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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Oct 04. 2018

지식인과 떡볶이

황교익은 요즘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인물 같다. 아마도 그가 다중을 무시하는 말버릇을 쓰기 때문이다. 정중하게 할 수 있는 주장도 그는 강퍅하게 뱉는다. 번번이 논란을 사서 부르고 그때마다 반론을 윽박지르기 급급한 모습을 보면 딱히 전략적인 언사도 아닌 것 같다. 황 씨가 비난당하는 요점은 거만한 말투로 사람들을 가르쳐대는 엘리트주의자라는 것이다. 거기 더해, 그간 그가 뱉은 일본 음식 예찬과 한식 비판에 대응해 반민족주의자라는 비난도 있는 것 같다. 만인이 존경하는 백종원을 물고 늘어지는 ‘질투심’도 밉보이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 황 씨가 품은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중요한 건 말투보다 내용이다. 말투가 쟁점이 된다면 논의가 “같은 말도 곱게 합시다”라는 ‘인성’으로 단순해진다. 한국처럼 지식인과 다중의 지위가 소비자주의에 입각해 역전된 사회에서 지식인이 으스댄다고 실제로 다중이 소외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일식이 한식보다 나은 점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겠는가. 요는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검증해보는 것이지, 한식을 폄하했다는 사실이 죄는 아니다. 비판은 공론에 시동을 거는 열쇠인데, 한국은 공적 비판에 너무 예민하다. 백종원은 굶주린 이들을 굽어살피는 성인이라, 그를 비난하면 그 취지가 ‘질투심’으로 싸잡혀야 하는가? 그것도 현명한 반응은 아닌 것 같다.


나는 황 씨가 뱉는 말이 다 어불성설이라 보지는 않는다. 설탕을 퍼 넣는 음식을 향한 일관된 적개심을 보아도 그렇고, 그는 맛있는 음식의 기준을 세우는 데 몰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입맛은 제각각이라지만 맛에도 보편성, 객관성이 있으리라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다. 재료 본연의 향과 맛, 식감을 살려 다채로운 미각 체험을 선사하는 것이 좋은 조리법이라 말할 수도 있고, 취향을 불문하고 누구나 기피하는 맛도 있다. 가령 질기고 누린내 나는 고기가 맛있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보편성, 객관성은 유일함, 절대성과 같은 말이 아니다. 맛에 관한 객관적 기준은 다층적으로 공존할 수 있고, 제각각 장단점이 있을 수 있다. 떡볶이처럼 양념을 강하게 쓴 음식이 주는 달고 매운맛에도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다만, 강한 양념에 길들여져서는 담백한 맛을 느끼는 버릇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충고할 수는 있겠다. 그러니까, 맛에 관한 다양한 기준과 제반 지식을 소개해 서로 상보하게 하며 선택의 폭을 넓혀 풍부하고 자유로운 식문화를 꾀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음식 문화를 소재로 비평하는 사람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 아닐까? 음식 문화는 몸에 좋고 나쁘고, 맛이 있고 없고의 문제이지, 그 이상의 규범성을 요구하기는 힘들다는 특성도 감안해야 한다. 이건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라는 것과 다른 이야기다. 그런 입장은 “맛있으면 그만”이라며 모든 것을 주관화해 논의를 무력화한다.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면서도 그 바탕을 평가해 보기도 하며 취향을 넓혀가는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황 씨는 객관화된 기준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판단에 강력한 당위를 부여한 후 선정적 표현을 써서 다른 기준들이 설 자리를 없애 버린다. 음식 비평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음식에 관한 논의 지평을 획일화하는 것이다.


어떤 분야든지 비평에서 가치판단이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황 씨의 경우 가치판단을 논증하는 과정이 묘연하고(“떡볶이는 계속 먹게 만드니까 맛없는 음식이다.”) ‘맛있다’ ‘맛없다’의 정의를 잘 설명하지 않은 채 단언하는 인상이 든다. 맛있는 음식은 미식美食이라고 하는데, 아름다움에 누구나 감응하는 공통된 속성이 있는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형성되는 것인지는 고대로부터 근대, 근대 이후로 이어지는 철학적 주제고, 보편성과 상대성의 경계는 가늠하기 쉽지 않다. 황 씨의 말에는 자신이 미는 맛있음의 정의가 무엇이길래 그토록 배타적으로 외치는지 망설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단호하게 뱉은 기준을 뒤집은 정황이 종종 보이니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다(자신이 맛없다고 평한 음식/식품 광고를 맡은 이력들). 이런 모습을 독선적이지만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지식인의 고집이라고 평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에게는 어떤 잣대를 요구하면서 자신이 지켜야 할 잣대가 무엇인지는 고민하지 않는, 자기 윤리가 없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비치진 않을까?


