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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은 May 06. 2024

내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내게는 약속 장소보다 오늘 그 사람을 부를 호칭이 더욱 중요하다. 어떤 호칭들은 관계의 거리를 재단해 버리는 듯해서, 주관식 서술 문제의 정답지 같아서.

 성을 붙여 부르는 이름이 딱딱해 보이지는 않을까 여러 번 입안에서 굴려 보아야만 했고, 꿈꾸는 사람은 당신의 이상향을 별칭 삼는다. 언니나 오빠보다는 사랑스러운 애칭을 선호한다.


 크게 호명하는 순간, 그 이름은 대개 정체성이 되었다.  정의를 해명하는 것은 늘 당사자였고, 음성이 없는 것들은 속수무책으로 재단됐다.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건 사연보다 호명이었다.


 호명으로 재단되는 것들은 누군가를 칭하는 호칭에 국한되지 않았다. 지평선을 멀리 두고 해변을 긋는 두 발이 그랬다. 엄지발가락 끝을 해변이라 칭하면 젖은 모래 밖이 해변이었지만 파도가 쓰다듬고 돌아가는 발목 부근을 해변이라 부르면 그곳이 해변이 되었다. 허리 부근까지 푹 잠긴 채로 바다라 부르면 내 허리선은 바다의 경계가 되었고, 언젠가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대해가 바다가 되었다.



 내 오랜 그녀들에 말하기를. "스물아홉은… 아홉수잖아?"


 나는 그런 호칭에 쉽게 동의했다. 물론 아홉수에 엮인 미신을 경험한 적도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핑계로 쓰기에 적절해서. 실패는 멋이 없고, 삼재나 아홉수 같은 것들은 어쩐지 불가항력의 가련한 피해자가 된 것 같았으니까. 자책은 아프고, 호소는 개운했다.


 그만큼이나 쉽게 끝을 붙였다. 어느 정도 정성을 쏟고는 최선이라고 칭하며, 그것이 나의 가능성을 재단하는 것도 모르고 노력을 귀결했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니까 여기서 그만. 서른의 초입은 어른이니까 더는 어리광을 부려서는 안 돼. 하고 싶은 건 어린아이일 때 해 보는 거야. 어른이라면 슬슬 안정되야지. 서른, 어른, 어리광, 어린아이, 안정. 남발하는 호명들로 정체성을 구속한다. 걔는 학원 등록을 포기하고, 쟤는 이직을 포기하고.


 그렇다고 언제나 무력하게 호명되고 있지만도 않았다. 내가 글을 쓰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마음을 졸였다고 했다. 그녀는 책을 사연이라고 불러서, 혹시 유년의 상처를 해소하기 위해 글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자신이 보지 못했을 상처들을 상상하며 자식을 마음으로 쓰다듬었나 보다. 나는 가장 감추고 싶었던 사람에게 슬픔을 들킨 책들을 해명한다. 에이… 엄마, 너무 좋아하면 원래 따라 하고 싶어지나 봐. 너무 좋아서야.


 또 언젠가는 결혼 적령기의 우리를 결혼을 선택할 수 있는 나이로 해명하며 서두르려는 발목을 달랜다. 나 다음 달도 지인 결혼식만 두 개야. 근데? 야, 연애는 필수고 결혼은 선택이래.



 슬픔을, 필수와 선택을 통쾌하게 정정하면서도 존중을 자만으로 호칭했다. 누구 엄마, 결혼 적령기, 어머니. 수많은 오역들을 질책하면서도, 그 책임은 늘 바깥으로만 향했다. 우리를 낙오자로 바라보는 그 눈은 찌를 줄 알았지만 스스로를 존중할 줄 몰랐다.



 열아홉의 나를 되짚어 본다. 같은 아홉을 달고도 다음을 기다리던 그 마음을. 어느 때의 이별을 떠올려 본다. 단지 그 애가 나를 야! 라고 불렀다는 까닭 하나로 등을 보이던 단호함을. 목이 늘어난 티셔츠나 대충 끌고 나온 슬리퍼는 별것 아니었어도 감히 사랑하는 사람을 날카로운 복식으로 호명하는 남자만큼은 견딜 수 없는 나를.


 같은 아홉을 두고 나는 끝이라 불렀고, 호칭 하나로 이별하던 나는 스스로를 온갖 오역들로 불렀다.

 스물아홉이 지각이 된 것도, 아홉수가 된 것도, 내가 최선을 다한 실패자가 된 것도, 어리광이 된 것도 전부 호명이었다. 오역자들의 눈을 찌르겠다면서도 그들의 시선에 걸려 재단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이 오역인 줄 알면서도 먼저 수치스러운 호칭들로 단련되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 사이를 지평선으로 호명했을 때의 아득함을 생각한다. 환승역의 이어지는 화살표들을 기억한다. 누구 엄마로 불리던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는 그녀들의 우정을 느껴본다. 상실을 돌아감으로 표현했을 때, 막연히 약속되던 훗날을 기억한다.


 함부로 끝을 부르지 않기로 한다. 끝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언제나 진행 중이다. 끝을 정하는 것은 끝이라는 호명. 한계 없는 진한 단어들로, 수를 매기지 않는 단어들로. 간혹 날아드는 날카로운 재단들에 함부로 깎여 나가지 않도록. 우리는 그 날카로움들보다 단단해질 것. 누군가 끝이라고 부를 나를 정정하는 그때를 계획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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