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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석 앞에서 멈춘 감각

나를 멈추게 한 불편한 순간들

by 매체인간




임산부석 앞에서 멈춘 감각


지하철을 타다 보면 임산부석에 앉아 있는 중년 남성이나 여성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장면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임산부석이라는 제도의 목적은 분명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 목적이 무시된 채 개인의 피로와 습관이 차지한다. 그 순간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동시에 나 자신을 비춘다. 혹시 나도 다른 자리에서, 다른 상황에서 비슷한 무감각과 이기심을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불편함은 타인의 행동에서 시작되지만, 곧 나를 향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감각의 입출력 구조로 보자면, 이 장면은 하나의 ‘감각적 충돌’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양보해야 한다”는 사회적 코드와 “나도 피곤하다”는 개인적 코드가 맞부딪히는 순간이다. 그 충돌은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감각이 해석되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불편함은 그 충돌이 내 안에서 소리 내는 울림이다.


나는 그 울림 앞에서 멈춘다. 멈춤은 곧 응답의 준비다. 만약 그 장면을 보고도 아무런 감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이미 무감각의 구조에 포섭된 것이다. 그러나 불편함이 나를 멈추게 할 때, 나는 관계의 가능성을 자각한다. 타인을 향한 나의 응답 가능성이,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의 윤리가 새롭게 드러난다.


이때 불편함은 탈감각 지평을 여는 문이 된다. 임산부석이라는 작은 제도적 장치 안에 드러난 것은 사실 ‘우리 사회의 배려와 무관심의 경계’다. 불편한 감각은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다. 나 역시 피곤함을 핑계로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은 적은 없는가. 나의 일상적 습관 속에 숨어 있는 이기심은 없는가. 타인에게서 본 불편함은 결국 나 자신을 향한 물음으로 돌아온다.


관계적 존재로서 인간은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임산부석의 풍경은 단순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감각적 구조를 반영한다. 한 사람이 양보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는 공동체의 균열이자 무관심의 상징이 된다. 반대로 누군가 양보의 몸짓을 실천한다면, 그 작은 행동은 사회 전체를 향한 응답이 된다. 불편한 순간은 나로 하여금 그 선택의 기로 앞에 서게 한다.


결국 나는 묻는다. “왜 저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다음이다. “나는 어떠한가?” 불편함은 타인을 향한 판단을 넘어, 나의 존재를 성찰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감각은 나를 흔들고, 그 흔들림은 응답의 가능성을 연다. 그 응답은 단순히 자리 양보의 행위에 그치지 않고, 관계적 존재로서 서로를 돌보아야 한다는 영성적 부름으로 확장된다.


임산부석 앞에서 멈춘 불편함은 결국 나를 향한 질문이었다. 나는 어떤 자리를 차지하며 살고 있는가. 내가 앉아 있는 그 자리가 혹시 타인의 생명을 지탱할 자리가 아닐까. 감각은 이 질문을 멈추지 말라고 요구한다. 불편함을 통해 우리는 무심한 일상의 구조를 넘어, 더 깊은 응답의 차원, 즉 “우리”의 사회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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