황 씨는 지식인이라 자부하고, 여론의 비판에 대항해 지식인의 권위를 의식하는 것 같다. 이때 그가 인용하는 것이 ‘인문학’인데, 다중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지식인의 사명이며 인문학의 역할이라는 투로 말한다. 그러나 그가 인문학을 빌려와 사용하는 용도는 거시적 지식을 바탕으로 무리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치킨과 떡볶이가 맛있는 이유는 사회적 세뇌’, ‘전라도 음식이 맛있다면 맛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말이 그렇다. 음식 취향이 사회문화적 요인을 통해 구조적으로 형성될 수 있다고 하면 무리한 논리가 아니지만, 사회적 세뇌는 불필요한 논란을 부르는선정적 표현일뿐더러, 거의 임상 심리학으로의 월장이다.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와 별개의 전문적이고 실증적인 근거가 필요한, 아무리 좋게 봐줘도 가설에 불과한 주장을 확신에 차 뱉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전혀 새로운 상상력도 아니다. 황 씨는 인문학의 위력이 통속적인 것을 반성하는 데 있다고 말한 적 있지만, '사회적 세뇌' 같은 논지야 말로 세상사를 틀에 박힌 음모론으로 수렴시켜 단순화하고 더이상 생각할 여지를 돌아보지 않는 상투성이다. 이는 오늘날 인문학이 영위되는 구태와 같다. '한 마디 좋은 말씀'에 지적 권위를 세우고, 다른 분과 학문을 자의적으로 넘나드는 인상비평을 보편적 진리로 내세운다. 


‘세뇌’는 간편한 말이다. 남이 뭐라고 느끼고 뭐라고 말 하건 ‘세뇌’된 결과에 불과하니까.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는 결론을 무조건 도출할 수 있는 프레임이다. 황 씨가 즐겨 뱉는 '악플러' '기레기'도 마찬가지다. 이는 자신의 말이 검증당하는 책임을 거절하는 것이며, 피드백의 창구를 닫아놓고 자신의 말에 일방적으로 권위를 부여하는 태도다. 여기서 제거되는 건 반론의 존재를 긍정하고 힘을 다해 재 반론하며 더 나은 의견이 도출되도록 경쟁하는 논쟁이다. 공론장에서 말을 퍼트리는 권한, 이름을 걸고 발언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방송매체 출연을 통해 널리 알려진 ‘지식인’이 이런 행태를 계속해서 노출한다면, 지식인을 향한 불신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중과 지식인이 서로를 인정한 채 논의를 주고받을 여지를 자꾸만 더 없애버리는 행위다. 황 씨가 비판 여론을 무지한 자들의 반감이라 일축하는 태도는 단순한 말투가 아니라 이 점에서 문제다. 공론장을 가꿔야 할 오피니언 리더가 공론장 환경을 해치는 것이다.


짧게 쓰려고 한 글이다. 쓰다 보니 길어졌는데, 글을 쓰면서도 회의감이 들었다. 이게 과연 정색하고 말을 얹을 무게가 있는 소재일까. 언제부턴가 미디어에 출연해 어려운 말을 쉽게 번역해 주는 사람, 어렵게 말할 문제를 쉽게 단정 짓는 사람, 인문학을 무언가 고상한 것으로 치환하고 지위재로 판매하는 사람, 당파성의 대의를 주창해 주는 사람들이 ‘지식인’으로 대접받는다. 혹은 사회적 주제를 향한 선정적 발언으로 악명을 얻어 유명해지는 인물들이 있다. 비록 황 씨는 지금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만, 그 사람들이 찬양하는 ‘지식인’이라고 특별히 다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식인의 모습은 그 사회 공론장의 모습과 멀지 않다. 황 씨를 욕하는 사람 중에도 평소 '알바'니 '기레기'니 '선동당한 댓글' 같은 말을 예사로 쓰며 나와 다른 의견을 프레임에 욱여넣는 폐쇄적 자기 확신에 빠진 이들이 있겠다. 이런 사람을 아무나 한 명 골라 발언권을 쥐어준다면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황 씨를 둘러싼 논란에 염증이 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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