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세로, 얼룩말 수컷이다. 태어나보니 동물원이었고 사람들은 나를 ‘세로’라고 불렀다. 내 이름이 필요한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동물원은 세상의 전부였고, 모든 게 새롭던 나는 천방지축 바빴다. 내가 사는 세상 저만치엔, 어린 새싹을 닮은 아이들 소리로 가득했다. 저들이나 나나 본디 어린 생명들은 호기심 어린 기쁨이 가득한가 보다. 울타리 밖은 시끌벅적했는데, 엄마 아빠는 그 상황이 지루할 만큼 익숙한지 사람들을 본 체 만 체 했다.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담장 밖 호들갑에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들이 서있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은 철저히 분리되어 섞일 수 없었다. 저들과 우리는 서로를 구경하며 울타리를 시선으로써 넘나들었다. 평화로운 동물원 얼룩말의 삶이었다.
엄마의 고소한 냄새가 희미해져 가던 어느 날, 누워있던 엄마가 일어나지 않았다. 사육사라 불리는 사람들이 엄마를 그들의 세상으로 데리고 나갔다. 다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를 간 걸까.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길 일 년. 사람들은 엄마를 데리고 나갔던 것처럼 아빠를 데리고 나갔다. 나는 혼자 남았다. 나도 저 세상으로 나가서 엄마와 아빠를 만나고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엄마와 아빠는 나가기 전 밥을 먹지 않았다. 밥을 먹지 않으면 저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겠다 싶어 나도 밥을 먹지 않았다. 제일 좋아하던 당근도 먹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했던 것처럼 계속 누워도 있어봤다. 그러나 나갈 수 없었다. 원래 얼룩말이 어느 정도 자라면 혼자 남는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마땅히 물어볼 곳이 없었다. 사육사들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서에 나를 포개며, 엄마와 아빠를 잃은 슬픔에 저러는 거라고 혀를 끌끌 차며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느 날 문득 옆집 캥거루 가족의 소리가 들렸다. 어렸을 적엔 캥거루 아저씨가 무서워서 가까이 갈 엄두도 못 냈었는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무섭지 않았다. 캥거루 울타리를 툭툭 쳤더니 캥거루 아저씨가 잽싸게 달려와서 위협적인 앞발로 나를 경계했다. 그 앞발로 내 얼굴을 턱턱 쳤는데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나의 긴장이 무색하게끔 아무렇지 않아서 어리둥절했다. 혹시 나의 느낌이 잘못된 건 아닐까 얼굴을 몇 번 다시 갖다 대봐도 아프지 않았다. 아저씨의 힘이 약해진 건지 나의 힘이 강해진 건지 알지 못했으나, 아저씨의 가슴 근육이 그대로인 걸 봤을 때 아저씨의 힘이 약해진 것 같진 않았다. 나는 그저 놀고 싶었을 뿐인데, 캥거루 아저씨는 아무리 앞발질을 해도 내가 별 타격감이 없자 바싹 약이 오른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작은 화면으로 우리 모습을 들여다보며 사춘기 얼룩말이 캥거루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캥거루 아저씨가 들으면 억울할 일이었다. 꽃이 피는 시기가 오면 사람들이 더 많이 왔다. 조각조각 떨어지는 꽃잎 아래에서 사람들은 쩔쩔맸고 난 그 철없는 모습을 지루하게 바라보았다. 다만, 꽃 속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햇볕이 끓던 봄날이었다. 기쁨을 내지르며 마구 달리는 아이들을 보며 내 안에서도 뭔가 끓어올랐다. 엄마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 캥거루 아저씨의 시선을 의식한 허세 어린 무모였는지, 사람들이 얘기하던 사춘기 얼룩말의 반항심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울타리를 부수고 나가 저 세상을 향해 힘껏 달렸다. 나의 탈출은 충동적이었지만, 이미 내 유전자의 기억은 늘 저 밖을 달리고 있던 것처럼 달리는 게 자연스러웠다. 길을 따라 달리고 또 달렸다.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던 푸른 영혼이 내 몸을 깨워 달리는 것 같았다. 달리다 보면 그곳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여기가 초원이 아닐까. 내가 살아왔던 세상과 내가 달리고 있는 세상 어느 쪽이 진짜 세상인 걸까 생각하며, 맹렬한 혼돈 속을 쉼 없이 달렸다. 나는 숨통이 트일 만큼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이었는데, 사람들은 자동차 옆을 달리는 얼룩말이 비현실적이라고 했다. 자유롭게 달려본 적이 없던 나는 어쩔 줄 몰라 공백 없이 계속 달렸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는 너무 버거웠고 부자유보다 부자유스러웠다. 아무리 달려도 사람들의 추격권을 벗어날 수가 없었지만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통제된 자유 안에서 한참을 달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막다른 골목길이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주저하고 있었는데, 사육사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로, 괜찮아? 세로야.
사육사가 나를 부르는 소리는 내가 있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처럼 들려 아늑했다. 길들여진 세상에 대한 아늑함이라니. 왠지 모를 씁쓸한 치욕과 초원을 달리던 영광 사이를 헤매고 있을 때였다. 순간 탁탁 바늘이 꽂히면서 온몸에 힘이 빠져 눈꺼풀이 헐거워졌다. 몸부림이 쳐지지 않는 몸부림을 치며 잠이 들었다. 그리곤 다시 내가 살아왔던 세상에서 눈을 떴다. 꿈을 꿨나 보다. 울타리 부서지던 느낌이 온 몸에 생생하고 달리던 심장의 고동소리가 근육에 새겨진 듯 선명하여 꿈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달리는 꿈을 꾼 건지 꿈을 달린 건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 아직도 헷갈린다.
꿈은 내가 꿨는데, 울타리 밖 사람들은 나를 보고 꿈인 줄 알았다 한다. 사람들아, 나도 이 세상을 뛰어넘는 꿈을 꾼다. 나도 꿈속을 꿈처럼 달리며 눈부신 영광을 보았다. 그대들도 뛰어넘을 수 있는 건 얼마든지 뛰어넘어라. 실패한들 한낱 꿈으로 여기면 되지 않겠나. 어쩌면 지금 사는 세상이 한바탕 꿈일 수도 있다고 말하면 얼룩말이 건방지다고 할 테니 그만 얘기하겠다.
오늘도 울타리 안으로 햇볕이 오글오글하다. 바닥 모래는 알갱이 속에 내가 달리던 초원이 들어 있는 듯 반짝거린다. 캥거루 아저씨가 울타리를 앞발로 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캥거루 아저씨의 눈빛이 다르다. 아저씨도 꿈을 꿀 준비를 하나 보다.
- 2023년 3월 23일 오후 2시 40분경, 서울어린이대공원에서 사육하는 2019년 6월생 수컷 얼룩말 '세로'가 사육장을 탈출한 사건을 모티브로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