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아직은 그래도 그나마 영어가 프랑스어보다 낫다곤 하지만 외국어로 영화를 보는 건 여전히 고역이다. 당연히 많은 부분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스포를 하게 될 것이고. 영화를 보기도 전에 내용을, 그것도 핵심적인 부분을 안다는 건 굉장히 열받는 일이다. 더군다나 최근 한국에서는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 내용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영화 스포일러는 더 큰 금기가 된 듯하다. 물론 이 글의 목적이 한국 개봉을 앞둔 이 영화에 대한 스포는 아니다.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루겠지만 혹시 모를 스포에 대해선 이해를 부탁하면서.
올해 칸영화제에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단연코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두터운 마니아층의 독창성에 대중성까지 겸비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신작이다. 처음 칸영화제에서 올해 경쟁작들을 발표할 때 이 영화는 목록에 없었다. 그러자 한 기자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신작이 곧 나온다는데 왜 없는 거죠?"라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올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신작을 내놓는다고 하자 대다수의 영화 관계자들은 당연히 깐느에 나올 거라고 내다본 듯했다. 아무튼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신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추가로 경쟁작에 이름을 올렸다. 깐느 영화제에서 영화가 추가되는 건 종종 있는 일이라고 한다.
감독도 감독이지만 이 영화가 뜨거운 관심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배우들 때문일 거다.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 중에서도 '탑 오브 탑' 브래드 피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았다. 여기에 마고 로비까지. 브래드 피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수백억 대작 영화의 단독 주연을 맡아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배우들 아닌가. 잘생긴 데다 연기도 뛰어난 두 배우가 한 영화에 등장하다니, 팬 입장에선 굉장히 두근거리는 장면이다. 그것도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에서. 그것도 기대되는 조합이지 않을까?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제목에서도 드러나지만 이 영화는 "옛날 옛적 할리우드" 이야기다. 배경은 1969년 수많은 스타가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미국 할리우드. 서부극 TV 시리즈 스타인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그의 대역배우이자 로드 매니저면서 가장 친한 친구인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 중심으로 이야기는 흐른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줄기 중 하나는 내리막길을 내려올 상황에 처한 스타, 그를 통해 그려지는 인생의 희로애락과 개인의 내적 갈등, 그리고 이를 옆에서 무심한 듯 툭툭 다독여 주는 친구 사이의 우정 이야기다. 한물간 스타 취급받는 릭 달튼은 촬영 도중 자꾸 대사를 까먹는 자기 자신에 분개한다. 어리지만 자기만의 배우관을 지닌 당돌한 꼬마를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래도 배우는 배우인 것일까. 그는 고비들을 마주하며 혼신을 담고, 꼬마 배우의 귓속말에 흐느끼고 만다. 그리고 그의 친구 클리프는 그의 옆에서 "너가 누군지 잊지 마"라며 끊임없이 다독여준다. 정말이지 "그때 그 시절 할리우드에서는 말이야"라고나 할까. 물론 지금도 있는 일들이지만.
여기까지만 보면 인기스타의 흥망성쇠에서 나타나는 우리의 인생사, 개인의 고독과 그 동반자들, 역경과 극복과 같은 한 편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약 2시간 40분 정도의 러닝타임에서 개인적으로 체감상 앞의 2시간은 이런 느낌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이 영화의 주인공은 두 명이라는 것이다. 영화의 번체적인 줄기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통해 전개되지만 그렇다고 브래드 피트를 단순한 조력자 겸 친구로 남기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일이다.
영화 초반에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힌트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1969년 할리우드 자체가 그러하며 길거리를 배회하는 히피 무리, 릭 달튼 집 근처에 막 이사 온 당대 최고 감독 로만 폴란스키와 그의 부인이자 떠오르는 신예 여배우 샤론 테이트. 그리고 새로 이사 든 집에 찾아온 신원미상의 남자. 이 정도만 알아도 미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모를 사람은 몰라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떤 사건의 정초를 느낄 수 있다.
브래드 피트가 분한 클리프 부스 역시 단순히 인기스타의 대역배우이자 스턴트맨은 아니라는 것 역시 중간중간 조금씩 드러난다. 예를 들어 촬영 쉬는 시간 이소룡(진짜 이소룡인 건지, 아니면 그를 따라 하는 아시아계 무술 배우인지는 잘 모르겠다)과의 격투 대련이라든가 적대감으로 가득한 수십 명의 히피들을 혼자서 대면한다든가 같은.
영화를 보다, 이러다 자칫 요즘 유행하듯 나온 지난 문화에 대한 동경과 오마주가 잔뜩 담긴 영화들처럼 그 당시 할리우드에 대한 감독의 헌정이자, 인간 드라마로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몰려올 때 브래드 피트는 남은 40분을 우리가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기대하는 곳으로 멱살 잡고 끌고 간다. 잔혹하고 기괴하지만 유머러스하면서 재기 넘치는 그런 장면들로. 결국 이 영화는 두 가지 중심 이야기가 있는데 이를 축약한 한 문장이 '그때 그 시절 할리우드', 즉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로 집약된다.
여기서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라는 당대의 배우들이 필요했는지 얼핏 이해가 된다. 정상에서 추락하는 듯하다 다시 상승기류를 타면서도 불안함을 감출 수 없는 스타의 모습을 그리며 장장 2시간 가까이를 끌고 갈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하며, 한편에서는 그동안 조금은 덜 드러나면서 또 다른 주인공의 조력자로 있음과 동시에 무게감을 잃지 않으며 짧다면 짧은 40분을 터뜨릴 수 있는 배우가 있어야 한다. 만약 이 두 역할 중 한 명이라도 존재감이 부족하다면 두 이야기의 균형은 깨지고 만다. 어느 누구도 다른 배우에게 밀리지 않는 아우라, 쉽게 말해 '급'이 같아야만 했다. 당연히 감독 입장에서는 많은 좋은 배우들과 일을 하고 싶겠지만, 그 이상으로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의 조화는 여러모로 필수요소였다.
사실 두 번째 이야기 축과 관련해 영화 안에서 이야기하는 날짜가 굉장히 중요하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 배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를 함께 고려할 수밖에 없다. 일련의 소동이 벌어지고 일단락된 후 릭 달튼은 본인이 바라던대로 옆에 사는 로만 폴란스키의 집에 초대되는 행운을 얻는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난다. 하지만 실제 사건과 관련성을 따져보면 그에 따라 영화의 끝맺음과 엔딩 크레딧 중간에 삽입된 짧은 영상에 대한 의미가 더욱 분명해지지 않을까 싶다. 서로 결이 다른 두 이야기를 한 영화 안에 담았는지를 이해하려면 어쩌면 거쳐야 하는 작업인지도. 영화를 볼 때 이런 맥락을 몰랐는데 참고차 이것만 말하자면 실제 사건일은 1969년 8월 9일이라고 한다.
짧게 이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남기면 러닝타임 2시간 40분이 조금은 길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다. 드라마 안에서 조금씩 베일을 벗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긴장감도 영화를 몰입하는데 충분했다. 함께 영화를 봤던 와이프는 실제 사건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걸 몰랐다고 해서 긴장감이 떨어지거나 영화를 보는데 문제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조금은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바라는 유머러스한 기괴함이 덜하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글세 그것도 클라이맥스의 폭발을 위한 의도였다고 생각하면 좀 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