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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듐레어 Aug 04. 2023

구아바와 파파야가 나뒹구는 캐리비안의 조용한 대소동.

루피시아 5509. 그레나다

이름이 아주 심플하다. 보통은 세줄인데.

오드리제이 보부상님의 행낭에서 꺼낸 루피시아의 그레나다. 여름을 맞아 과일 가향을 많이 샀는데 어느덧 마지막 가향차다. 담백하게 설명부터 해석해 보면 구아바 가향 홍차에 파파야를 푹푹 넣었고 남국의 달콤한 향기가 호우코라고 한다. 그럴싸하군.

찍고 나서 보니 파파야가 사진에 없다. 실제론 주황색 파파야 과육도 꽤 들었다.

노랑 빨강 과육에 노랑 빨강 파랑 꽃잎이 검은 홍차잎 사이에 반짝인다. 들어간 재료는 파파야 과육, 블루 마로우, 잇꽃, 마리골드가 들어갔다고. 재료명에는 들어있지 않지만 망고과육도 보인다. 노란 메리골드와 붉은 잇꽃, 그리고 파란 블루멜로우가 들어있다. 블루멜로우는 온도나 산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찻물을 만드는데 블랜딩에 살짝 들어간 정도라 색변화를 보거나 하긴 어려울 것 같다. 블루멜로우 잘 쓴 걸로 유명한 차는 알디프의 스페이스 오디티. 다음에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레몬 한 조각을 띄워주거나 레몬즙 한두 방울 넣어주면 그레나다에서도 수색의 변화는 볼 수 있겠지만 본디 홍차에 레몬 띄우면 변하는 수색 정도일 것이다. 파란색으로 다른 선택지도 많았을 텐데 왜 블루멜로우를 넣어서 생각 복잡하게 만드는 걸까. 보통은 이런 생각을 안 하니까요 선생님.

위에서 찍었으니까 플라잉 더치 호

300ml, 6g, 2.5분. 늦은 저녁이라 찻자리 셋팅 같은 건 없고 수색 기록을 위해 그냥 찍어보는 찻잔. 나름 예쁜 웨지우드인데 뭔가 정안수도 아니고 황혼보다 어두운 자여 내 몸에 흐르는 피보다 붉은.... 남국의 달콤한 향보다는 꽃향기가 먼저 다가온다. 구아바와 파파야가 실제로 먹어보면 엄청 달고 그런 경우가 별로 없던데 딱 그 느낌이다. 생각해 보면 열대과일의 찐득한 단맛은 필리핀이나 태국 같은 동남아의 느낌인 것 같다. 카리브해 남쪽 어딘가의 열대는 이런 느낌일지도. 맛도 향도 순딩순딩하다. 적도의 뜨거움 보다는 깊은 산속 옹달샘에 가깝다. 다음잔으로 옮겨갈수록 과일의 풍미가 살아난다. 끝에 가면 좀 상큼한 맛도 도는데 그 무렵엔 수렴성이 같이 짙어지기 때문에 여운이 길지 않게 마무리된다. 실론이 잠시 스치고 가는데 아마 블랜딩 한 베트남 홍차에서 나는 맛인 것 같다. 아쌈 비스무리에 실론인척 하는 베트남 블랜딩이겠는데 그리 중요하진 않은 것 같다.


열대과일 블랜딩은 언제나 얼음과 궁합이 좋다. 얼음 가득한 컵에 150ml, 6g, 2.5분 우려낸 차를 시원하게 따라낸다. 급랭 수색이 의외로 밝다. 입에 머금는 순간 적당한 무게의 홍차가 바퀴 달린 듯 휭 입안을 지나가고 혀가 살짝 말라가면서 뒷향이 느껴진다. 이상하게 아이스로 오니까 별 특색이 없네. 입에 물고 있자니 이제야 조금은 가향차 다운 모습이다. 핫도 아이스도 전반적으로 홍차의 바디감보다 수렴성이 더 나오는 편. 그리고 아이스에서도 다 마셔갈 때쯤 진한맛이 살아난다. 냉침의 경우 떫은맛은 수그러들지만 그 외의 모든 것도 다 수그러들어서 좋은 건지 잘 모르겠다. 마시고 나서 입안의 여운은 그래도 냉침에서 긴 편.



여러분 그거 아세요? 어떤 차들은 막 우렸을때보다 서빙뒤에 잠시 뜸 들이고 마시는 게 더 맛있어요. 디캔팅한다고나 할까. 그레나다야 말로 잠시 기다렸다 마시면 안정적으로 맛과 향이 살아난다. 물론 너무 오래 두면 향이 다 날아가니까 잠시만. 25도 바람 없는 공간에서 30분 정도 기다렸더니 딱 좋았다. 물론 안기다려도 되는 다른 맛있는 차들도 많지.




망고 파파야가 반짝인다.

밀크초코 같은 갈색의 찻잎 사이사이에 과육과 꽃잎이 화려하다. 화려한 모습과는 다르게 어딘가 허술한 존재감을 보이는 캐리비안의 악동 캡틴 잭 스페로우. 약간은 의뭉스럽게 여기저기 촐싹거리지만 알고 보면 다 뜻이 있다구.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맞아 들어가는 우당탕탕 캐리비안의 맛이 느껴지는 차였다.



추천곡 - He’s A Pirate (Hans Zi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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