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서의 빈칸을 채우는 담대함
성장과정, 성격의 장단점, 경험 및 경력, 그리고 지원동기 및 포부. 제가 첫 직장에 입사하던 이십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기소개서를 구성하는 이 네 가지 기본 틀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어쩌면 일의 현장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본질적인 기준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안을 채우는 방식에는 분명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과거에는 성장과정을 쓸 때면 으레 "서울시 마포구에서 태어나 엄하신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로 시작하는 천편일률적인 서술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특히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확산된 '블라인드 채용'은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했습니다. 블라인드 채용이란 지원자의 출신지, 가족관계, 학력, 성별 등 직무 능력과 무관한 편견 요소를 배제하고 일에 대한 역량으로 평가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기업들은 이제 지원자의 배경이 아닌, 실제 성장 과정에서 어떤 역량을 키워왔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맡은 일을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여전히 4대 기본항목으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는 기업이 있지만 이제는 기업마다 자기소개서의 문항들이 복잡하고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채용 시장의 변화와 상관없이 장애 학생들은 기존의 4대 기본 항목에만 맞춰 작성하는 훈련을 받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긴 지문이나 새로운 유형의 질문 앞에서 우리 청년들은 당연히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공공기관과 외국계 기업 등 장애 학생들의 취업의 문이 아직은 작지만 확장이 되고 직무가 다양해지는 만큼, 이제는 장애청년들 대상 교육도 달라져야 합니다. 과거의 틀을 넘어 변화하는 채용 시장의 트렌드를 이해하고, 현장이 원하는 인재로 성장하도록 돕는 새로운 훈련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 자기소개서 항목을 쪼개고 분석하는 작업부터 시작했습니다. 의사소통은 원활하지만 긴 문장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발달장애뿐 아니라 비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해, 문장을 잘라 이해시키고 그에 맞는 스토리를 찾아 떠나는 '질문의 여행'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배운 코칭 기법은 학생들 내면에 숨겨진 보석 같은 이야기를 어느 지점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탁월한 나침반이 되어주었습니다. 질문을 통해 여행 가방을 채우듯 하나둘씩 모아진 이야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학생들 내면에 숨겨진 빛나는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비장애 학생들에 비해 '일의 경험'은 적지만 장애를 가지고 살아온 학생들의 삶, 그 자체가 이미 치열한 도전이었고 용기였으며 성장이었습니다. 간혹 장애 학생들에게 "직무와 연관된 역량을 드러내는 경험 외에 감정적인 이야기는 쓰지 말라"라고 단언하는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그분들의 논리를 비난할 생각은 없으나, 그렇게 써야 할 스토리를 재단해 버리면 우리 학생들은 정말로 쓸 이야기가 사라지고 맙니다.
지난 10년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비록 직무 경험이 부족하더라도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합격의 문을 연 학생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니 자기소개서 앞에 앉아 쓸 말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잠시 긴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쓸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라, 세상의 잣대가 내 이야기를 함부로 재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겪어온 차별과 편견,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그 안에는 이미 도전이 있고, 그 안에는 깊은 인내가 있으며, 그 안에는 묵직한 성실이, 그리고 두려움을 안고서도 기어이 한 걸음 내디뎠던 용기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