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
평범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평범하다는 게 뭘까?
대체로 잘하는 것도 없고 못하는 것도 없는것?
돈이 많지도 적지도 않는 것?
그냥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그곳에서 옆에 있는 누군가를 봤을 때
내가 그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면 평범한게 아닐까?
우리는 누구나 특별한 삶을 원한다.
1등이 되고 연봉 1억이 되고 10억짜리 집을 사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기위해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대한민국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도 어렵다고 한다.
평범함의 가치나 기준이 많이 변화했음을 느낀다.
인생은 상대적인 것으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느냐에 따라 평범함의 가지도 분명 달라길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성공했냐고 묻는다면 수줍게 대답할 것이다.
“그냥 평범한 보통사람입니다.”
한 때는 나도 특별한 삶을 꿈꾸기도 했다.
축구를 잘해서 선수가 되고싶었고 일본어를 잘해서 외대에 가고 일본에 취업하길 희망했으며
음악을 만들어 저작권료를 받으며 창작자의 삶을 바라기도 했다.
그렇지만 슬프게도 내 인생의 나침반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인생은 흘러갔고 지금도 그 인생의 방향을 돌려보려고 기를 쓰고 글을 쓰고 있다.
무엇인가 성공에 대해 글을 쓰려고 했을 때에는 이상하게도 글이 써지지 않았다.
내가 소설가가 아니라 그런지 성공이라는 상상을 글로 쓰려니 잘 써지지 않았나보다
facebook에 가끔 일상에서 느끼는 단상들을 글로 써서 올리곤 했는데 몇 분들이 ‘힐링이 된다.’, ‘글을 잘 쓴다.’고 칭찬해 주셔서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하나둘 올리다 보니 어느 새 내 생각이 다듬어 지고 평범한 삶에 대해 기록하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시시 할 수도 있고 때로는 비슷한 경험으로 즐거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시중에 나온 자기개발서 그리고 다양한 주제의 책들이 MSG를 팍팍쳐서 맛깔나게 쓴 책이라면
이 책은 생일날 엄마가 끓여주신 미역국처럼 작지만 소중한 한 끼 식사 같은 책이 되면 좋겠다.
지난 10여년 전부터 책을 쓰고 싶어서 정말 자주 시도하고 자주 포기 했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신 지호형님과 은애님께 감사 드린다.
우리집에 방이 한 칸일 때는 불행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 같다.
방의 갯수와 크기가 행복의 양과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방 2개 짜리 월세 살다가
수세식 공용화장실이 있는 단칸방으로 이사갔을 때 만큼은 행복이 반으로 줄어들고 불행이 제곱으로 증가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집 앞에는 내 친구들이 다니는 대형 학원이 있고 내 귀가 길은 친구와 함께하는 신나는 하교길이 아니라 집에 들어갈 때조차 두리번 거려야 하는 괴로운 길이었다.
결국 중학교 때 투룸 월세로 이사하고 나서야 두리번 거리는 내 습관은 고쳐졌다.
우리 가족이 면목동으로 이사 온 건 내가 4살때였다.
왜 하필 면목동 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서울에서 살기 가장 저렴한 동네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 부모님은 무슨 이유인지 과거 이야기를 잘 안해주신다.
뭐 내가 그다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어정쩡하게 알고 있는 상태가 지속되더라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아내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만)
아직도 재건축을 하지 않은 면목6동 우성연립 지하1층이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파편이다.
지금은 무너져 가지만 그 때는 나름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았던게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별로 가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우성연립에 대한 기억은 빌라 마당에서 세 발 자전거를 타거나 동생과 어떤 놀이를 했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왜 네다섯살 때 기억은 모두 희미해지는 것일까? 나는 그집에 별 생각이 없었다.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내 기억으로는 처음, 인생에서는 두번째 이사를 하게 되는 날이다.
그 집의 이름은 ‘창호형네’였는데 우리가 이사갔을 때 집주인 큰아들이 창호형이었기 때문이리라.
그 형이 나랑 열살정도 차이 났으니 지금은 어느 회사의 임원이 되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집에 돈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삼십년전에 빌라 짓고 아들 대학도 보냈겠지
창호형네서 우리는 방을 두개 썼다.
방이 세개 있는 1.5층 집이었는데 방 한칸을 다른 이에게 세를 준 것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쉐어하우스 같은 것인데 프라이버시 보장이 안된다.
물론 나는 어렸으므로 팬티 바람으로 돌아다녀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지만
이 즈음 이모가 결혼을 해서 우리집에 같이 살게 되었다.
물론 맞은 편에 애매하게 세를 놓는 그 방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중졸인데 이모와 이모부는 대학을 나온 수제였다.
