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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Oct 23. 2017

복수의 대리자

사형제 찬반 논쟁에 부쳐

다시금 논란이 제기됐다. 군중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참극의 상연을 목도한 관객은 격앙돼 외친다. “저 자를 죽여라!” 군중은 분노와 정의의 갑옷을 두른 채 사형의 집행을 명한다. 강호순, 김길태, 그리고 이번엔 오원춘. 김대중 정권이 취임한 이래, 한국에선 사형집행이 중지됐다.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것은 1997년 12월이다. 현재 국제 앰네스티는 한국을 실질적 사형폐지국가로 분류한다. 하지만 흉악한 범죄가 부상할 때마다 사형집행 재개가 도마에 올랐다.


 사실 사형제를 폐지하거나, 최소한 집행을 중지해야 하는 논리를 개발하기 위해 골몰할 필요는 없다. 현재 사형제 폐지는 세계적 추세다. 세계 200여 개 국가 중 140여 개 국가가 사형제를 폐지했거나 그에 준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실증적 연구에 의하면, 사형집행이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를 담지하지도 않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등가 보복의 원칙 또한 수천 년 전 함무라비 시대의 논리다. 현행 헌법은 인권의 존엄과 불가침성을 명시하고 있다. 사형은 지난 15년간 집행된 적이 없고, 오심으로 무고한 생명을 앗을 여지도 있다. 법적 안정성이란 측면에서도 취약하단 뜻이다. 무엇보다 형벌의 기능과 목적은 법익 보호, 인권보장, 규범성이다. 사형제는 이 중 어느 것도 수행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별도의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시해야 하는 쪽은 사형제 찬성론자들이다.


 하지만 사형집행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논리의 막다른 골목에서 전혀 다른 층위로 비약한다. 국민적 감정, 목숨에는 목숨, 유족의 아픔, 정의의 구현. 요즘 인터넷 광장에선 흉악한 범죄자에게 인권은 필요 없다는 노성마저 터져 나온다. 논리와 이성적 판단이 아닌, 추상적 대의와 감정의 터울에 자리 잡는 것이다.


 사형제 찬성론자들은 국민 여론을 앞세운다. 국민 정서가 사형집행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법이란 것은 사회의 현재적 합의에 근거한다. 때문에 이런 주장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전에 따져봐야 할 것이 있다. 그 여론과 정서가 올바른 규범적 판단에 포개진 것인가. 사형은 처벌 수단으로서의 가치판단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설령 죄질이 극악해 응분의 가중처벌이 필요한 경우라도, 반드시 사형으로 처벌할 논리적 근거는 없다. 죄질에 따라 종신형이나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 또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윤리적 측면에서도 천부인권을 부정하는 사형제는 합리화될 수 없다. 방법 자체에 결함이 있는 처벌을 오직 국민의 정서를 이유로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들은 오원춘 같은 살인마로 인한 유족의 아픔을 달래야 한다며 사형 집행을 주장한다. 그 아픔이 범죄자의 죽음으로 해소될 거란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모든 유족이 범죄자의 죽음을 원할 거란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범죄자에 대한 미움은 깊지만, 종교적 이유로 또는 정치적 신념으로 사형에 반대하는 경우도 존재할 수 있다. 몇 명이 어떤 방식으로 살해됐건 유족의 슬픔은 심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숱한 강력 범죄의 경우엔 유족을 달랠 필요가 없을까. 그렇다고 사형집행 범주를 늘린다면 그만큼 오심의 가능성도 커지는 셈이다. 법은 단지 원한을 달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유족의 통한을 씻기 위해 실익과 근거가 불분명한데도 인권 체계를 무너트릴 순 없다. 이런 논리라면, 국가가 복수를 위해 청부살인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게다가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국가는 왜 책임을 지지 않는가. 범죄가 만연할 토양이 된 시스템에 대한 책임은 묻어 둔 채, 개인의 목숨으로 일거에 공분을 해소하려는 건 무언가. 이것은 국가와 군중이 유족의 이름을 빌려 행하는 차도살인 아닌가.


 한국은 전통적으로 강한 국가, 약한 사회의 경향을 이어왔다. 이런 경향은 87년 이후 완화됐지만 MB 집권 이후 다시금 역전되었다. 용산 참사는 국가권력이 어떻게 국민을 합법적으로 살해할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4.3 제주도와 5.18 광주를 기억하는가? 사회는 국민의 목숨마저 짓밟던 폭압의 고샅을 힘겹게 지나왔다. 10여 년 전 결정된 사형집행 중지는 그 세월에 맞서 지난하게 싸워 온 인권의 승리다. 한데, 국민은 오늘 힘겹게 얻은 결실을 국가에 다시 헌납하려 한다. ‘정의’의 이름으로 ‘인권’을 부정하는 것. 이것은 인간의 생명을 좌우할 권한까지 국가에 내어주겠다는 것이다. 정의는 이성과 합리적 합의를 전제하는 개념이다. 결국, 이 뜨거운 열기는 정의를 향한 실천이 아니라 복수와 응징, 정념의 분출에 가깝다.


 막스 베버가 얘기했듯, 국가는 물리적 강권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하는 유일한 존재다. 국가는 국민을 강제로 연행하고, 신체의 자유를 박탈할 수도 있다. 그 폭력의 행사 방식을 규율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이런 법률의 집행 기준을 정해야 한다면, 그 자리엔 즉자적 공분이 아닌 이성과 합리가 들어서야 할 것이다.


 법은 살인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국가는 정의의 이름으로 행하는 ‘복수의 대리자’가 아니다. 사실 나는 그 복수란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위급 관료의 부정부패, 사회가 외면한 이들의 비참한 죽음, 교육시스템이 부른 학교 폭력, 국가가 예방하지 못한 참혹한 범죄. 사람들을 포위한 불의가 강도를 더해갈 때마다 어느새 사람들은 분노를 자동 발화한다. 그리고 분노의 총량이 임계점을 넘으면 급기야 핏 값을 통해 정의를 세우라고 격렬히 부르짖는다. 국가가 방치하고 자행한 부조리에 억눌린 정의, 그 책임을 묻는 대신 되레 그 집행을 국가의 손에 맡기려 하는 것이다. 이 뜨거운 군중의 노성.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어쩌면 사회가 군중에게 가하는 일상적 가학에 대해 유족과 정의의 이름으로 명하는 복수의 카타르시스는 아닐까. (2012/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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