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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픽 오늘의 한 구절: 주인공과 NPC

by 문혜정 maya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흥미롭게 들리면
나는 무생물처럼 행동했어요.
나를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이야기할 수 있도록.
그런 거 있잖아요.
게임할 때,
분명히 화면상에 존재하지만
플레이어가 아닌 존재.
NPC 같은 거.

<타로카드 읽는 카페, 가득찬 둥지의 딜레마>





언제였더라......?

유튜브였는지, 릴스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그런 영상을 본 기억이 나요. 롤플레잉 게임을 하는 유저가 게임 속에서 만난 NPC에게 '넌 NPC야'라고 말했더니 자신은 진짜 인간이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화를 내는 그런 숏폼이었어요. 그때 이런 영상을 찍고 있는 유튜버 역시 프로그래밍된 존재라고 놀리는 댓글이 꽤 많이 달려 있더라고요. 우습기도 하고, 조금은 섬찟하기도 했죠.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대전제는 그다지 낯선 주제가 아니게 되었죠. 빨간약과 파란약도 밸런스 게임을 할 때 종종 등장하기도 하고요.

그런 얘기도 들은 적 있어요. 어떤 강연회에서 정신과 의사가 조현병에 대해 설명하면서 청중 한명에게 결혼했냐, 아이가 있냐고 물어보더니 사실 당신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다, 그건 그냥 당신의 환상일 뿐이다, 진실을 받아들여라고 반복해서 말했더니 그 얘기를 듣던 청중이 처음에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반박하다가 나중에 되어서는 거의 화를 냈다고요. 그랬더니 의사 선생님 말씀이, 바로 그 감정이 조현병에 걸린 환자에게 의사가 당신이 정신병에 걸렸고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말할 때 환자의 반응과 실제 환자가 받아들이는 감정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굳게 믿고 있었던 세상이 한순간에 부정당하고 내 존재조차 부정당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죠.

데카르트가 그랬잖아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런데 생각은 하는 것 같은데 사실 존재하는 게 아니라니. 내가 하는 생각이 진짜 '내가' 하는 생각이 아니라 그저 프로그래밍된 것일 수 있다니.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믿었는데 생각도, 존재도 실제가 아니라니. 혼란스럽죠?



하지만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실존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쩌다보니 NPC된 사람들과 그런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죠.

저는 카페를 운영할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내가 꼭 NPC가 된 것 같다고요. 주문을 할 때는 NPC에게 퀘스트를 수행하듯 말을 걸지만 음료를 전달하는 퀘스트가 끝나면 손님들은 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는 듯 했습니다. 카페 안을 떠다니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라고 할만큼 내밀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꽤 있었어요.

그들은 옆 테이블 사람들은 신경썼지만, 다른 손님이 없을 때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거든요. 제가 분명히 거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테이블을 닦고, 물병을 채우느라 그들 옆을 여러번 지나다녀도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게 기분 나빴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 순간이 매우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마 카페를 운영하는 분들이나 카페에서 일하는 분들이라면 자주 겪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저 역시 카페를 운영하기 전까지는 자각하지 못했던 일이니까요.

비슷하게는 고기를 직원이 구워주는 고기집에 갔을 때 그런 기분을 느낀 적 있어요. 저는 그때 이후로는 비밀스럽거나 민감한 이야기를 밖에서 할 때에는 조심을 하는 편입니다만(한번 매트릭스를 자각하면 다시 돌아갈 수 없잖아요. ㅎㅎ), 아직 빨간약을 복용하지 않은 지인들 중에서는 여전히 NPC의 탈을 쓴 실존적 존재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고기는 굽는데 꽤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의 실존적 NPC들은 곁에서 더 오래 머물 수 있죠. 그때 저는 '저 사람이 우리 얘기를 들으면 어쩌지?'하는 걱정보다 '우리의 사적인 얘기를 어쩔 수 없이 들을 때 무슨 기분일까? 어떤 생각을 할까?'가 더 궁금했어요. 사실은 원치 않는 공급이잖아요.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상황이고요. 그런데 또 다시 생각해보니 그 순간은 제가 NPC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 아니라 제 주변의 사람들이 NPC에서 실제하는 존재가 된 순간이었어요.

당연히 나는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실존적 질문들 속에서 고뇌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믿으면서도 하루에도 수십명씩 나를 지나쳐 가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에요.

출근길 전철 안에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화장을 고치고 있는 이상한 여자, 점심시간 맛집 앞에 길게 늘어서 있던 덩어리진 사람들, 퇴근길 만원 버스에서 짜증나게 나를 짓누르고 있는 술냄새 풀풀 나는 아저씨.

다들 나와 다를게 없는데. 나는 나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느끼고 고민하고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어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죠? 누군가 저를 보면서도 내가 무슨 개성을 가지고 있는지 관심도 없을테고, 그런 것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내가 진짜로 알고 친하게 지내는 소수의 인간을 제외한 인류의 대부분에 대해서는 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던 것 같아요.

순간이었지만, 그 생각이 들었을 때 가장 큰 인류애를 느꼈습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구나'를 감정없는 한 줄의 문장으로 외우거나 누군가의 가르침을 통해 공부처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진짜로 느꼈던 것은 정말 처음이었어요. 나도 누군가에겐 NPC가 될 수 있고, 나에게는 NPC일 뿐인 누군가도 그들의 삶에선 내가 될 수 있구나,를 '진짜'로 받아들였습니다.

도 닦은 것 같은 이야기라 그 깨달음이 그리 오래 가진 않았고, 금방 원래의 나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종종 거리를 지날 때 한번씩 떠올려 보곤 해요. 그러면 또 잠시간 인류애가 충전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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