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찌개 육수를 내야 하는데. 다시마가 없다. 오늘은 반드시 맞춤하게 잘라놔야지.. 넉넉하게 다시 멸치도 한 줌 넣고. 감자는 깍둑 썰고 양파, 호박은 충분히. 다음은 청양고추. 지난번엔 다지면서 고추씨가 눈에 튀어 어찌나 매웠던지. 이번엔 좀 살살. 파를 숭덩숭덩 썰고, 두부는 보기 좋게 하지만 먹기도 좋게. 다진 마늘만 내놓으면 야채 준비 끝. 드디어 된장 독 차례. 숟가락에 밥공기 하나 들고 된장 푸러 마당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이젠 장대비가 쏟아져도 그러려니, 뙤약볕이 내리쬐도 눈을 찌푸리지 않을 만큼 된장 푸러 가는 일에 익숙해졌다. 다만 이번 겨울나고 새봄이 오면 독 안의 된장은 묵은 된장이 될 텐데, 콩을 삶고 메주를 띄울 일이 더는 없을 테니 독 바닥이 보여도 더 이상 채워질 일도 없지 싶다. 이제 된장 푸러 나올 일이 없어지는 거다...
반년 전. 복잡하고 예민했다.
눈으로 직접 본 엄마의 몸 상태는 타향에서 전해 들어 속상한 것의 몇 배로 나를 더 속상하게 했다. 그런데 늙고 지친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더 무력한 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고 있는 나도 언젠간 엄마처럼 될 거라는 거였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고 살아야 살아지는 사실. 그런데 이젠 모른척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똑바로 마주하며 견뎌내야 할 시간이 시작됐다.
아픈 부모를 돌보는 일의 가장 우선은 뭐라도 맛있게 한 끼를 드시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깥으로 도는 일이나 잘할까 꼼꼼하게 살림을 살아보지 못한 나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허둥거리기부터 했다.
그리곤 뭐든 좋아하는 음식부터 차려드리자 싶어 생각해 냈다는 것이 친정집 밥상의 시그니쳐 메뉴인 된장찌개.
된장찌개야 된장만 풀면 불이 해주는 음식이니 오죽 수월해! 거기에 나물 두어 가지 무치는 것부터 하면 되지.. 하며 부엌을 차지했는데, 그 쉬운 된장찌개 끓이기부터 주춤..... 된장이 있어야 뭘 끓이든 말든 할 텐데, 냉장고 안에도 부엌 선반 어디에도 된장이 보이질 않는다.
이 구석 저 구석 아무리 뒤져도 행방이 묘연한 된장 통. 결국 누워계신 엄마를 채근해 된장이 있는지 없는지, 대체 뭘로 끓여야 하는지 예정에 없던 된장 통 찾기 대 탐사를 하는데.. 이건 젠장이다.
된장은 바로 집 마당 수돗가 옆에 나란히 줄 선 어림짐작 예닐곱 개의 장독.. 그중 한 곳에 계신단다. 그러니까 된장찌개 하나를 끓이는데 마당까지 나가 어느 단지일지도 모르는 장독을 뒤져 된장을 퍼와야 한다고?!
아픈 노인을 돌보느라 더해진 노동은
문명생활에 흠뻑 젖어 최소한의 노동에 적응한 내 육체부터 고되게 만들더니 더불어 예민을 곁들인 격한 짜증까지 불러냈다.
'미쳐. 저 몸으로 메주를 띄웠네.
이러니 아프지. 된장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아픈 몸으로 그걸 만들고 있냐고요! 자기 아플 걸 모르고, 미련하게! 요즘 세상에 누가 집에서 된장을 만들어 먹냐고요! 몸이나 성해!!!'
혼잣말 같은 원성을 한바탕 토해내고 나는 그 대단한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된장 독 단지를 영접하러 나갔다.
아..... 된장찌개 하나 끓이는데 이게 웬!
간장단지, 고추장 단지는 그래도 알아봤다. 그러나 다른 서너 개 단지는 당최 내용물이 무언지 알 길이 없다. 겨우 냄새로 단지를 찾아 된장을 퍼 들어오는데 빨랫줄에 머리가 걸려 한번 휘청. '아.. 이놈의 된장!'
된장이 싫은 게 아니다.
엄마의 미련함이 싫은 거다.
평생 식구들에게 만들어 먹인 된장. 죽기 전까지는 그래도, 또 해 먹여야 하는 게 엄마 일이었던 거다. 내가 힘들면 안 해도 되는 거라 백번 말하면 자식들 입에 들어갈 거, 나 하나 힘든 건데 그냥 하고야 만다고 백 한 번 대답하는 엄마의 미련한 사명감. 고지식함.. 난 내 자식에게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 미련함을 피하고 싶은 거다.
엄마 된장은 물에 개면 휘휘 풀려 짠하고 찌개가 완성되는 개량 된장이 아니다.
일일이 사람 손으로 메주를 으깨며 만들다 보니 콩 덩어리가 숭덩숭덩 남아 그대로 끓이면 개운한 맛이 덜하다. 그러니 쌀 조리에 한 숟갈씩 덜고 그 위에 육수를 살금살금 끼얹어 된장찌개의 농도를 맞춰 간을 한 뒤 콩 찌꺼기는 버려야 한다.
육수가 바글대면 먼저 감자를 넣어 한소끔 끓이다가 양파와 호박을 텀벙 더해준다. 뒤따라 다진 마늘에 청양고추까지 들어가면 된장 잡내가 사라지고 깔끔한 짠맛이 조화로워진다. 곧, 뭉텅하게 썰어 먹음직스러운 두부까지 들어가면 뚝배기는 미어터져라 풍성해지고 마지막으로 무심하게 고춧가루 한 숟갈을 척! 하고 휘둘러 준다. 이제 한번 더 보글거리는 소리만 감상하면 끝. 칼칼하고 개운하다. 방금 온갖 욕을 다 먹었던 꼬릿 한 된장이 맞나 싶게 깊고 구수한 진짜 된장찌개가 완성된다. 왠지 억울하고 분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어진다. 독 뚜껑을 여닫는 수고로움이 더 이상 문제 될 게 없다.
엄마의 세월은 철마다 김치를 담그고 장단를 채우느라 흘러갔다. 그런 엄마에게 시집가 살림을 살기 시작한 딸들은 간편하게 사는 게 미덕이고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인생을 낭비하는 일인 것처럼 굴었다.
마음만 먹으면 더없이 편하고 좋은 세상인데 왜 그리 답답하게 사시냐며.
엄마는 평생 최소 50번은 넘게 된장을 담그셨겠구나. 그럼 대체 된장찌개는 몇 번을 끓이셨을까.. 나는 엄마집에서 몇번이나 더 된장찌개를 밥상에 올릴 수 있을까..
나는 이제야 비워져 가는 엄마의 된장독이 아쉽다. 그러면서도 독을 채울 생각은 감히 해보지도 못하는 내가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