이모는 우체국에서 일하고 이모부는 경찰이니 예나 지금이나 공무원이 최고인 것이다.
이모부는 어린시절부터 정치/경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요즘 보면 관심있고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른 것 같다. 내 앞에선 항상 당당하게 큰소리 치고 그러셨는데 아이 셋 키우다 보니 많이 늙고 이제는 그냥 그냥 사시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우리 아버지보다 훨씬 낫긴 하지만
나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이모가 딸을 나으면서 자연스럽게 이종사촌 동생이 생겼다.
동생이 둘인 것이다!
우리는 창호형네서 재미있게 놀고 주인집 계단을 우리집 마당처럼 넘나들며 용감하게 살았다.
화장실이 지옥같은 그 단칸방으로 이사가기 전까지 7~8년을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살던 동네는 창호형네(제일 부자로 추정되는)를 기준으로 윗동네, 아랫동네로 나뉘어 졌다.
윗동네는 상대적으로 신축이 많았고 한 블럭 밑에는 판자집과 재건축을 기다리는 허물어진 집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윗동네는 온순한 아이들이 많았고 아랫동네는 불량한 친구들이 많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작은 동네에도 빈부격차가 있는 것인지
나는 지극히 평범했기에 위아래 구분없이 신나게 놀았고 나쁜짓도 서슴치 않았다.
절도를 하다가 파출소에 가기도 했고 동네에 있는 모든 연탄을 발로 차서 부수기도 했으며
친구를 때려 그 친구의 할머니로부터 지명수배를 당하기도 했다.
할머니가 나를 붙잡고 이렇게 물었다. “이 아무개를 아니?”
그 때 나는 나 스스로를 부정하는 법을 배웠다.
그 이후 사과를 통해 잃어버린 나를 찾았지만 정말 가슴떨리고 통쾌한 시간이었다.
그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집의 주거형태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묻고 싶지도 않았고 어떤 대답이 올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당당하게 전세라고 이야기 했다.
자가, 전세, 월세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상대방 친구가 전세라고 하니 나도 지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냥 전세라고 했다.
우리집은 방도 두 개에 부엌과 거실이 있으니 분명 전세일거라는 믿음으로 살았따.
한편 3학년이 되고 동현이라는 친구와 친해지게 되었다.
그 친구에게는 두 살 많은 형이 있었고 남대문에서 악세서리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이 계셨다.
동현이네 집은 3층짜리 단독주택으로 무척 크고 넓었다.
그리고 그 친구 집에 가면 아이큐점프, 소년챔프, 닥터슬럼프, 드래곤볼 단행본이 모두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현이의 부모님은 장사를 하시느라 아이들에게 신경을 많이 못써주신 대신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아이들을 키우셨던 것 같다.
동현이는 부족한 감정을 나로 채웠던 것은 아닐까?
나는 돈은 없지만 사랑과 우정은 차고 넘쳐서 그 친구와 잘 놀아 주었으니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장사를 하거나 부모님 재산을 물려 받지 않으면 집을 사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그 넓은 집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동현이가 무척 부러워진다.
내가 고학년이 되고 비디오 게임에 빠진 후부터 우린 자연스럽게 소원해 졌고 결국 내가 저주해 마지 않는 단칸방으로 이사하게 된다.
명목상으로는 쌍용아파트에 청약이 당첨되어 아파트 중도금을 내기 위해 월세를 아끼자고 4평짜리 단칸방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지금의 원룸은 깨끗하고 쾌적하지만 우리가 살던 단칸방은 연탄으로 난방을 하는 시스템으로 집앞에 연탄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으며 좁지만 마당도 있었다.
단칸방 위에는 다락방이 있었는데 그 아찔한 경사의 계단을 잘도 오르내렸던 것 같다.
다락방에는 슈퍼패미컴과 TV를 연결해 놓고 게임을 하곤 했는데 단칸방에는 추억보다는 잊고 싶은 기억의 지분이 크다.
당장 학교까지 걸어가는데 30분 걸렸고 (어떻게 걸어다녔는지 신기할 따름)
담임선생은 나에게 학군위반 이라는 명목으로 전학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사실 6학년 때 나는 통제 불가능한 초딩이기도 했다.
담임 입장에서는 얼마나 눈엣가시 같은 존재 였으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을까?
하지만 나는 뻔뻔했기에 무사하게 6학년을 마치게 되었다.
중학교에 가면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갈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중2가 되고 사춘기가 한창일 때 드디어 1층에 있는 투룸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무척 좁은 두개의 방이 있었는데 효율적으로 방을 사용하기 위해 동생과 나의 방에는 2층 침대를 놓아주셨다.
나는 자면서 몸부림이 심했으므로 이층이 아닌 일층에서 잠을 잤다.
2018.09.11
Li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