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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Mar 29. 2022

와인 취중 글쓰기

같은 가격에 물이냐 와인이냐 묻는다면

나는 술을 잘 못 마신다. 맥주든 와인이든 소주든 위스키든 주종에 상관 없이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그래서 술을 자주,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맥주랑 와인은 꽤 좋아한다. 특히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그래서 분위기가 화기애애 무르익기 시작하면 술이 그렇게 맛있게 느껴질 수가 없다. 얼굴이 군고구마처럼 달아올라도 어찌 보일까 신경쓰지 않을 만큼 편한 사람들이랑 있으면 평소처럼 쉽게 취하지도 않는다.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맥주나 화이트 와인,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몸이 따뜻해지는 레드와인, 날씨나 분위기에 따라 당기는 술이 다르긴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주로 와인을 마시게 된다.


스페인은 일단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인 만큼 와인이 맛있고 싸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마셔도  잔에 5유로를 넘지 않고 보통 바나 카페나 레스토랑에서는 2.5-4유로 사이면 인심 좋게 부어주는 와인  잔을 마실  있다. 와인생산지나 품종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괜찮다. 특별한 취향이 있다면 어떤 맛의 와인을 좋아하는지 얘기하면 골라서 준다. 하지만 이도 저도 귀찮다면 그냥 비노 띤토(레드와인) 또는 비노블랑코(화이트 와인) 주문하면 된다. 그럼 하우스 와인을 주는데 웬만하면  맛있다.

특히 나에게 와인을 거부하기 힘든 경우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을 때다. 마드리드는 대부분의 식당이 점심때 '오늘의 메뉴'를 제공하는데 스타터, 메인, 후식, 빵과 음료를 포함해 8.5유로~13유로 사이다. 서울의 요즘 물가를 생각하면 꽤 괜찮은 딜이다. 같은 식당이라도 매일 메뉴가 달라지니 맘에 드는 식당을 매일 가도 매번 다른 음식을 맛보는 재미가 있다. 혼자 여행할 때마다 늘 예산이 빠듯한 나에게는 일석이조를 노릴 좋은 기회다. 위장이 작은 나에게 풀코스로 제공되는 '오늘의 메뉴'는 늘 양이 넘치기에, 난 식당에 갈 때마다 남은 음식을 담아갈 그릇을 싸간다. 그러면 남은 음식으로 두 끼는 더 먹을 수 있다! 게다가 '오늘의 메뉴'에는 보통 음료 가격이 포함되는데 선택할 수 있는 음료는 주로 물, 맥주, 와인이다. 다시 말해 같은 돈을 내고 와인, 맥주, 물 중 고를 수 있다는 뜻인데 한국이나 아일랜드에서 물은 무료, 와인은 거의 만원이라는 사실이 머리를 스쳐가는 순간 물을 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종업원이 와서 "음료는 뭘로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와인!"을 외치게 되는 거다.


  번의 와인의 유혹은 늦은 오후에 찾아온다.(이건 스페인에 있을  얘기다. 아일랜드나 한국에 있을 때는 전혀!) 주로 집에 있기 답답하거나 갑자기 혼자 , 혹은 글을 써려고 마음은 먹었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네플릭스에 접속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다. 그럴  나는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무조건 집을 나선다. 마드리드에는 대부분의 카페, ,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팔기 때문에 마음 가는 데로 걷다가 마음 가는 곳에 들어가면 된다. 와인 한잔을 시키고 노트북을 꺼낸다. 나는 레드와인을  좋아하므로  '비노띤또(vino tinto)'.  잔을 가득 채우지 않은 와인의 미학이 맘에 든다. 같은 양이라도 작은 잔에 가득  와인보다  잔에 낮게 깔린 와인이  맛있어 보인다. 그리고 속내가 들여다보이는 연한 색의 와인보다 살짝 문드러진 블랙베리의 속살처럼 검붉은 와인의 맛이  궁금하다. 잠시  밑받침이 둥글고 맑은 유리잔에 담긴 찰랑이는 붉은 액체가  앞에 놓인다.  마음에 드는 색과 양이다.  모금 맛을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별로 특별한 일도 없는데 뭘 쓰지, 하며 궁시렁거리던 나는 간 데 없고, 단어에 단어가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일단 마음 가는 데로 쓴다. 누가 읽어주든 아니든, 매우 좋은 글이 되든 아니든, 일단 '쓴다'는 행위는 소위 '작가'라고 부르는 '글 쓰는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러니 써야 한다.

술을 잘 못 마시는 나는 이내 슬금슬금 술 기운이 오른다. 심장은 평소보다 더 빨리 뛰고, 온몸의 감각들이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주변의 소음이 아련하게 흩어지며 귓곁에서 웅성이고, 얼굴로 올라오는 열기에 양 볼이 화끈거린다. 피부에 닿는 것들은 더 차갑거나 더 따뜻하고, 더 딱딱하거나 더 부드럽다. 흩어져 있던 생각이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딱 한 잔이 정답이다.


와인 한 잔을 비우는 사이 2시간 정도가 흘렀다. 주로 글을 쓰며 보냈지만 신기하게도 잊고 있던 사람들이 생각 나서 간간히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보냈고, 누군가에게는 전화를 걸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마드리드의 시간은 아름답다. 길을 걸어도 좋지만 집에 가서 조용히 저녁을 짓고 싶은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풍성했던 2시간의 대가로 3유로를 지불하고 집으로 향했다. 호박과 두부를 잘게 썰어 남은 밥과 함께 볶고 따뜻한 미소된장국과 함께 먹어야지, 생각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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