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poong투자심사역들이 일하는 법
얼마 전, 두 창업팀을 만나 신랄한 비판을 해대었다. 하루에 두번씩이나 가혹하게 조언을 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사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를 한계에 내모는 일인지를 잘 아는 터라 가장 삼가려고 마음을 먹는 일인데, 이 상태로는 도무지 안되겠다는 생각에 지적질을 감행했다. 사업 방향이나 성과에 대한 것뿐 아니라 사업을 대하는 태도나 커뮤니케이션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적질을 하고 나면, 한동안 미안함과 자괴감을 마음 한 구석에 담고 지낸다. 어디까지가 투자자가 해도 되는 말, 일이고 어떤 것은 아닌가. 무엇이 주제 넘은 말/일이고 어디까지는 무책임한 방임인가? 결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 어떤 가이드도 되지 못한다.
sopoong에서는 반기에 한번 투자심사역들과 좋은 심사역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각자의 퍼포먼스는 물론이고 개인성장 및 조직/동료들과 함께 성장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갖고 있다.) 최근의 지적질과 함께 투자자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져보게 되었다.
액셀러레이터와 같은 투자자가 하는 일의 핵심은 창업팀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업의 성패는 시간에 달려있다. 시간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기회이자 자원이다. 대개의 경우, 창업팀이 가진 거라곤 시간 밖에 없다. 인력도, 자본도 부족한 상황에서 단시간에 성장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창업팀이 성공하는 길이다. 액셀러레이터가 하는 일도 시간과 맞닿아있다. 창업팀이 사업을 이어갈 시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자금을 공급하고, 시간을 효율/효과적으로 쓸 수 있도록 조언한다. 결론적으로 팀과 회사가 성장하는데에 소요되는 시간이 단축된다면, 액셀러레이터의 일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액셀러레이터가 창업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하는 일은 설득이다. 해당 사업을 하도록, 하지 않도록, 더 빨리 하도록, 속도를 늦추도록, 사람을 뽑도록, 해고하도록, 투자를 받도록, 받지 않도록 등 끊임없는 설득의 과정이다. 설득을 잘하는 것은 액셀러레이터의 필수적 자질이다.
이 설득을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천년 전, 그의 저서 <수사학(rhetoric, 연설술)> 에서 설득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의 3가지로 설명한다.
에토스(Ethos): 말하는 사람이 갖는 진실성과 성품. 즉, 화자의 인격과 신뢰감.
파토스(Pathos): 듣는 사람의 감정과 심리상태. 즉, 정서적 호소와 공감.
로고스(Logos): 합리적으로 화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 즉, 논리적 뒷받침.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3가지 수단 중에서 에토스가 강력하고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설득을 잘하기 위해서는 에토스 --> 파토스 --> 로고스의 순서대로 접근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인간적 매력이나 호감, 진정성을 바탕으로 상대와의 신뢰를 구축하고(에토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 상태일 때(파토스), 논리적 설득을 진행(로고스)하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어, sopoong 투자심사역들은 다음과 같이 일하려 노력하고 있다.
창업자가 투자자를 믿을 때, 투자는 성사되고, 조언은 채택된다.
창업 경험이나 투자 경험이 풍부하면 창업자로부터 쉽게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창업에 성공한 경험이라면 더욱 좋다. 그렇지 않더라도 프로젝트나 조직 경험, 개인브랜드와 같은 것을 통해 전문성을 인정받고 창업팀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과 네트워크를 제공하여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갈 수 있다.
신뢰를 쌓는 데에 가장 먼저 영향을 주는 것이 첫 미팅이다. 대개의 경우, 창업자들은 투자자에게 호감을 갖고 다가오기 때문에, 첫 미팅에서 좋은 인상을 줄 경우 신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기본적으로 창업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지지해주어야 한다. 투자자는 어디까지나 조연일 뿐, 주연은 창업자들이다. 미팅이라는 무대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하는 것은 창업자다.
두번째로, 미팅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해당 팀과 산업에 대한 이해, 업의 본질을 가로지르는 질문과 향후 성장에 대한 투자심사역 본인의 시야와 전략을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다. 통상 30분~1시간 정도 이어지는 미팅 자리가 끝난 후 미팅에 들어가기 전과 후에 창업자가 심사역을 보는 눈빛이 달라져야 한다. 충분한 사전 리서치를 바탕으로 좋은 질문과 심사역 본인의 인사이트를 준비했다면, 그 미팅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때론 비언어적인 말투, 표정, 외모, 제스쳐 등의 요소도 중요하다. 의외로 창업자들을 예의바르게 대하며 존중하는 자세에서 창업자들이 감동을 받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처음 만나는 창업자들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따뜻하게 영접한다. 미팅 후에도 문 밖이나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한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몇 일 이내로 미팅 때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정리하여 문자나 메일을 보내거나 논의 내용을 follow up 한다.
