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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은 Apr 27. 2024

우연 조작

 

 운명에는 세 번의 우연이 필요하다. 스친 옷깃은 후하게 쳐줘야 인연, 누군가에게 반하는 데에는 3 초면 충분하다면서 운명은 왜 그토록 까다로운지. 반한다는 건 헐겁고 운명은 질겨 보인다. 그 날, 3 초의 전율에 압도당한 나는 세 번의 우연을 인내할 수가 없었다.


 그 애와 나에게는 두 개의 우연이 있다. 하나는 같은 날 진행되는 많은 공연들 중 우연히 같은 공연을 보게 되었다는 것. 또 하나는 그 공연을 함께 관람하기로 결정했다는 것.


이거 네 차야? 아니, 엄마 차야.

그렇구나…….

학교는 어디 다녀? 나는 직장 다녀.

그렇구나…….


 마지막 하나의 우연을 발견하기 위해 분투해 봤지만 그 애와 내 사이에는 서로를 모른 채로 살아온 시간만큼의 간극이 있었다. 하나의 우연이 부족해서, 결국 나는 그 애의 내일에서 하차했다.



‘다음 주 주말에 시간 되면 공연 보러 갈래?’


 그까짓 우연이 뭐라고 질척거리지 못했던 나를 후회할 때, 그 애의 문자 메세지가 도착했다. 수긍한다면 세 번은 더 옷깃을 스칠 것이고, 우리는 조금 덜 헐거워질 수 있겠지. 어쩌면 단단히 결속될지도 몰라. 소란한 기대로 주간을 소화했다.



 사랑과 3 초를 말하던 누군가는 그 여운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 법도 했다. 나는 여전히 생생하게 전율하고 있었고, 멎을 때를 예측할 수가 없었으니까. 이미 3 일은 지났으니 어쩌면 3 개월이려나? 그놈의 3, 3…….


 함께 오전을 보냈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우연이 부족했다. 마치 기적처럼 구전되던 3 초로 기대할 수 있는 게 이런 삼삼한 관계였나?


 모든 나란함이 우연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동행인을 알고 예매한 자리는 우연일 수 없었다. 공연이 클라이맥스를 향할 때는 이 삼삼하고 느슨한 인연의 종결을 생각했다. 그 애와 나는 만남에 구실이 필요한 사이. 하지만 내게는 함께 관람할 새로운 공연의 티켓도, 그 애의 주말을 독점할 마땅한 이유도 없다. 결국 다시 나란하기 위해서는 기약 없는 마지막 우연을 인내해야 할 테다.


 헛헛한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미련한 손바닥 위로 네모 반듯한 금속이 만져졌다. 그 애가 잠시 맡겨 둔 USB였다.


 떠나기 전에 돌려줘야 하는데. 알면서도 꾹 움켜쥐었다. 내가 지금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아서 이 USB의 존재를 잊었다면 돌려주기 위해 다시 만나야 했을 텐데. 내게는 그 번거로움이 필요했다. 그래, 내가 등을 돌릴 때까지 돌려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모른 척 걸어가는 거야. 먼저 내밀지 않는 거야. 기약 없는 우연보다는 비겁한 구실이 쉬웠다.


 그 애는 내게 맡긴 USB의 존재를 잊은 듯 손을 흔들었고, 나는 그 애의 내일에 몰래 발을 걸친 채로 등을 돌렸다.


나한테 맡긴 것 깜빡했지? 안 받아 갔어. 당장 필요한 것 아니면 다음 주 주말에 돌려줄까?

어? 당장 월요일에 필요한 건데. 큰일 났다.

헐. 어떡하지? 그럼 내가 내일 가져다줄까?


 거 봐, 눈속임은 일회용이잖아. 3 초의 섬광에 눈이 먼 나는 비겁과 눈속임이 동일하다는 걸 망각했다. 후회가 깊어질 때쯤 전송된 의외의 답장에 나는 몰래 걸친 발을 조금 더 깊숙이 밀어 넣는다.


음… 그냥 내가 내일 받으러 갈게. 네가 말한 초밥 맛집 같이 가 보자.

미안해. 나도 차에 타고 확인해서…….

괜찮아. 이참에 오랜만에 그 동네 구경도 하고 좋지.


 세 번째 반복된 3 초와 세 번씩 반복된 옷깃으로 이루어진 세 번째 만남. 이번에는 미련한 손을 숨기지 않기로 한다. 다음 주 주말에 약속 있어? 헐겁고 삼삼한 이 관계를 끈끈한 손으로 조여 본다. 약속 없어. 그럼 우리 다음 주 주말에 또 만날까?



 사실 그때 USB 일부러 안 준 거야. 인사하기 전부터 내 주머니에 있는 것 알고 있었어.


 나는 이제야 그 애에게 실토한다. 네게는 세 번째 우연이었던 그날이 실은 비겁한 구실이었노라고. 너와 내 사이에는 여전히 채우지 못한 하나의 우연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운명으로 부르기에 부족함 없다고.


 세 번째 우연까지의 인내를 잃게 하는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 운명적이라는 수식을 포기할 수 있을까. 3 초의 전율에 마비된 나는 감히 우연을 조작했다. 내게는 인내의 세 번보다 3 초의 섬광이 훨씬 운명적이다.그 애의 USB가 질척한 손끝에 들러붙을 때, 그것을 꽉 쥐기로. 몰래 걸쳤던 발을 깊숙이 밀어 넣으며 기약했던 내일을. 함께하는 모든 시간을.


 세 번의 우연이 만든다는 운명은 사실 조작으로 범벅된 사랑일지도 모른다. 운명적 사랑은 불투명한 세상의 우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명한 나의 지금에, 나의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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