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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Sep 25. 2022

실화로의 도피

<수리남> (윤종빈, 2022)

<수리남>은 세계적으로 인기가 좋다. 반면 어떤 논란들도 불렀다. 하나는 수리남이란 국가를 마약 범죄의 온상으로 왜곡했다는 수리남 정부의 항의다. 수리남 정부는 제작사 측에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나머지 하나는 한국 언론을 중심으로 인터넷에서 공유된 논란이다. <수리남>에 여성 캐릭터가 없으며 한국 누아르 장르의 남근주의가 답습된다는 비난이다(‘멀고 낯선 땅 수리남…그러나 한국 ‘남초 영화’의 관습은 반복된다’, 위근우의 리플레이, 중앙일보). 재밌게도 논조가 다른 두 비판에 윤종빈 감독이 대응하는 논리가 동일하다. ‘이 드라마는 실화를 가져왔기에 그대로 표현했을 뿐’으로 요약되는 해명이다. 의견을 밝히자면, 나는 수리남 정부의 입장에는 동의하고, 후자의 비난과 윤종빈 감독의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수리남>에 남성 중심적 태도와 젠더적 관점에서 비평할 대목이 있는 건 맞다. 하지만 남성 캐릭터만 나온다, 몇몇 장면에서 선정적 묘사가 있고 욕설과 폭력이 이어진다는 건 표피적인 부분이고 보편적인 장르 관습이다. 그것으로 드라마 전체를 규정하는 건 과장이고 흑백논리다. 그런 종류의 선정적 묘사가 사회고발로 위장하며 성접대 장면을 향락적으로 보여준 <내부자들> 같은 영화만큼 윤리적 위험이 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수리남>에 깔린 남성 창작자의 편향은 좀 더 구조화된 연출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수리남>은 수리남이란 국가가 서사 배경의 거의 전부이고, 그 사회적 성격이 텍스트 내에서 배경 지식으로 제공된다. 이 드라마는 거대 글로벌 플랫폼 넷플릭스에 걸려있고,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 성공을 거둬 K-드라마에 관심도가 높은 상태다. 게다가 수리남은 국제 사회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위상이 약한 국가다. 대략 15년 전 벌어진 사건을 옮긴 드라마를 통해 수리남의 현재에 관한 인식이 선입견으로 물들 소지가 있고 수리남 정부와 국민들이 부당해하는 마음은 이해할만하다.     


'실화를 그대로 옮겼을 뿐'이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을 극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내러티브에 따라 취사선택이 일어난다. 실제 사건을 가공한 각본과 실제 인물을 대체한 배우들, 카메라 프레임으로 재현된 사실은 결코 사실 자체로 남을 수 없다. 가령 K 씨의 신원과 행적 중 영화적 양식과 창작자의 기준에 따라 어떤 부분을 어떻게 바꿀지, 수리남의 실정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설정을 얼마나 신중하게 다룰 것인지는 모두 선택에 달려 있다. 실제로 윤종빈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영화적 개연성 등을 위해 이러저러한 부분을 각색했노라 자기 입으로 말하고 다녔다. 그럼에도 논쟁이 되는 연출에 관해선 "실화"라는 말을 손쉽게 변명거리로 쓴다. 내가 들여다보고 싶은 건 이 모순된 태도다. 이 극화가 어떤 태도로 실화를 다루는지 살펴보며 두 가지 논점을 아우를 것이다.     


<수리남>의 '실화'는 2000년대 중반 국정원과 속칭 K 씨가 공조해 한국인 남미 마약상 조봉행을 체포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실화는 그것을 각색해 플롯의 구조물로 삼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와 효과가 있다.     

<수리남>은 실화를 인용하는 이중 구조로 연출돼 있다. 하나는 드라마 바깥에 존재하는 K 씨의 실제 사건이 극화로 각색된 연출 구조다. 하나는 드라마 안 편에서 K 씨 역을 맡은 강인구가 수리남에서의 경험담을 회고하는 내레이션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구조다. 즉,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이야기 내부의 ‘실화’로 소개하는 것인데 내레이션은 “믿기 힘들겠지만 이 이야기는 다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다.”라는 강조로 끝난다. 이것은 이야기 자체가 허구로 연출되는 일반적 극화에서는 불필요한 방백이다. 이 강조는 드라마 릴리즈와 함께 널리 알려진 K 씨 실화를 암묵적으로 가리키고 시청자에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은연중에 실화를 염두에 둔 채 드라마를 보도록 두 개의 실화를 중첩한다.     


