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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밀가루를 안 드셨어.

아버지는 포르투갈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대표적인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 마리아 조앙 피레스의 연주를 사랑한다.


베토벤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 중에서는 현존하는 최고의 베토벤 스페셜리스트 루돌프 부흐빈더의 연주를 가장 좋아하신다.


콜로라투라와 리릭 소프라노보다는 메조 소프라노의 풍부한 질감을  선호하신다.


수크 트리오(Suk Trio)가 연주하는 드보르작의 피아노 3중주 '둠키'를 들으실 때면 아버지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신다.


아버지는 클래식 채널 오르페오를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


스포츠 경기는 하는 것보다 보는 것을 즐기시며, 축구와 야구, 당구, 배구 등 스포츠 중계를 가리지 않고 보신다.


나의 아버지는 숲 속 통나무집 2층 작은 방에서 명상을 하고 글을 쓰신다.


아버지께 배우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지는 사진을 찍으러 다니신다. 빅토리아 연꽃을 찍기 위해 새벽 2시 달빛을 친구 삼아 집을 떠나 호숫가로 가시고, 어느 절벽에 난 바위꽃을 찍기 위해 위험천만한 절벽으로 한달음에 달려가신다.


탄도항 갯벌 사진을 찍기 위해 일흔이 넘은 나이에 가슴께까지 오는 가슴 장화를 챙겨 신으신다.


아버지는 오래전 지리산 노고단 산장에서 산 친구들을 증인 삼아 나의 어머니와 결혼식을 올리셨다.


그날은 눈이 무척 많이 오는 날이었다.


시간은 청년의 검은 머리를 희끗하게 물들였다. 부부의 아이가 자라났고, 아이의 아이가 자라나 웃고, 달리고, 소리치고, 달겨든다.


숲 속에 있는 우리 집 통나무 집에서는 왁자한 소란 속에서 아버지가 선곡한 노래가 달뜬 공간을 적신다.


아버지의 사진_ 탄도항의 갯벌에서 일몰을 찍다.



아버지는 당뇨가 있으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덜했었던 것 같은데 연세가 드시면서 점점 배가 많이 나오셨다.


아버지는 밀가루를 안 드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피자는 드신다.

그리고 만두도 드신다.

또. 또. 우리 아버지가 드시는 것은

바나나 시나몬 토스트, 부침개, 어묵,... 여기까지.

여하간 아버지는 밀가루를 안 드신다고 말씀하신다.


오우. 이런. 내가 나설 차례군.

나는 아버지를 위해 작은 선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No butter(버터), No flour(밀가루), No sugar(설탕)

일명 순대국 식 3무(3無) 빵이다.


순대국표 3무 빵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1. 준비물: 큰 보울(bowl), 달걀 4알, 단백질 파우더 초코맛 4Ts, 귀리가루와 보리가루, 볶은 서리태 가루, 율무가루 적당량(내키는 대로), 식용유 1Ts, 우유 1Ts, 잘게 으깬 바나나 1개

2. 1의 준비물을 보울에 넣어 휘휘 젓는다.

3. 2의 내용물을 전기밥통에 넣고 만능찜 모드로 25분 취사한다.

4. 25분 뒤 젓가락으로 눌러본 뒤 무엇인가 끈덕한 것이 묻어 나오지 않으면 밥통을 접시 위에 엎어서 그대로 식힌다.

5. 맛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일단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시식하고 고독한 맛을 즐긴다.


완성작이 나왔다. 3무 빵은 냄새는 그럴듯했다.

가족들에게 시식을 권했다.

그러나 가족들 모두 벌레 유충이라도 만지는 듯 손가락으로 작은 집게 모양을 만들었고,

고개를 삐뚜름하게 올린 채 작은 한 입을 겨우 베어 먹었다.


시식을 마친 허리업 여사님은 웃었다. 그 웃음은 뭐랄까.


따뜻한 조소랄까.

인간적인 나무람이랄까.

사랑이 넘치는 조롱이랄까.


아무튼 뭐 그런 것이었다.


오. 그래도 괜찮다.

