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여론을 움직이려면 몇 명의 입이 필요할까? 국민 숫자가 오천만인데, 그 과반수 이천만 명은 돼야 하지 않을까? 그 정도 숫자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가능할까? 하지만 그저 여론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건 어떨까?
특정 게시물을 잘 보이는 곳에 노출하며 이슈화하기 가장 좋은 곳은 인터넷 커뮤니티다. 대형 커뮤니티의 경우에도 추천 수 수십 개 정도면 베스트 게시판에 올라가 반나절은 머문다. 한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글을 다른 커뮤니티에도 퍼간다. 사용자 연령대와 성별이 다른 커뮤니티를 순회하며 연쇄작용이 일어난다. 이제 SNS에도 그 글을 퍼간다. “지금 인터넷에서 난리 난~” 같은 제목이면 적당할까? 다음은 기자들이 포털에 기사로 옮길 차례다. 취재를 하는 대신 웹서핑으로 기사를 '퍼오는' 기자들이 널렸단 건 다 아는 사실이지 않나? 다른 기자들이 그 기사를 출처로 또 다른 기사를 복제해 조회 수를 벌어먹는다. 그러는 동안 기사 표제와 워딩은 더 선정적으로 둔갑한다. 이제 포털을 주로 이용하는 나이 대 많은 인터넷 사용자들도 “무언가 사건이 터졌다” 생각할 수 있다. 이 모든 유통 과정은 ‘단톡 방’ 같은 오프라인에 기반을 둔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병행돼 인터넷을 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공유될 수 있다. 이론상으로, 조직력 강한 인터넷 유저 수십 명, 그들이 각각 보유하는 멀티 아이디 몇 개만 있으면 대한민국 여론을 창조할 수 있다. 흔히 ‘댓글 알바’ ‘댓글 부대’라고 불리는 그들이다.
물론 이건 시나리오다. 여론에 장난질을 치는 게 아무리 그래도 만만할 리는 없다. 실제로 인터넷 게시판에는 “이거 누가 베스트 게시물을 조작하는 거 아닙니까?”라는 투의 방어기제가 촘촘히 펼쳐져있다. 게다가 이런 시나리오는 누군가의 주장을 접하면, 그것이 자신의 성향과 배치돼 ‘듣기 싫은’ 주장이라면 더더욱, ‘배후’부터 의심하며 조작된 것이라 부정해 버리는 음모론적 사고로 빠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를 더 심화하는 건 이런 반대 정황에 있다. 왜 커뮤니티에 여론 조작을 방어하려는 관성이 마련되었을까? 실제로 사회 뉴스를 통해 여론 조작을 꾀하는 브로커까지 있다는 사실이 공인되었기 때문이며, 커뮤니티마다 ‘외부’에서 유입한 ‘작업 세력’이 적발된 전례가 흔하기 때문이다. 더 솔직하게 꼬집으면, 인터넷 유저들 스스로가 특정 정당의 지지자 혹은 반대자로서, 어떤 아이돌의 팬덤 혹은 안티 팬으로서 '자발적 댓글부대'로 암약하거나 그것을 목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체감된 사실을 통해 게시물 내용의 타당함을 따지기보다 게시물 작성자의 ‘가입일’과 ‘이전 게시물’을 문제 삼는 의심증이 명분과 타당성을 얻는다.
여론 조작에 대한 방어기제는 개개인의 이념 성향과 가치관에 따라 선택적으로 강화되거나 약화된다. 누구나 자신이 동조하는 의견보다 동조하지 않는 의견의 신뢰성을 의심하기 마련이고, 특정 커뮤니티와 네트워크에는 비슷한 성향을 지닌 사람끼리 모이기 마련이다. “가입일 보기는 진리”라는 구호 아래, 소수 의견은 시작부터 정당성을 부정당하며 철저히 배척당하고, 다수 의견은 반박당할 틈도 없는 진영논리의 철옹성이 된다. 그 결과 현재 각각의 인터넷 커뮤니티는 정파성과 이념성에 따라 폐쇄성이 더욱 새카매졌고 그들 사이 전선도 두꺼워졌다. 개중엔 특정 시기 대거 유입한 유저들로 인해 커뮤니티 성향이 희석된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작업 세력’에 점령당한 반면교사가 되어 다른 커뮤니티들의 ‘검문검색’은 더 강화된다. 게다가 각각의 커뮤니티를 청군과 백군으로 통일하고 양분해주는 정체성이 걸린 사안에 관해서는 다수의 커뮤니티가 연합해 공동 전선을 구축한다. 이것이 바로 현재 젠더 이슈가 소통될 수 없는 피아식별 마크가 된 까닭 중 하나다. 남초 커뮤니티 어디를 가도 페미니즘에 관해 우호적 입장을 말하면 ‘여초 사이트에서 넘어온 첩자’로 닉네임이 메모당하고 만다.
과거의 음모론이 내러티브였다면 이러한 음모론은 애티튜드다. 음모론은 황우석 사태, 타진요 사태와 같은 망상적 시나리오로 제창되어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 논박되었을 때 기각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어떤 사람들은 음모론을 사회 이슈를 대하는 태도, 심지어 사회 이슈를 실천하는 태도로 무장한 채 살아간다. 이건 바로 잡을 팩트도 논거도 없는 심리적 경향이기에 반박할 수도 없다. 이것을 음모론 이후의 음모론, 포스트 음모론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건 인터넷을 통해 일어나는 현상이며 진짜 세상은 인터넷 밖에 있으니 과장하지 말라고 타이를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사회는 온라인에서 생산되는 이슈가 사회 이슈를 과잉 대표하는 상태다. 모바일 네트워크의 시대가 온 지 한 참이고, 커뮤니티와 SNS가 난립하며 미디어 플랫폼 사이 이슈 유통성이 고도화됐다. 어느 한 곳에 불이 나면 다른 곳으로 빽빽이 붙은 초가집 지붕을 타듯 번진다. ‘리얼 월드’에서 지인들을 통해 체감되는 의견 표본은 고작해야 십 수 명이지만, 온라인에 로그인하면 모두가 그 화젯거리에 관해 떠들며 세상이 들썩이는 것 같다. 이런 괴리감은 온라인 이슈의 허구성을 비웃는 냉소주의("바보야, 세상은 인터넷 밖에 있다고!")로 흐르거나 온라인 이슈에 파묻힌 채 균형감각을 상실하는 과몰입에 빠지게 하기 쉽다.
미디어와 공론장은 끝없이 이슈를 만들고, 증폭하고, 새 이슈로 밀어낸다. 이 이슈 초과잉 사회에서 무엇이 진짜 이슈이며 무엇이 조작된 것인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혹은 이미 확신한 상태로 정해진 입장을 말한다. 음모론은 더 이상 앎을 통해 계몽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이슈가 유통되는 사회 인프라를 개혁하며 시민들 몸에서 벗겨내야 하는 대상이란 건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