결국 투자심사역은 브랜드를 가져야 한다. 투자자도, 투자금도 늘어나지만 창업팀의 숫자는 그만큼 증가하지 않고 있다. 투자라는 일이 점점 경쟁적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투자에 있어서 평판, 브랜딩이 점점 더 중요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 좋은 브랜드는 피투자사들이 다른 창업팀에게 자발적으로 이야기하는 입소문에서 만들어진다. 유명한 하우스, 즉 널리 알려진 투자사들의 공통점은 피투자사들이 많은 칭찬을 한다는 점이다. 인생을 걸고 사업을 하는 창업자들이 괜히 입소문을 내는게 아니다.
창업자들이 원하는 것은 교과서가 아니다. 그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형형한 눈 빛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다.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있고, 휴가를 가본지 한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매일 전화와 이메일, 회의로 정신이 없지만 스스로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창업자들이 그 피곤하고 바쁜 와중에도 투자심사역을 만나러 오는 것은 어떤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투자심사역의 성공을 평가하는 척도는 일반적으로 투자 후 exit을 했느냐는 결과다. 하지만 결과에는 운을 비롯한 여러 요소들이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심사역의 성과를 평가하는 정확한 척도에는 투자유치 혹은 투자회수 결과 뿐만 아니라 팀의 성장에 얼마나 기여했는가가 포함되어야 한다.
수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기술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라며 "의학이 하는 일은 건강을 산출하는 것이 아닌 가능한 선에서 건강을 촉진하는 것" 라고 말한다. 투자심사역들에게도 해당되는 통찰이 있는 말이다. 심사역은 결과 뿐만 아니라 현재 창업자와 팀, 해당 사업이 처한 현실을 바탕으로 주어진 여건을 고려하여 적절한 조언을 했는가로도 평가받아야 한다.
모든 의사가 환자를 살릴 수 없는 것처럼, 훌륭한 투자자라면, 투자 여부나 exit 여부와 관계없이, 어떤 팀이라도 그 팀에 맞는 조언과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식사, 술자리를 갖거나 운동을 같이 하며 창업자가 하고 있는 고민이나 팀의 정확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정확한 처방을 하기 위해서는 진단이 우선되어야 한다. 처방이 정확했다면, 설령 투자한 팀이 사업 실패로 문을 닫게 되더라도 그 투자심사역은 인정받을 수 있다.
설득을 완성하는 것은 합리적인 논거다. 추측과 불확실한 가설을 검증해나가는 것이 사업이라면, '논리'는 나침반과도 같은 것이다. 투자자가 하는 일의 화룡점정은 논리로 설득을 해내는 것이다. 설득을 하는 이유는 결국 설득의 콘텐츠에 달렸다.
투자자를 만나러 오는 창업자들 중 실제 투자로 연결되는 경우는 5%에 지나지 않지만, 창업자들은 꾸준히 투자자들을 만는데에 시간을 쓴다. 사업 운영에 있어서 피와 같은 '자본'을 확보하는 것은 창업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절박한 창업자일 수록 투자자와 창업자들 사이의 관계는 갑/을의 권력구조가 형성된다.
따라서 투자자들은 창업팀과의 미팅 자리에서 창업자들이 보여주는 웃음이나 끄덕임, 칭찬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정치적 수사다. 심지어 이미 투자를 한 뒤라면, 그 정치적 수사는 더욱 고도화 될 가능성이 높다.
투자자의 조언이 진정 도움이 되고 설득되었다면, 창업자들은 미팅이 끝나자마자 실행할 것이다. 뛰어난 투자자라면, 창업자들이 미팅에서 하는 정치적 수사에 현혹되는 것이 아니라 미팅 후에 보여주는 행동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설득력을 평가해야 한다.
사실, 창업팀의 역량이나 수준이 다르고 사업영역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투자자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논리를 갖고 설득할 수 있는가다. 창업자들이 가진 논리를 파악하기 위해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창업자의 주장에 근거를 갖고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투자심사역의 일이란 팀에게 조언하고, 조언이 실행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좋은 성과가 보장되지 않는, 노력이 배신을 하는 대표적 직업이다. 창업자들을 보조하는 위치에서, 주연배우들을 돋보이게 만드는 조연배우로서 투자심사역은 스스로 실행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한계를 받아들이고, 더욱 가치있는 조언을 하기위해 노력한다. 결국 실제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은 투자자가 아니라 창업자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와 sopoong의 심사역들이 설득의 기술을 갈고 닦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