밀가루를 안 드시는 나의 아버지가 큰 환호와 관심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당뇨인을 위한 정성 어린 빵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두 점을 드셨다.

아버지는 한 조각 베어 물고선 나에게 또 만들어 놓으라고 말씀하셨다.


투덜대는 가족들에게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맛있는 거다 생각하며 먹는 거다.'라는 교훈적인 말씀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3무 빵은 누구나 지나다니는 부엌의 대형 대리석 식탁 위에서 케이크 모형처럼 전시되었다.

인테리어 소품으로써의 기능을 반나절 간 수행한 3무 빵은 가족들의 외면 끝에 냉동실 깊은 구석으로 향했다.


물론 아버지를 사랑하는 성실한 딸인 나는 한 판 더 밥통에 만들어 놓았다.



며칠 뒤 아버지의 친구분이 오셨다.

2층 거실에서 친구분과 아버지가 환담을 나누셨다.

나는 옳다구나 싶어 나의 3무 건강빵을 2개의 접시에 나눠 담아 갖다 드렸다.


30분 뒤 올라가보니 아버지 친구분의 접시는 비워져 있었고,

아버지의 접시에서는 3무 빵이 바닥에서 융기한 석고 조각처럼 접시에 올려진 그대로 제 존재감을 당당히 과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대국아. 그것 좀 가져와라. 바나나에 시나몬과 토스트 얹은 그것 말이다.


아버지는 3무 빵을 두 점 먹은 이후로 그것으로 충분했다고 생각하시나 보다.

"아빠 3무 빵 드릴까요?"라고 여쭤보면

서둘러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남편 금돌멩이 아부다비에 보름간 출장을 다녀왔다.

토요일 낮에 늘어지게 자며 시차 적응을 하는 듯싶더니

일요일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 주방에서 뚝딱거리고 있다.

처가살이의 고마움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리라.


금돌멩은 스콘을 만들고 있었다.


어깨너머 보니 재료는

밀가루 강력+박력분 많이, 버터 많이, 베이킹파우더 약간, 소금 적당량, 설탕 많이, 생크림(휘핑크림) 많이.


금돌멩은 반죽을 만들고서 그 녀석들을 휴지 시키는 중이었다.

사실 난 그 과정을 잘 보지 않았다.

3무 건강빵의 창시자인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외면할 따름이다.



에어 프라이기가 돌아가고 온 집안이 버터향기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지우개는 코를 킁킁거리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고, 탱탱볼은 부엌 주변을 얼찐거리기 시작했다.


스콘이 드디어 푸른색 도자기 접시 위에 위용을 드러내며 올라왔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허리업 여사님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목소리가 한없이 높아지고 부드러워지셨다.

아이들은 벌떼 같이 몰려들었다.

아버지는 못 이기는 척 드셨다.


나?


접시에 코를 박고 잠시 우물우물거렸던 것 같은데

말끔히 비워진 접시를 보며 내 스콘 어디에 갔나 두리번거리는 중이다.


스콘 한 판은 모두의 뱃속으로 뚝딱 사라졌다.


이번에는 장모님이 6월의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금돌멩에게 말했다.

"이서방, 그것 좀 더 만들게. 맛있네."


남편은 이 밤에 스콘을 굽고 있다.


버터 향기가 진동한다.

이미 먹어본 그 맛이 먹고 싶어 다들 부엌을 지나가며 한 마디씩 던진다.


나는 자리에 누워 얼른 밤이 가기를.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버터 냄새만 맡고 있는 것이 무척 고통스럽다.

밤이 늦었으니 무얼 먹을 수는 없고,

먹으려면 아침이 와야 하는데.

야식은 하지 않는다는 나만의 작은 규칙을 지키기 위해 바늘로 허벅지라도 찔러야 할 판이다.



버터 스콘이 판정승했다.

금돌멩이 이겼다.

졌지만 잘 싸웠다.


"흥. 맛있네."

건강빵의 창시자인 나는 삐친 표정을 하며 스콘을 주워 먹고 있다.


당분간 3무 빵은 냉동실에서 꽝꽝 얼은 채 빙하기 시대의 유적과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보전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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