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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외주한 사회

고레에다 히로카즈『아무도 모른다』

by May

변증법적 대립 구조는 인간 사유의 근본 원리다. 예컨대 대립되는 두 개념 어둠과 빛, 억압과 해방, 고통과 평안—이들은 서로를 전제하며 의미를 획득한다. 빛 어둠 속에서야 선명해지고, 해방은 억압을 겪는 이만이 정의할 수 있으며, 평안 역시 고통을 통과한 자의 언어다.

그런데 이러한 변증법적 관계가 현실에서는 종종 권력의 논리로 전용된다. 대표적인 예가 '자유와 책임'이다. 본래 상호 전제하는 관계여야 할 이 개념들이, 현실에서는 일종의 성원권을 판가름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책임지지 않는 당신의 자유는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논리다.


변증법적 대립 구조는 말의 관계에 막대한 힘을 부여한다. 그 힘의 영향력 아래에서 우리는 지당한 도덕적 기준을 세워두고 그 범위 밖으로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종종 이 질문을 다소 납작하고 투박하게 판가름해버리고 만다.


자유를 누릴 만큼의 책임은 무엇인가. 각자의 답을 나름대로 갖고 있지만,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꽤나 우리를 곤란에 처하게 하는 질문이라는 걸 잊어버리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는, 있는 그대로 복잡하고 어렵게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 앞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하나의 중요한 사례가 된다. ‘자유와 책임’이라는 언어가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버려진 아이들의 고요한 생존기를 통해 그려낸다.


영화의 초반부 엄마와 아이들은 새집으로 이사를 한다. 다소 따스하게 또 우스꽝스럽게 표현되는 장면, 셋째인 시게루와 막내 유키는 트렁크 가방에 실려 짐과 함께 실려 옮겨진다. 일본의 가족등록제도와 사회보장 시스템의 사각지대를 암시하는 설정이다. 이후에도 시게루와 유키는 집밖으로도 나설 수 없고, 혹여 이웃을 만나게 되는 순간 놀러 온 친척이라 얼버무린다. 성원권을 인정받지 못한 존재들, 그들을 숨기려는 필사적인 시도다.


네 아이들과 옹기종기 살아가던 어느 날, 엄마는 첫째 아키라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다는 이야기만 남기고, 영영 떠나버린다.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돌아오겠다 했지만 엄마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기다리던 아키라는 생활비를 보내오는 엄마의 주소를 찾아 전화를 건다.


엄마의 친숙한 목소리, 그러나 본래의 성 '후쿠시마'가 대신 '야마모토입니다.'라는 대답이 들려온다. 다른 가정을 차린 것이다. 아키라는 엄마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을 짐작한다. 나만 문제는 아니라며, 이런 나를 두고 떠난 아키라의 아빠가 문제라며 네 남매를 지금껏 키워오던 엄마는 그렇게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 떠나버렸다.


네 아이의 삶은 제도권 안에서 보호받지 못한다. 아이들은 누군가의 보통의 삶처럼 학교에 나가지도 못한다. 누구도 보살펴주지 않는 상황, 아이들은 얼마간 버텨보지만 집안은 곧 엉망이 된다. 쌓여가는 쓰레기, 전기와 물도 끊기고 벽만 둘러싸고 있을 뿐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생존해 나간다.


아키라는 엄마의 전 애인들을 찾아 돈을 꾸고,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구하고, 공원에서 물을 길어가며 동생들을 돌보지만 역부족이다. 무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들은 씻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다. 아키라는 그렇게 어른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살아남으려 애쓴다. 아이들의 생존은 책임이 아니라, 버려진 존재의 사투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책임이란 단어는 이 아이의 현실 앞에 얼마나 무력한가.


아키라는 시간이 갈수록 무너진다. 친구들과 어울리다 동생들을 내팽개쳐버리기도 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생존을 이어가던 어느 날, 멍하니 학교 야구부의 훈련을 바라본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글러브를 받고 싶다고 말했던 아키라, 그의 꿈은 여느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며 친구들과 야구를 하는 그런 삶이다.


야구부 코치는 그런 아키라를 발견하고 게임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누군가의 작은 호의가 아키라에게는 가장 빛나는 날로 남는다. 극 중 아키라는 가장 빛나는 눈으로, 그토록 꿈꾸던 삶을 짧게나마 경험한다. 그런데 바로 그 가장 행복했던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동생 유키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아이들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났던 엄마가 얼비쳐 보이는 장면, 자신의 삶을 잠깐이나마 자유롭게 살아본 사이 그렇게 삶은 비극을 몰고 온다.


물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다만 종종 이 말은 권력으로 작동한다. 경계선 긋기다.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기반조차 갖지 못한 이들을 대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당신들이 책임을 지지 않았으니 어느 한순간 불행으로 떨어지고 말아도 무방하다는 인식에 기반하는 행위다. 이때 '책임'은 자유를 제약하는 전제 조건으로 전용된다. 책임질 수 있는 경제적·사회적 기반 자체를 박탈당한(보장받지 못한) 이들에게 책임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논리 장치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철저히 낙인찍히고, 배제당하고, 외면당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끝내 막내 유키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아이들의 고통을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했던 사람은 사키를 제외하곤 없었다. '아무도 모른다.' 정말 몰라서 몰랐을 수 있지만, 우리는 알면서도 애써 모른척하기도 한다. 더욱 비참한 건 끝끝내 알게 되어도 근본적인 문제는 외면한다는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실제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었을 당시, 일본 여론은 무책임한 엄마를 비난하는 데에만 급급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그녀를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홀로 아빠가 전부 다른 네 남매를 키워온 삶은 어떠했을까. 그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로조차 담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키의 시신을 묻는 아키라와 사키. 사실 관계로만 보자면 꽤나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를 고요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감정에 압도되어 마냥 충격을 받거나 분노하는 대신, 가만히 생각해 보라는 메시지다. 충격보다는 어려운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복합적인 감정으로 소화하길, 단번에 판가름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어쩌다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실제로 몰랐을, 모른척하기도 했을 우리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충격에 휩싸여 개인을 비난하는 순간, 구조에 대한 시야는 흐려진다. 우리가 감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라는, 불편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이다. 어렵고도 복잡한 윤리적 사유이며,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 판단으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는 개인의 무책임을 비난하려는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이 말 전면 부정하긴 어렵다. 다만 영화는 묻고 있다. 그럼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가. 책임을 지어야 자유로울 수 있다는 말은 어떤 순서로 발화되어야 하는가. 터무니없게도 국가와 사회는 한 개인에게 얼마나 많은 책임을 외주화 하고 있는가.


아무도 몰랐던 것을 적극적으로 알아채려 하는 것으로부터 진짜 자유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타자의 고통을 모른 체 하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고통, 그 이면에 존재하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이야기. 이를 상상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누구의 자유도 쉬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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