<수리남>이 실화를 각색한 다른 극화들, 현실을 알릴 목적으로 제작되는 사회 드라마 등과 다른 점은 실화를 통해 구성된 장르물이란 점이다. 그 실화는 윤종빈의 표현을 빌리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을 만큼’ 장르물의 플롯을 이미 가지고 있다. 윤종빈은 지금껏 몇 편의 장르물을 만들어 왔고, 공간과 현실적 기호의 연출을 통해 장르를 다루는 재질을 발휘했다. 그의 장르물에서 공간은 영화의 장르성을 구체화하고 장르의 이식과 혼성을 가능케 하는 토대였다. 거기에 장르 바깥의 현실적인 캐릭터가 진입하며 장르가 변주되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논평이 이뤄지거나 시대상이 마련될 수 있었다. <범죄와의 전쟁>에선 경상도 지역 색을 걸친 마초 건달들 사이로 허세 덩어리에 남성적으로 열등한 ‘공무원’ 최익현이 끼어들었다. 장르적으로 엉뚱한 인물을 통해 그 시대 가부장을 풍자하는 효과를 줄 수 있었다. <군도>에선 지리산이란 공간에서 스파게티 웨스턴을 재현하며 무협 장르와 혼성했고 의적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민란’이란 시대상을 표방했다. 다만, 이 경우는 지배 계급 대 민중 세력의 대립 구도가 요식적이라 장르 이식을 성립시키기 위한 환경으로서의 시대상에 머물렀다.     


<수리남>은 <범죄와의 전쟁>에 비해 현실에 대한 비평 의식은 후퇴하고 온전한 장르물이 되었다. 한국적 누아르물과 첩보 영화, 수사물, 언더커버 등 실로 다양한 구성이 뒤섞이는 트로피컬한 혼성 장르물이지만, <군도>처럼 장르 이미지가 과잉되는 이물감은 없다. 연출 기술이 준수한 덕도 있겠지만, 수리남이 지리산에 비해 훨씬 장르적으로 적합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인구 60만의 먼 남아메리카 다인종 국가, 이곳이라면 국내에선 실정과 맞물리지 않아 제작되기 힘든 국제 마약 수사물을 만들 수 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장소이기에 사회적 특성을 바탕으로 각종 장르적 도상을 원형 그대로 조립하는 상상력의 휴양지가 됐다. 그 결과 황정민으로 계열화되는 ‘한국 남자 영화’와 장첸에게서 연상되는 홍콩 누아르 이미지가 소실 없이 만나 대결하고 ‘미드’에서 볼 법한 미국 마약 수사국이 개입하는 진귀한 광경이 태어났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마약 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한다는 내레이션은 수리남에 대한 배경 지식을 콘텍스트로 제공하고, 거기서 실제로 벌어진 조봉행 ‘실화’가 보는 이의 의심을 차단하는 방어 기제가 된다.     


<수리남>이 품은 서사적 불리함과 유리함은 모두 '실화'에서 비롯한다. 일반인이 홀로 마약밀매 조직에 잠입해 첩보원으로 암약한 사실을 각색한 데서 오는 필연적 반응이다. 감독과 배우가 고백했듯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어?”란 예상 가능한 반문이 뒤 따라온다. 그러면 “왜 안 돼?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라고 대꾸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이중의 실화 구조는 저 반문을 미리 처리하기 위해 보는 이들에게 요청된 관람의 태도다. <수리남>은 서사 개연성의 많은 부분을 서사 바깥에 존재하는 실화가 대체하는 드라마다. 윤종빈은 드라마 발표 후 인터뷰마다 실화를 언급하고 있고 언론 매체를 통해 K 씨 이야기가 다시금 알려지고 있다. 논점은 이 상황을 이용하는 창작자의 태도다. K 씨 실화는 상당 부분 각색으로 뒤바뀌었다. K 씨의 실제 인물됨과 다른 강인구의 성격, 목사로 뒤바뀐 조봉행, 창작된 장첸 조직의 존재, 추가된 언더커버 요원, 강인구가 직접 전요환을 추격하는 결말 등 인물 설정과 플롯 전개 같은 큰 틀은 물론 디테일까지 추가됐다. ‘실화를 가져왔다’는 말로 합리화될 수 없는 대목이 너무나 많다.     


<수리남>에서 가장 지루한 인물을 꼽자면 아이러니하게도 주인공 강인구다. 그는 내 집 마련과 가족의 존속을 위해 분투하는 가장이며 최익현처럼 장르적 세계에 흘러들어 간 현실적 인물이다. 즉, 한국 가장이 수리남이란 다문화/장르물 월드에서 벌이는 모험이 이 이야기의 줄거리다. 부제는 ‘이세계로 간 K-아저씨’ 정도일까? 하지만, 최익현의 경우 장르적으로 무능한 인물이 겪는 수난과 불협화음이 서사에 입체감을 주고 주제의식을 생성했다면, 강인구는 장르적으로 맞지 않는 인물이 유능하기 그지없게 모든 국면을 헤쳐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강인구에게 공감이 잘 가지 않고 그의 존재가 장르적 긴장감을 해치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 지점에는 동 세대 ‘한국 남자’에 대한 창작자의 자의식이 투영돼 있는 것 같다. 


