있다.

나조차도 알고 싶지 않은 폐허가 있다.

바람이 사라지면 웅웅 거리는 공허가 가득한 곳

빛이 사라지면 다시 어둠 속에 존재를 숨기는 곳

누구라도 인기척을 내면 깡그리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폐허가 있다.


내 마음에 폐허가 있다.

누구에게라도 알리고 싶지 않은 폐허가 있다.

누군가 들어와 놀라기라고 하면 나는 더 크게 놀라 소리 지를지도 모르기에

누군가 들어와 울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더 크게 자책할지도 모르기에

누군가 들어와 못 본 척한다면 나는 더 크게 절망할지도 모르기에

슬픔을 감당할 수 없는 이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은 폐허가 있다.


내 마음에 폐허가 있다.

아무나 들어오게 할 수 없는 폐허가 있다.

누군가 들어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할까 봐 두려운 곳

누군가 들어와 힘든 얼굴을 보게 될까 봐 두려운 곳

그렇게 함께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곳

나를 위해 아파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은 폐허가 있다.


내 마음에 폐허가 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폐허가 있다.

가시나무 사이를 헤치고 들어와야 하는 험한 곳

상처 입음을 감수해야 하는 곳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는 미지의 곳

고통을 감당하려는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폐허가 있다.


내 마음에 폐허가 있다.

아무나 존재를 알 수 없는 폐허가 있다.

오직 사랑하는 이에게만 보이는

오직 사랑하는 이만이 머물 수 있는

오직 사랑하는 이만이 보살필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있다.


내 마음에는 폐허가 있다.

쇠락할 줄 알면서도 재건하고 싶은 폐허가 있다.

존재를 안다면 보살펴 주고 싶은

존재를 안다면 포기하고 싶지 않은

존재를 안다면 다시 생명을 불어넣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다.



스크린샷 2025-01-25 152029.png 에곤 실레 <네 그루의 나무>, 1917, 캔버스에 유채, 110X140.5cm, 비엔나 벨베데레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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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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