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사소한 명언
얼마 전 오랫동안 봐야지 하고 벼르던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드디어 보게 되었다.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 김태리가 현실 도피하려고 시골가서 요리하는 영화 - 쯤 될 것 같다. 특별한 갈등 구조도 절절한 사랑내용도 없이 김태리와 친구들의 시골에서의 소소한 일상을 보여주지만, 나름 네이버 평점 9.01(네이버가 못 미덥다면 왓챠 평점 3.9)의 '바쁜 일상 속의 힐링영화'라고 평을 받는다. 실제로 정갈한 한옥에서 차분하게 요리하는 장면이나,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는 시골의 정취를 담은 영상을 보다보니 마음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마무리 했을 '힐링영화'가 마음속에 박힌 이유는 다른 부분에서였다.
그렇게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이 돼?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도망치듯 고향에 내려온 지도 몇 개월, 맨날 서울로 돌아간다고 말하면서 어느덧 고모 농사를 도와주느라 바쁜 김태리에게 소신있게 회사를 때려치우고 농부의 삶을 사는 류준열은 무심히 정곡을 찌른다.
맞다. 바쁘게 산다고 해결되는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내 몸만 힘들어질뿐.
류준열의 말 한마디와 뒤 이어지는 김태리의 상념은 나 역시도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고 싶은, 어쩌면 던져 왔던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험기간이 되면 괜히 책상정리가 하고 싶어진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 표현이 진부한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 수없이 반복해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 어려운 현실을 마주하기 싫어서 당장 눈 앞에 닥친 상대적으로 쉬운 일부터 하는 버릇은, 더 이상 중간고사 기말고사 형태의 시험을 치르지 않는 나이가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이직을 위해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려고 하면 갑자기 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이 눈에 밟혀 치우지 않고는 못 배기겠고, 면접을 준비하려고 하면 컴퓨터에 정신없이 늘어져있는 파일들을 한 번쯤 정리해줘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개인적인 경험상 자신이 없을수록 일을 더 미루게 된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은 없으면서 잘하고 싶을수록 일을 더 미루게 된다. 이 때 내가 당장 해야하는 다른 일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다른 일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써버리고 '나는 이 일을 하느라 너무 바빴어' 라고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걱정과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문제는, 인생에서 그 '다른 일'이 사라지는 순간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몇 개월간 나는 회사일로 정신없이 모든 에너지를 쏟으면서 일했다. 한창 성장하는 스타트업의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면서 도전적인(a.k.a., 말도 안 되는) 목표로 압박이 들어왔고, 어찌하다 보니 팀 내에서도 나에게 상당히 많은 업무가 몰렸다. 깊은 고민따윈 없이 쳐내는 수준으로 업무를 처리하더라도 매일 열두시가 되어버리기 일쑤였고, 지친 몸과 업무를 다 끝내지 못했다는 불편한 마음을 이끌고 집에 와서 휴대폰이나 만지작거리다 자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계속 바쁘게 살고 있다. 회사일로 바쁘면 나름 커리어에 도움되는 건설적인 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잠시라도 생각할 시간이 생기면 마치 시험공부를 미룰 때와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단순히 일이 바쁜 것과 성장하고 있는 것은 다르며,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더욱이나 다르다. 지금 나의 바쁨은, '이 일을 하느라 너무 바빴어'의 바쁨이다. 회사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지만 내가 성장하거나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마음 깊숙히는 인지하고 있고, 이를 외면하다 보니 자꾸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며나온다.
이렇게 바쁜데, 언제 고민할 여유가 있어?
내가 평일에 그렇게 고생하는데, 주말에는 좀 쉬면 안 되나?
나의 문제는 회사에서 내가 맡은 업무 수준의 문제일수도 있고, 다니고 있는 회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아예 회사냐 회사를 벗어난 삶이냐의 문제일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단순히 회사에서 바쁘게 열심히 일한다고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에너지가 없어도, 일하느라 이렇게 고생했으니 자유 시간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쉬고 싶어도 이 문제에 맞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 변화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다시 리틀 포레스트로 돌아오면, 주인공 김태리는 사계절을 보냈던 고향을 떠났다가 얼마 시간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다. 아예 정착할 마음으로 왔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정황상 그러려니 추측해본다.
주인공이 다시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것도 괜찮고, 고향에 돌아와 사는 것도 괜찮고, 아예 다른 취업을 준비하는 것도 괜찮다. 어느 선택을 하든 그것이 본인의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고, 순간의 외면이 아니라 길게 바라본 방향이라면 맞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바쁜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의미없는 바쁨으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지금 너무 바쁘다면, 그래서 마음의 여유가 없을수록 스스로에게 한 번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게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되니?"
머릿속에서 지나가는 상념을 떠올릴 때는 매끄러운 한 편의 글이 이미 완성된 것만 같다. 막상 글로 옮기다 보면 이렇게나 어색하고 불명확한 표현들이 또 없다. 그런 요소에 집착하다 보니 글 한 편을 완성하는데 일 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 미완성으로만 서랍 속에 박혀 있었다. 이번에는 일단 완성해보려고 한다. 뭐든지 시작하는게 중요한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