강인구의 무기는 ‘헬조선’에서 단련된 남성 주체로서의 처세술이며 ‘사회생활’의 본질을 읽는 감각이다. “세상에서 제일 믿지 못할 게 공무원”이라는 신조로 무장해 뒷돈을 찔러 주며 ‘쇼부’를 치는 ‘내공’이 있다. 마피아 보스들 앞에서 큰 소리 떵떵 칠 정도로 담력과 화술도 좋다. 그러면서 마피아들을 쓰러트릴 만큼 싸움을 잘하고 무장 가드들과 총격전을 벌여 승리한다. 이렇듯 과잉된 인물 설정은 다른 인물들에 비해 명백히 작위적이다. 실제로 유사한 일을 겪은 실존인물 K 씨의 존재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설정이다. 뒤집으면 ‘실화’를 빌미 삼아 부풀린 인물 설정인 것이다.     


하나 더 주목할 인물은 강인구와 짝패로 활약하는 국정원 팀장 최창호다. 이 역을 맡은 박해수의 연기는 묘하게 경직된 상태로 과장돼 있다. 국정원 팀장일 때는 지나치게 딱딱하고 마약 도매상으로 위장할 땐 지나치게 경박하다. 1인 2역의 온도차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그다지 성공했다고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그 차이로 인해 어딘가 모르게 신이 나서 서투른 역할 놀이를 한다는 인상이 든다. 달리 말하면, <수리남>은 두 명의 ‘아저씨’가 누아르 세계에 들어 가 건달과 첩보원으로 살아 보는 VR 게임이다. ‘남자 영화’의 정조를 동경하는 동년배 한국 남자들에게 의사 체험과 대리만족을 줄 법한 구도다. 나아가 그런 종류의 판타지가 글로벌한 세일즈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한국 남자’ 캐릭터의 보편성, 경쟁력에 관한 믿음에서 나온 연출일 수 있다.  


윤종빈의 필모그래피를 돌아 보면 남성성이란 화두에 천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용서받지 못한 자>와 <범죄와의 전쟁>은 남성 사회 내부의 논리와 폭력을 비판적으로 다뤘다고 평가받았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젊은 남성 창작자로서 자신의 세대 집단의 시선과 경험으로 자신이 속한 남성 사회를 바라본 것에 가깝다. 그로 인해 여타 '남자 영화'들과 일정 부분 다른 관점을 제출할 수 있었지만 남성성 자체를 객관화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비판은 기성 남성 세대를 향했고 젊은 남자라서 겪은 지옥에 관해 관찰 보고서를 썼다. <범죄와의 전쟁>은 장르를 성찰했다기보다 장르를 통해 최익현을 비추었고, 남성성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통속적 방식으로 전시되었다. 


이 관점에서 윤종빈의 필모그래피를 연결해 보면 우연찮게도 현재 청장년 남성들이 넷 상에서 분출하는 자의식과 포개지는 걸 알 수 있다. 남자들의 피해자 의식을 성립케 하는 원 경험으로서의 '군대'(<용서받지 못한 자>), 뒷 세대 남성을 밟고 존속하는 기성 남성 세대를 향한 적개심(<범죄와의 전쟁>)이다. 그리고 '결혼'이 젊은 남성들 최대의 난관이자 그 반동으로 좌절감이 폭발하는 시대에 <수리남>은 가장은 가장이 되었다는 사실 만으로 존경할 만하다고 전도한다. 10년 전 <범죄와의 전쟁>에서 아버지 세대를 거침없이 풍자하던 윤종빈은 강인구와 동년배로서 역시 ‘아버지’가 된 후에는 자신의 세대를 가부장 판타지로 묘사하고 있다.


윤종빈은 강인구가 전화 면접으로 아내를 뽑는 장면의 개연성에 대한 질문에 ‘K 씨의 실화’라고 설명했다. 실화는 극화를 대체할 수 없다. 창작자가 보여줘야 하는 건 실화를 참조하지 않고도 드라마 자체로 납득될 수 있는 자기 완결적 구성이다. K 씨의 경우에도 그렇게 되기까지 만나고 알아 가는 과정이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수리남>에선 보는 이가 납득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도 없다. 여자는 전화 한 통에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나 아내가 된다. 다음 장면부터 곧장 집안 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며 가장에게 필요한 기능을 제공한다. 6부작이나 되는 드라마지만 이후에도 강인구가 아내는 물론 자식들과 제대로 교감을 나누는 에피소드는 나오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투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난무하지만, 가족의 존재는 가장의 자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소도구로 진열될 따름이다.      


<수리남>에서 어떤 퇴행을 찾을 수 있다면 남자들만 등장한다거나 집단 섹스를 집어넣었다는 이유 따위가 아니다. 실화와 극화를 편의적으로 오가며 창작자의 책임을 방기하고 합리화하는 기회주의와 내집단에 함몰된 채 자기 객관화에 실패하고 사회의식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채 나이를 먹은 창작자의 자화상이 물씬거리기 때문이다. <수리남>은 장르를 재현하는 기술적인 부분에서 우수한 드라마지만, 실화란 명분으로 도피하는 적지 않은 순간이 실소와 실망감을 자아낸다. 남성성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 온 윤종빈은 커리어의 최근에 이르러 남성성에 관한 가장 상투적이고 도취적인 결론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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