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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Dec 04. 2022

나에게 다정한 날들


일정도 행선지도 정해지지 않은 유럽 직항 왕복 티켓. 대학 시절 KLM 항공사 서포터즈로 선발되어 1등 상품이었던 이 티켓을 받기 위해 부지런히도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 간절히 바라고 노력해서 얻게 된 이 항공권이 내 ‘홀로 여행’의 시작이었다. 티켓 가격이 꽤나 높았을 뿐 아니라 긴 시간 함께할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 누군가에게 같이 가자 말하기보다 차라리 혼자 떠나는 것이 내게는 더 쉬운 선택지였다. 반쯤은 어쩔 수 없이, 반쯤은 설레는 마음으로 25일짜리 여행을 계획했다.

그렇게 런던에 도착했다. 나는 금세 이 혼자만의 시간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직 자고 있는 일행을 한참동안 기다릴 일도, 끼니 때가 되었다는 이유로 고프지도 않은 배를 채워야 할 일도 없었다. 걷다가 지치면 계획한 일정일랑 다 잊어버리고 한 자리에 앉아 쉬었고, 한 낮에도 피곤하면 방에 들어가 푸지게 낮잠을 잤다. 

여행의 첫 날 밤, 해리포터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빗자루를 타고 어둠을 가르며 날아 가던 빅벤 앞에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나에게 빅벤은 더 이상 영국 런던의 랜드마크가 아니었다. 12살 때부터 나와 함께 성장해온 해리가 위험을 감수하고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곳이었다. 일렁이는 강물 위에서 정의를 위한 전투를 벌이던 곳이었다. 10년 동안 닳도록 책을 읽고 영화를 십수 번 돌려 보며 몇 년 동안 상상하던 장면. 그 누가 이러한 나만의 의미를 알아줄까.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바람부는 강가에 멍하니 앉아 반짝이는 템즈강과 빅벤만을 몇 시간씩 바라볼 수 있었을까? 아마 적당히 사진 몇 장 남기고 따뜻한 곳에 가서 맥주라도 한 잔 하자며 일어났을테다. 1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떠올리면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날 것 같은 황홀한 밤은 남지 않았겠지.

어느 날은 숙소 앞의 기차역에 잠시 들렀다가 계획에도 없던 라이(Rye)행 표를 끊었다. 전날 런던살이를 하는 어떤 이의 블로그를 보다가 우연히 보게 된 곳인데 즉흥적으로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R 발음이 좋지 않았는지 Wye로 가는 표를 몇번이나 내어주던 역무원과 한참을 실갱이하다 겨우 제대로 된 표를 받아들고 기차에 앉았을 땐, 솔직히 무서웠다. 행선지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데 나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나? 혼자 외국땅에서 무슨 기차여행이야, 그냥 돌아갈까? 오늘 안에 못 돌아오면 어쩌지? 그렇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도착한 라이는 정말이지 귀여운 도시, 아니 마을이었다. 오래되어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자갈길 양쪽으로 소담한 꽃들이 가득했고, 골목마다 소박한 티룸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머리앤이 살 것 같은 마을이라면 적절할테다. 전망대 입장 시간이 지났지만 그 멀리 한국에서 온 너를 어떻게 돌려보낼 수 있겠냐며 문을 열어주던 따뜻한 할머니가 있었다.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보고 포즈를 취하던 할아버지들, 사진을 보내줄 수 있냐며 메일 주소를 적어주던 커플이 있었다. 누군가는 심심하다 말할 수 있는 작디 작은 마을 곳곳을 하루 종일 걸어다니며 마음에 나만의 행복을 가득 채웠다. 런던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역시나 계획에 없던 헤이스팅스에 내렸는데, 흐린 날씨와 생각보다 황량한 도시의 모습에 흥미를 잃고 내린지 20분 만에 다음 기차를 타버렸다. 

이렇게 멋대로 여행해 본 일이 있던가? 남의 기분, 남의 허기, 남의 만족도까지 생각하느라 가진 에너지를 다 쓰는 나는 혼자 결정을 내리고 나만 챙겨 움직이면 되는 그 시간들이 너무나 자유롭고 편안했다. 여럿이서 왁자지껄 즐겁게 여행하는 재미가 왜 없겠는가. 사람을 좋아하고 여행은 그보다 더 좋아하는데 말이다. 누가 여행가자 말만 꺼내도 신이 나 여행지를 정하고 관광지, 맛집, 숙소가 담긴 일정까지 쭉 뽑아 내미는 사람이 바로 나다. 친구와, 가족과 여행하며 누릴 수 있는 정반대의 자유도 분명 존재한다. 혼자서는 즐기기 어려운 렌트카 여행이나 한밤중 클럽행처럼. 그렇지만 늘  누군가와 함께일 수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나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나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홀로 떠나보면 일분 일초마다 알 수 있다. 나의 마음을 잘 살피고 채워줘야지. 나에게 다정하게 대해줘야지. 굳게 다짐하는 것도 여행길 위에서의 일이다.

물론 혼자라 아쉽거나 억울했던 일도 많았다. 작게는 레스토랑에서 단 하나의 메뉴만 골라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으슥하게 느껴지면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이방인이라 겪게 되는 기분 상하는 일에도 혼자라 조글조글해진 마음 탓에 그저 꾹 참고 지나치던 서러움 역시 생생하다. 그렇지만 혼자라서 마주할 수 있던 장면들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가던 시간은 그보다 더 소중했나보다. 여전히 곧잘 혼자 떠나는 내가 된 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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